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
李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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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의친왕 이강 | |
조선국 내의원 제조 겸 사옹원 제조 | |
임기 | 1894년 7월 1일 ~ 1895년 4월 30일 |
군주 | 고종황제 이형 |
섭정 | 김홍집(1894.06.25.~1894.07.19.) 영선군 이준(1894.07.19.~1894.07.27.) 왕세자 이척(1894.08.28.~1894.09.08.)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77년 3월 30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범숙의궁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 성동구 화양동 별궁 대한민국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동궁 안동별궁 대한민국 서울 종로구 성북동 성락원 대한민국 서울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 대한민국 서울 종로구 관훈동 사동궁 대한민국 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 |
사망일 | 1955년 8월 16일 | (78세)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사동궁 안동별궁 |
학력 | 일본 게이오 기주쿠 미국 로노크 대학교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
경력 | 조선국 보빙대사 대한적십자사 총재 대한제국 보빙대사 대한제국 육군부장(3성 장군)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겸 전임고문 |
정당 | 무소속 |
본관 | 전주(全州) |
부모 | 고종황제 이형(부) 명성태황후 여흥 민씨(적모) 귀인 덕수 장씨(생모) |
형제자매 | 순종 이척(이복 형) 의민태제 영친왕 이은(이복 남동생) 덕혜옹주 이덕혜(이복 누이동생) |
배우자 | 의친왕비 김씨(본부인) |
자녀 | 슬하 12남 9녀 (6남 이곤이 가문승계) |
종교 | 유교(성리학) → 천주교(세례명: 비오) |
군사 경력 | |
최종계급 | 대한제국 육군 부장(총장급) 전역 |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조선의 왕족이고 대한제국의 황족 종실이며 고종의 두번째 아들이다.
고종 후궁 귀인 장씨(貴人 張氏)의 소생으로 출생한 그의 본관은 전주이고, 휘는 강(堈)이며,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호는 춘암(春菴)[1]이다.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된 그는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6개국 특파 대사에 임명되었다. 1896년 미국에 유학하고, 1900년 대한제국 시기에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3성 장군) , 대한적십자사 총재, 순종 황제 대리청정 등을 지냈다. 한국 병탄 이후 일제에 비타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1월 21일 아버지인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을 당하자 의암 손병희와 3.1만세운동을 기획한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모임을 사동궁과 담을 맞댄 태화관에서 주선하였고,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11월, 대동단의 김가진, 전협, 최익환 등과 연락,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喪服) 차림으로 변장하고 만저우 안둥 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1919년 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 건너올 것을 계속 강요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끝까지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계속된 비밀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일제에로부터 형식적인 공(公)의 지위에서 물려나게 되었다. 해방 후 김구와 김규식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으로 있었고, 남북한 통일 대한민국 선거를 주장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이 있었다. 한국전쟁을 겪고, 병고와 영양실조로 고생하다가 안동별궁에서 기거 중, 임종 직전 천주교(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였으며, 세례명은 비오이다.
고종의 둘째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강(李堈)이며,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뒤에 강으로 개명하였다. 어머니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사서 궐 밖으로 축출되었지만 청년 시절 의친왕 이강은 적모 명성황후가 적자 순종이 후사가 없자 의친왕의 아들을 순종의 양자로 삼고자 후견인이 되어 궁으로 돌아왔고 총애를 받았다.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에 추증받고 다시 1906년 귀인(貴人)에 추증되었다. 귀인 장씨는 1887년 10월 14일 사망했으며 1911년에 묘소를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다.[2]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3]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되었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김덕수(金德修, 아명(兒名)은 김숙(金淑), 1881년 12월 22일 ~ 1964년 1월 14일)을 아내로 맞았다. 1894년 7월 내의원제조 겸 사옹원제조에 임명됐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려다가 중도에 되돌아왔다. 그 뒤 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일단락된 이후 일본 유학을 하여 일본의 게이오기주쿠 대학교을 거쳐 1899년(광무 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미국 내 각지를 순행하였다.
