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全琮, 196년 ~ 247년 또는 198년 ~ 249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 시대 오나라의 장군으로 자는 자황(子璜)이며 양주(揚州) 오군 전당현(錢塘縣) 사람이다.
아버지 전유(全柔)의 명령으로 쌀 수천 곡을 배에 싣고 물건과 바꾸러 오군으로 갔는데, 전종은 오군에 쌀을 흩어 뿌려 사람들을 구제하고 빈 손으로 돌아왔다.[1] 전유는 분노했다.[1] 전종은 "바꾸려 한 물건은 긴요한 것이 아니지만, 사대부들이 고난에 닥쳤기에 미처 알리지 못하고 구제했습니다" 라고 답했다. 전유는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1]
주유가 죽었을 때(210년), 방통이 주유의 상여를 운구하여 오에 이르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창문(昌門)에서 육적·고소·전종을 만났다.[2] 방통은 이 세 사람을 평했는데, 전종에게는 가로되,“경은 베푸는 것을 좋아하고 명성을 흠모하니, 여남의 번자소(樊子昭)와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비록 지력은 많지 않으나, 역시 한 시대의 뛰어난 인물입니다.”.[2]
후에 손권이 분위교위로 임명하여 산월을 토벌하도록 했고, 전종은 이를 이용하여 정병 1만 명을 얻었다.[1] 승진하여 편장군이 되었다.[1]
건안 24년(219년), 손권은 여몽과 함께 관우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전종이 상소를 올려 관우를 토벌할 계책을 올렸다.[1] 손권은 비밀이 새어나갈 것을 꺼려 전종의 표를 받고도 대답하지 않았으나, 관우를 체포한 후 손권은 전종을 치하하고 양화정후로 봉했다.[1]
황무 원년(222년), 위나라에서 많은 수군을 동구로 내보냈다.[1] 손권은 여범을 대장으로 삼아 이를 막게 했다.[1] 양군은 서로 지켜보고 있었으며, 적군이 가끔 가벼운 배를 타고 습격해 오면, 전종은 항상 갑옷을 입고 병장기를 쥐고, 적의 동태를 살펴 쉬지 않았다.[1] 이윽고, 적병 수천 명이 강에 나타나자, 전종은 이를 격파하고, 서성과 함께 적장 윤로를 추격하여 효수했다.[1][3] 전종은 전임되어 수남장군이 되었고, 전당후로 승진했다.[1] 동 4년(225년), 부절이 더해졌고, 구강태수를 겸했다.[1]
동 7년(228년), 석정 싸움에 좌독으로 3만 군사를 거느리고 참전해 조휴를 무찔렀다.[1][4] 이때 단양·오·회계의 산월 백성이 도적이 되어, 속현들을 공격해 함몰시켰다.[1] 손권은 3군의 험지를 나누어 동안군을 세우고, 전종으로 태수를 삼았다.[1][3] 전종은 이르러 상벌을 밝히 하고 투항을 권유하여, 수 년 만에 1만여 사람을 얻었다.[1] 손권은 전종을 우저로 귀환시키고, 동안군을 없앴다.[1]
황룡 원년(229년), 손권은 동오를 건국하고 제위에 올랐다(대제). 전종은 위장군·좌호군·서주목으로 승진했고, 공주(손노반)를 아내로 맞이했다.[1]
가화 2년(233년), 대제가 친히 합비신성을 침과 동시에,[3] 전종은 보기 5만을 지휘하여 육안을 쳤으니, 육안의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제장들은 이들을 사로잡고자 하였으나, 전종은 위험하다고 말했다.[1] 대제와 전종 모두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3] 가화 6년(237년) 겨울 10월, 전종은 육안을 쳤으나 이기지 못했다.[3] 이 해, 위나라의 여강군 주부 여습(呂習)이 오나라에 대군을 요청하고 자신은 성을 열어 내응하기로 했으므로, 주환과 함께 이를 맞으러 갔다.[4] 그러나 중도에 일이 발각되었고, 주환의 활약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4]
적오 4년(241년) 여름 4월, 대제의 명령으로 회남을 공략하러 가 작피(芍陂, 회남 지방에 있는 제방의 이름)를 무너뜨리고 안성의 저각을 불태우고 그 곳의 백성들을 거두어들였다.[3] 위의 정동장군 왕릉과 작피 제방을 두고 며칠 간 치열하게 싸웠으나, 마침내 전종이 져 중랑장 진황(秦晃) 등 10여 장수를 잃었다.[3][5]
적오 9년(246년), 전종은 우대사마, 좌군사로 승진했다.[1]
전종은 사람됨이 공손하여, 안색을 보아 의견을 바치는 것을 잘 했고, 언사는 남을 거스르지 않았다.[1] 당초 대제가 주애와 이주를 정벌하려 할 때 전종에게 의견을 물었다. 전종은 반대하였으나, 대제는 듣지 않았고 출병했으며, 1년 후 질병으로 인해 병사 중 8, 9할을 잃었다.[1]
대제가 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의 대우를 동등하게 하여, 태자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신들은 태자 손화를 지지하는 당과 노왕 손패를 지지하는 당으로 나뉘었는데, 전종의 차남 전기(全寄)는 손패의 당이 되었다.[6][7][8][9] 승상 육손은 이 때문에 전종에게 편지를 보내 전기를 비호한 것을 경고했는데, 전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육손과 전종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6] 또, 작피 전투의 논공행상에서 손화파로 전기와 사이가 나쁜 고담의 아우 고승이 장휴와 함께, 전종의 맏아들 전서와 조카 전단보다 높은 지위를 받았으므로, 전종과 전기 부자는 이를 원망하여 고담·고승·장휴를 무고하여 교주로 유배보냈다.[7][10]
전종전에 따르면, 동 12년(249년)[1], 혹은 오주전에 따르면, 동 10년(247년)[3], 전종은 52세의 나이로[11] 숨을 거두었다. 전종의 지위와 전종이 거느리던 병사는 아들 전역이 이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