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칭 대공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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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의 일부 | |||||||
충칭을 떠나고 있는 자원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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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플라잉 타이거스 (1941.12-) | 일본 제국 해군 | ||||||
지휘관 | |||||||
클레어 첸노트 | 오니시 다키지로 | ||||||
병력 | |||||||
수백 대의 항공기 | 수백 대의 항공기 | ||||||
피해 규모 | |||||||
시민 10,000명 사망 | 항공기 12대 격추 |
충칭 대공습(한국 한자: 重慶大空襲, 중국어 간체자: 重庆大轰炸, 정체자: 重慶大轟炸, 일본어: 重慶爆撃)은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1938년 2월 18일부터 1943년 8월 23일까지 5년여간 중국 충칭에 실시한 폭격작전이다. 일본군은 충칭을 218차례 공습하였고, 최대 9513대의 비행기가 동원되었으며 21593여발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이 대공습으로 사망한 사람은 11889명이며 1만여 가옥과 시가지 대다수가 파괴되었다.[1]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국민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자 중국 국민정부는 1937년 11월 20일부로 충칭을 전시 수도로 결정하였다.
일본군은 중국 국민정부를 굴복, 항복을 유도하기 위하여[3] 충칭을 공습하였다. 공습 이틀째부터 1939년 5월까지 5천여 명의 중국 민간인들이 사망하였다.[2]
두달 뒤, 일본군이 소이탄을 사용하여 수만명을 죽이자 미국측은 재빨리 비행기 부품에 대한 무역 봉쇄를 선언하였다. 이 일은 미국의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첫 경제 제제였다.[2]
1941년 6월 5일, 일본군은 항공기 24대를 3조로 편성하여 5시간 동안 폭격하였는데, 이때 제18제대터널 안으로 피신하였던 인민들의 수가 많았고,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아 1,200여 명이 질식사하였다. 이 사건은 따로 '6·5 대터널 참변'이라 부른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