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림군(綠林軍)은 신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군이다. 초기에 녹림산(綠林山)을 근거지로 했기에 녹림군이라고 부른다. 마침내 한 경시제를 세워 신나라 멸망 후 중국의 정권을 잡았다. 후세에 도둑을 녹림이라고 부르는 기원이 된다. 녹림산의 위치는 현재 호북성이다.
신나라 말기, 남방에서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늪과 들로 숨어들어가 도둑질을 했다. 이때 강하군 신시현의 왕광과 왕봉이 분쟁을 조정하고 있었는데, 거병하여 수백 명을 모아 향(鄕)과 취(聚)들을 흩어져 공격하고 녹림산(綠林山)을 본거지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천 명까지 무리가 불어났다.
지황 2년(21년), 2만 군대를 이끈 형주목 아무개의 공격을 강하군 운두현에서 물리쳤다. 형주목의 치중을 노략하고, 강하군 경릉현을 함락하고, 운두현과 안륙현을 전전하며 여자들을 납치해 녹림산으로 돌아가니 무리가 5만 여명으로 늘어났다. 주와 군에서는 녹림군을 어찌할 수 없었다.[1]
지황 3년(22년), 역병이 심하게 돌아 절반 가량이 죽어나가니, 각자 흩어져서 떠나 하강병과 신시병으로 나뉘었다. 또 평림병, 용릉병이라는 자생 반란군이 생겨나 녹림군의 일파가 되었다.[1]
용릉병은 녹림군 중 신시병과 평림병을 불러들여 연합하고 함께 남양군 완현을 공격하려 했으나, 도중에 소장안취에서 전수대부 진부와 전수속정 양구사에게 대패했다. 신시병과 평림병은 떠나려 했으나, 하강병까지 합류해서 다시 진부와 양구사를 공격해 죽였다. 신나라에서는 납언장군 장우과 질종장군 진무를 보내서 공격했으나 유인은 이들도 무찔렀다.[3]
진부와 양구사가 죽은 이후 녹림군의 세력은 크게 불어났으나, 단일한 지도자가 없는 중구난방의 상황이라 녹림군의 제장들은 황제를 추대하기로 했다. 용릉병의 지도자 유인과 평림병 소속의 경시장군, 흔히 한 경시제라 하는 유현이 후보로 올랐다. 하강병의 왕상과[4] 남양의 사대부들은 유인을 지지했으나, 신시병과 평림병은 유현을 지지했다. 내분을 꺼린 유인이 물러나 유현이 황제로 추대됐다.[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