1901년 3월 버지니아주 세일럼의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우사 김규식, 서광범 등을 동기동창으로 만나며 친분 관계를 쌓기도 했다. 1901년 6월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대회에 수행원 및 우사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4]
로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및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그는 1900년 8월 대한제국 전례가 개편됨에 따라 의화군에서 의친왕에 책봉되었다.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3성 장군, 육군총장급)이 되었다. 1906년 7월 12일 의친왕 이강은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이후 고종의 후궁으로 귀인이 된 순헌황귀비의 견제를 받았다. 황자 서열로는 순종의 다음 서열이었으나 순헌황귀비의 견제와 일본의 영향 등으로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의친왕에게 다음 대통 자리를 권유했으나 부황 고종이 살아계신데 무슨 망말이냐며 거절을 했다.
1907년 부황 고종이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했다. 이복형 순종이 즉위한 직후 1907년 7월 27일에서 1907년 8월 7일까지 이복 형 순종황제의 대리청정을 맡았으나 1907년 8월 7일 의친왕의 황제 대리청정이 길어지면 득세할 것을 우려한 일제는 의친왕을 끌어내리고, 20살 어린 동생 영친왕 이은을 순종 다음의 황태자로 결정하였다.[5][6]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운현궁 이준용과[7] 사동궁 의친왕 이강을 견제하려는 순헌황귀비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의친왕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8]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 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의친왕은 황제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형이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8]
1910년 한일합방 직후 그는 친왕(親王)에서 공(公)으로 강등당하여 이강 공이 된다. 국권 피탈 이후에는 주색에 빠진 폐인행세로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던 의친왕은 항일 독립 투사들과 비밀리에 끊임없이 접촉, 교신하며 묵묵히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 1919 11월에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일제 치하의 황족으로 사느니 자유 대한의 국민으로 살겠다고 선포한 그는 독립선언서에 '의친왕' 이나 '이강 공'이 아닌 본명 '이강'으로 대동단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황족이 스스로 '대한민국'이라고 표기하였다 .
의친왕은 독립운동가 및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사들과 연락하며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臣民)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또한 구 양반이었던 동농 김가진 등이 상하이로 망명, 이들은 임시정부와 의친왕 간의 연락선을 접선, 주선하였다. 그 해 상복을 입고 상하이로 가려다 일본 경찰에 잡혔다. 황실인사를 망명하게 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등과 탈출을 모의하여 대내외적인 화제를 일으켰으나 도중 만주 안동에서 발각되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보복을 당했다.[9] 의친왕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10]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
의친왕
義親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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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이강 | |
사동궁 이화문 | |
의화공(義和公) | |
재위 | 1891년 12월 28일 ~ 1892년 1월 28일 |
군주 | 고종 |
의화군(義和君) | |
재위 | 1892년 1월 28일 ~ 1900년 8월 17일 |
군주 | 고종 |
섭정 | 김홍집(1894.06.25.~1894.07.19.) 영선군 이준(1894.07.19.~1894.07.27.) 왕세자 이척(1894.08.28.~1894.09.08.) 박정양(1895.06.01.~1895.07.01.) 김홍집(1895.12.17.~1896.02.11.) 왕태자 이척(1896.07.25.~1896.12.12.) |
의친왕(義親王) | |
재위 | 1900년 8월 17일 ~ 1910년 8월 29일 |
군주 | 고종 순종 |
섭정 | 윤용선(1901.12.19.~1902.01.23.) 이근명(1904.12.28.~1905.01.15.) 황태자 이척(1906.01.01.~1906.01.07.) 황태자 이척(1906.02.08.~1906.03.25.) 황태자 이척(1906.10.12.~1906.10.20.) 황태자 이척(1907.01.21.~1907.07.19.) |
순종 황제 대리청정(純宗 皇帝 代理聽政) | |
