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메이지 19년)에 교토·니시혼간지의 유지가 모여 「반성회」(反省会)를 설립했는데, 주오고론신샤는 이 해에 창업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 해 1887년 반성회에서는 '반성회 잡지'를 창간했는데 후에 주오고론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도쿄로 이전하였고 1914년에 「주오고론샤」로 개명하였는데 사무소는 초대 사장인 마다 고노스케의 자택 내에 있었다. 1926년에 주식회사가 되었다.
'주오고론'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대표하는 종합잡지로 부수가 증가하였다. 1916년에는 『부인공론』을 창간하였다. 양 잡지 모두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간행을 계속하였다.
1957년, 주오고론샤 편집국 사업부(자비출판부문)가 독립하여, 자회사로서 일본 최초의 주문제작 출판 전문회사인 주식회사 주오고론 사업출판을 창업하였다.[1]
주오고론샤는 1990년대에 경영위기에 빠져서 요미우리 신문사 (현· 요미우리 신문 도쿄 본사)가 구제에 나서, 1999년 요미우리 신문사의 전액 출자에 의해 주오고론신샤가 설립되어 영업을 양도받았다. 동시에 주오고론 출판사도 요미우리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1] 이전의 주오고론샤는 1999년2월 1일자로 주식회사 헤이세이 출판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같은 해 8월 23일에 해산하였다. 같은 해 12월 27일 에는 특별 청산을 개시하여 2001년9월 1일에 청산이 종료되어 완전 소멸했다.
2015년5월 7 일본사 기능이 구중앙공론사 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주오구교바시의 요미우리 중공 빌딩에서 지요다구오테마치의 요미우리 신문 빌딩 19층으로 이전했다. 이전에 따라 명칭도 요미우리 야에스 빌딩으로 변경됐다.
2002년의 요미우리 그룹 재편에 의해 신설된 그룹 지주회사 요미우리 신문 그룹 본사의 자회사가 되었다. 자사 빌딩도 재건축되었다.
요미우리 위클리 등 일부 출판물은 이적하지 않고 계속 요미우리신문사(요미우리신문 도쿄 본사)에서 발행되었다. 「요미우리 위클리」는 2008년12월 1일 발행분을 마지막으로 휴간 되었는데, 일부 서적 및 요미우리 신문 축쇄판 (주로 업무·도서관용)은 현재도 요미우리 신문사에서 출판되고 있다.
1967년 1월에 창간. 소프트 커버. 46판. 부정기 간행. 타사를 포함해 문고 재간된 서목도 많다. 일반용 학술서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점에서는 중공 신서와 컨셉을 공유하고 있지만, 신서보다 비교적 분량이 많은 저작이 중심이며, 신서로서 기획된 것이 페이지수의 증가로 서서에서의 간행으로 변경되거나 신서에서 간행된 서목의 속편이 총서로 간행된 예도 있다.[주 1].
2001년 3월에 창간. 소프트 커버. '라클레'(La Clef)는 프랑스어로 '열쇠'라는 뜻이다. 주고 신서의 약간 가벼운 자매 책으로, 「주고신쇼의 동생인 신서 라벨」이라고 자칭하고 있다.[3] 2011년 11월, 통권 400점 달성을 계기로, 커버·띠가 일신되었다.
1960년대에 간행된 각 분야의 전문가에 의한 본격적인 개설서 시리즈. 당초 창간에는 미야와키 슌조가 관여하고 있었다. 『일본의 역사』는 반세기 이상을 거쳐 문고 신판으로 중쇄하였다. 90년대 중반에, 새로운 세대의 전문가에 의한 「세계의 역사」(전 30권)가 간행. 2008년 1월부터 2010년 6월에 걸쳐 문고 로 재간행되었다.
↑ 이러한 예로 주고총서로 간행된 小川浩之 『英連邦』(2012年)은 당초 신서로 기획된 것이 총서로 간행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같은 책, "후기" pp.261-262. 또, 주고 신서로 간행된 아마노 이쿠오 「대학의 탄생」(상하, 2009년)의 속편인 「고등 교육의 시대」(상하, 2013년)도 분량관계로 신서가 아닌 주고 총서로 간행되었다. 『고등교육의 시대』(하) '후기' p.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