교카(狂歌; 광가)는 일본의 시 단카의 대중적인 패러디 하위양식으로, 5-7-5-7-7의 31음으로 이루어진다. 에도 시대(17~18세기)에 유행한 이 양식은 덴메이 시대(1781~89년)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1]
간시 양식(일본 시인이 쓴 중국 시) 시인들이 익살스러운 교시를 썼던 것과 비슷하게, 일본 고유의 와카 양식 시인들도 31 음절 양식의 익살스러운 시를 지었다.[1] 다나카 로쿠오는 기쇼카(戯笑歌, 장난스럽고 조롱하는 구절)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양식을 제시하였는데, 코미디 로스트와 비슷한 분위기의 연회장에 참석한 손님을 표적으로 낭독하는 시였다.[2]
에도 시대 (17~19세기)에 교카는 크게 두 지류로 나뉘었는데, 한 지류는 에도(오늘날 도쿄)에 기반을 두었으며, 나머지는 간사이 지방의 나니와 교카였다.[1] 16세기 교토에서 생겨난 나니와 교카는 마쓰나가 데이토쿠(1571년~1654년)와 같은 귀족들이 처음으로 선보였다. 나중에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평민들 사이에도 유행하게 되었는데, 나니와라는 옛 이름은 이 지역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1]
18세기 후반, 다누마 오키쓰구 로주의 경제 정책이 해방감을 불러 일으키면서 이 시기에 다양한 출판 형태가 번창하였다. 요모노 아카라(1749년~1823년), 아케라 간코(1740년~1800년), 가라코로모 기슈(1743년~1802년)와 같은 에도 사무라이 시인이 모여 교카 시 모임과 경연을 가졌으며, 이후 10년동안 출판을 시작하였다. 가장 초기에 나왔고 가장 큰 모음집이기도 한 《만자키교카슈》(万載狂歌集; 만대광가집)는 아카라가 엮어 1783년 출판하였다. 에도의 교카는 덴메이 시대(1781~89년)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1] 이 형식은 하급 사무라이, 상인과 같은 평민, 중국 및 일본 고전학자를 포함하여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을 매료시켰다.[2] 비록 평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퍼졌지만 교카를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한 고전 교육이 필요하였기에 즐길 수 있는 청중이 제한되었으며, 그 인기가 현대까지 지속되지 못하였다.[1]
수많은 교카 시가 짓펜샤 잇쿠의 골계본 《도카이도주히자쿠리게》(1802~22년)에 등장한다.[1]
교카 시는 5-7-5-7-7 조의 단카에서 그 형태가 파생한다.[1]
대부분의 유머는 저속하거나 평범한 것을 우아하고 시적인 환경에 놓거나 고전적인 주제를 공통 언어나 태도로 다루는 것에서 만들어진다.[1]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말장난과 언어유희, 재담을 자주 사용하여 다른 언어로 매끄럽게 번역하기가 어렵다. 일반적인 작법은 혼카도리(本歌取り),로, 고전시를 기반(本歌; 혼카)으로 취해 저속하게 꼬아서 변주를 만들어낸 것이었다.[1] 다른 일반적인 작법으로는 텍스트 간의 연관 단어를 이용한 엔고, 중심 단어를 이용한 가케코토바, 비유적 언어인 미타테가 쓰였다. 와카에 흔한 수식어 마쿠라코토바는 교카에 쓰이지 않는다.[2]
다음 예시는 기노 사다마루(紀定丸, 1760년~1841년)가 고전 시인 사이교(1118년~1190년)의 유명 와카 《신고금 와카집》(1205년)을 혼카로 사용한 교카이다.[2]
사이교의 와카 | 기노 사다마루의 교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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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원문 | 한글 독음 | 한국어 번역 | 일본어 원문 | 한글 독음 | 한국어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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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서 사이교는 최고의 벚꽃 명소를 다시 떠올리기 위해 오늘날 나라의 요시노산에 있는 벚나무의 가지를 부러뜨렸다. 다음 해에 돌아올 때 그는 부러뜨린 가지를 보고 대신 전에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벚꽃놀이를 가기로 결정한다. 기노 사다마루는 원작을 패러디하여 몇 음절을 바꾸고 화자가 자신이 부러뜨린 가지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