재위 | 1907년 7월 29일 ~ 1907년 8월 18일 |
전임 | 한규설 (순종 황제 임시 대리청정) |
후임 | 소네 아라스케 (기유각서 공동 주범) |
군주 | 순종 |
공(公) | |
재위 | 1910년 8월 29일 ~ 1930년 6월 12일 |
후임 | 영친왕 이은 이건 흥영군 이우 |
군주 | 대한제국 조선 황조 이태왕 이형 대한제국 조선 황조 이왕 이척 |
이름 | |
휘 | 이강 李堈 |
별호 | 휘(諱)은 이강(李堈) 초명(初名)은 이평길(李平吉) 호(號)는 춘암(春菴)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77년 3월 30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955년 8월 16일 | (78세)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사동궁 안동별궁 |
학력 |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
정당 | 무소속 |
왕조 | 대한제국 |
가문 | 대한제국 황실 |
부친 | 고종황제 |
모친 | 명성태황후 여흥 민씨(적모) 귀인 덕수 장씨(생모) 순헌황귀비 영월 엄씨(서모) |
배우자 | 본부인 의친왕비 김씨 그 외 측실 15인 |
자녀 | 슬하 12남 9녀 (장남 이건, 차남 이곤, 5녀 이해경 외 19인) |
기타 친인척 | 김사준(장인) 순종 이척(이복 형) 의민태제 영친왕 이은(이복 남동생) 덕혜옹주 이덕혜(이복 누이동생) |
종교 | 유교(성리학) → 천주교(세례명: 비오)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
능묘 | 홍유릉 예하 의친왕묘 |
웹사이트 | 의친왕기념사업회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대한제국 의친왕 숭모회 황실 보존 국민 연합회 |
군사 경력 | |
의화군 작위 시절의 의친왕 이강 | |
복무기간 | 1896년 3월 ~ 1899년 5월 |
근무 | 대한제국 육군 |
최종계급 | 대한제국 육군 부장 |
지휘 | 대한제국 육군 장군 |
서훈 | 1905년 대한제국 정부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 |
1919년 11월 20일자의 독립신문 기사에는 '의친왕의 친서', '의친왕 전하'라는 말과 함께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쓰여 있다.[11] 그해의 11월 25일자 《독립신문》 2면의 기사에는 의친왕의 상해행 기사로 대부분 할애되었으며 이후 그 뒤에도 상당 지면 할애되었다 한다.[11]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에 보고하여 의친왕에게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이강 공이라는 공족의 작위를 박탈당했으며, 그의 공위는 장남 이건(李鍵公)에게 습공되었다.
1919년 재판에 회부됐으며, 그는 같은 해 대동단 총재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기도 했다.[12] 이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던 그는 끝까지 거절·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으며 지속된 비밀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형식적이나마 '공'작위를 지닌 왕공족이었기에 사법적 제제를 가할수 없었던 일제는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공 작위를 강제로 빼앗긴 후 가택연금을 당하고 24시간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의친왕은 이후 광인과 주색에 빠진 것을 가장하여 기생들과 악사들을 통하여 독립자금을 전하는 등 일제의 감시의 눈을 피해 살았다. 1940년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 김구·김규식 등은 사동궁의 의친왕을 먼저 면담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1947년 3월에서 1949년 8월까지 2년 5개월간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겸 전임고문 직위를 역임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정치적 의사 표현을 최대한 삼갔다. 남북한 통일 대한민국의 선거를 치르자는 주장을 편 의친왕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게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자 황실을 배척하던 대통령 이승만의 정책에 의해 모든 재산을 국유화로 빼앗기고, 살던 사동궁 마저 민간에 불하되어 망국의 황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으로 피난갔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후 다시 서울로 되돌아왔다. 그 후 사동궁 별궁인 안동별궁(현 서울공예박물관)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나 황족으로서의 어떠한 예우도 없는 조건이 붙었다.
1955년 8월 9일 천주교로 개종, 병석에서 장면(張勉) 부통령(세례명 요한)을 대부로 하여 영세하였다.[13] 의친왕의 세례명은 비오이다.
1955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동별궁에서 영양실조 후유증과 스트레스(화병) 등의 합병증으로 79살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황족들은 망국의 원흉으로 지탄받으면서 재조명의 기회가 없었다. 능은 부황인 고종 황제의 능인 경기도 남양주군 미금읍(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내에 위치한 의친왕묘(義親王墓)이다.
1975년 생모 김금덕(의친왕 이강의 측실)의 위독 소식을 듣고 귀국한 그의 다섯째 딸 이해경은 30년 넘게 아버지 의친왕의 복권운동을 추진했으나 실패하였다.[12] 이후 2000년대 들어 의친왕이 임시정부 요인, 대동단 등과 비밀리에 서신연락을 주고 받은 점 등이 발굴되어 연구진행 중에 있다.
2022년 대한황실의 직계후손들과 의친왕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요인들의 후손들이 모여 의친왕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로세우고 전시회, 공연 등 문화예술행사와 학술회 등을 통해 의친왕을 재조명하고 있다. 의친왕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으로는 의친왕 이강의 장손이자 사동궁 사손인 이준(李準)이 추대되어 활동을 하고 있다.
의친왕과 의친왕비 연안 김씨에게서는 슬하의 자녀가 없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친왕 의친왕의 자녀는 12남 9녀이다.[16]일부 측실은 황손을 의친왕에게 맡기고 재혼한 여성들도 있었으며, 의친왕비 김씨는 황손들을 친자녀처럼 양육하였다. 근처에 생모가 양육하는 황손 몇 인을 제외하고는 사동궁(寺洞宮, 현재 종로구 인사동)에 대가족 형태로 거주하였다. 사동궁(寺洞宮)은 의왕의 사저(私邸, 저택)이며 동시에 의왕궁(義王宮), 의왕부(義王府)이다.
순서 | 황실명 | 아명 | 호적명 | 출생 | 사망 | 생모 | 거주지 | 출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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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 | 황손 이건(李鍵) | 용길 | - | 1909년 | 1990년 | 수관당 정씨 | - | 일본귀화 |
2남 | 황손 이우(李鍝) | 성길 | - | 1912년 | 1945년 | 수인당 김흥인 | - | 운현궁의 이준용 |
3남 | 황손 이방(李鎊) | 흥길 | 해진 | 1914년 | 1951년 | 수현당 정운석 | - | 자식 없음 |
4남 | 황손 이창(李鎗) | 창길 | 해직 | 1915년 | 사망 | 조병숙 | - | 은전군파 이헌용 |
5남 | 황손 이주(李鑄) | 수길 | 해일 | 1917년 | 1982년 | 수인당 김흥인 | - | 인평대군파의 이인용 |
6남 | 황손 이곤(李錕) | 명길 | - | 1919년 | 1984년 | 수인당 김흥인 | - | 사동궁 종주 |
7남 | 황손 이광(李鎤) | 형길 | 해청 | 1920년 | 1952년 | 송씨 | - | 계동궁의 이기용 |
8남 | 황손 이현(李鉉) | 경길 | - | 1922년 | 1996년 | 수경당 김창희 | - | - |
9남 | 황손 이갑(李鉀) | 충길 | 해룡 | 1938년 | 2014년 | 함개봉 | 뉴욕 거주 | - |
10남 | 황손 이석(李錫) | 영길 | 해석 | 1941년 | 생존 | 홍정순 | 전주 거주 | - |
11남 | 황손 이환(李鐶) | 문길 | 해선 | 1944년 | 생존 | 김혜수 | 산호세 거주 | - |
12남 | 황손 이정(李鉦) | 정길 | 해준 | 1947년 | 생존 | 홍정순 | LA 거주 | - |
1녀 | 황손녀 이영 | 길순 | 해완 | 1918년 | 1981년 | 수덕당 이희춘 | - | 계동궁의 이기용 |
2녀 | 황손녀 이진 | 길운 | 해원 | 1919년 | 2020년 | 수덕당 이희춘 | - | 계동궁의 이기용 |
3녀 | 황손녀 이찬 | 길연 | 해춘 | 1920년 | 2009년 | 수완당 김정완 | - | 계동궁의 이기용 |
4녀 | 황손녀 이숙 | 길영 | 해숙 | 1920년 | 사망 | 수길당 박영희 | - | 계동궁의 이기용 |
5녀 | 황손녀 이공 | 길상 | 해경 | 1930년 | 생존 | 김금덕 | 뉴욕 거주 | 의친왕비 김씨 |
6녀 | 황손녀 이장 | 희자 | 희자 | 1940년 | 2015년 | 김혜수 | 순천 거주 | 수도자 (여성) |
7녀 | 황손녀 이용 | 숙기 | 해란 | 1944년 | 생존 | 홍정순 | LA 거주 | - |
8녀 | 황손녀 이현 | 숙향 | 해련 | 1950년 | 생존 | 홍정순 | 서울 거주 | - |
9녀 | 황손녀 이민 | 창희 | 창희 | 1953년 | 생존 | 김혜수 | 산호세 거주 | - |
1905년, 의친왕은 워싱턴에 밀사로 찾아온 이승만을 몇 번 만나기도 했는데 당시 버지니아 주 살렘에 있는 로노크 대학에서 공부하다 종종 주미 공사관이 있는 워싱턴에 방문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의친왕을 만나보니 '게으르고 학업에 열의가 없다'는 느낌의 인상을 받았다고 하였다.[18]
의친왕은 사격술과 권총 사격술에 뛰어나 백발백중이었다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화가 나면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사격과 권총술로 화풀이를 했다고 한다.
의친왕은 사망하기 전에 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할 것을 약조하였다. 이는 조부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도 수만 명을 사형시킨 것(병인박해)에 대한 참회의 성격도 있었다. 1955년 8월 9일을 기하여 의친왕 이강은 천주교 교우이던 구왕실(舊王室) 서무계장과 부통령을 지낸 장면 등과 연락, 8월 15일경 그들의 영향으로 서울 가회동성당 박우철 신부를 불러다가 비오(Bio)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고 8월 16일에 영면했다.
대한제국 의친왕 숭모회(大韓帝國 義親王 崇慕會)는 매년 양력 8월 15일에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내 의친왕묘에서 의친왕의 후손 및 종현, 일반인들이 참관한 가운데 제향을 주관하기 위해 2006년 설립된 단체로 의친왕의 제향을 주관하는 공식 단체이다. 초대 대표회장으로 효령대군 19대손 이재용(李宰容)을 선임하여 매년 제향을 지내오다가 2013년 4월에 공식적으로 의친왕 숭모회는 해체되고, 봉행하던 의친왕 제향은 2013년부터 후손들이 지내다가 2022년 부터 의친왕가의 제4대 사동궁주 이준 황손을 중심으로 의친왕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의친왕기념사업회와 의친왕 숭모회가 공동주관으로 의친왕 기신제를 봉행하고 있다.
의친왕기념사업회(義親王記念事業會)는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들과 독립운동가의 자손들, 황실독립운동의 중심 의친왕을 존경하는 국민들이 모여 설립한 단체로, 의친왕의 행장과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고,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2022년 설립되었다. 의친왕가 종손 이준 황손이 회장으로,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이해경 왕녀가 명예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가 설립한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서 2022년 10월부터 2023년 1월까지 전 세계에 흩어진 의친왕의 유물을 한데 모으고, 의친왕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유물을 함께 전시하는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기록과 기억> 전시를 진행했으며 의친왕 관련 사료와 유물을 수집, 연구하고, 관련 서적을 출판, 간행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매년 양력 8월 15일 의친왕 기신제를 봉행하는 주관단체이다.
전임 황태자 척 |
대한제국의 대리청정 1907년 7월 20일 ~ 1907년 8월 7일 |
후임 순종 친정 (대리청정 폐지) |
제1대 사동궁 종주 1906년 ~ 1930년 |
후임 이건 |
전임 황윤명 |
제2대 성락원 장주[1][2] 1910년 ~ 1945년 |
후임 이건 |
전임 이재각 |
제2대 대한제국 적십자사 총재 1905년 6월 - 1910년 8월 |
후임 이희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