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 (조위)

한기(韓曁, 158년 이전[1] ~ 238년)은 중국 삼국 시대 조위의 관료로, 공지(公至)며 남양군 자양현(堵陽縣) 사람이다.[2] 한왕 신의 후손으로, 하동태수 한술(韓術)의 손자이자 남군태수 한순(韓純)의 아들이다.[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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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의 호족 진무(陳茂)가 아버지와 형을 모함하여 사형을 당하게 하자,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않으면서 품팔이로 돈을 벌어 몰래 사람을 구해 원수를 갚았고, 이 일로 유명해졌다.[2] 효렴(孝廉)으로 천거되고 사공에게 벽소되었으나 도리어 성명을 바꾸고 노양의 산 속으로 은거 · 피란했다.[2] 산민들이 무리지어 행인들을 노략하려 하자, 가재를 흩어 우주(牛酒)를 제공하고 우두머리를 설득하여 교화시켰다.[2] 원술(袁術)의 초빙을 피하여 산도(山都)의 산으로 들어갔고, 형주목 유표(劉表)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천릉(孱陵)의 경계로 달아났으나 유표가 깊은 한을 품었으므로 이를 두려워하여 출사해, 의성장(의성현의 현장)이 되었다.[2]

건안 13년(208), 조조(曹操)가 유종(劉琮)을 굴복시켜 형주를 손에 넣고, 한기를 벽소하여 승상사조속으로 삼았고, 나중에는 악릉태수가 되었고, 감야알자로 옮겼다.[2] 이전에는 야금에 말이나 사람을 썼었는데{각각 마배(馬排), 인배(人排)라 한다}, 효율이 좋지 않았다. 한기는 물을 이용하는 수배(水排)를 개발하여 이전에 비해 3배의 이익을 내었고, 임직 7년 만에 물품들이 충실하게 갖춰져 포장을 받았고 사금도위(司金都尉)가 더해져 9경의 반열에 버금가는 지위에 올랐다.[2]

황초 원년(220), 문제(文帝)가 조위를 창건하고서는 의성정후에 봉해졌으며, 황초 7년(226)에는 태상으로 승진하고 남향정후(읍 2백호)로 승급되었다.[2] 당시 아직 제도가 갖춰지지 않아, 조위가 후한의 제후국이던 때의 서울 (鄴)에 종묘가 있었는데, 한기는 주청하여 업의 신주들을 가져다가 낙양(洛陽)에 종묘를 세우고 제사를 드려 법도에 어긋나는 제사를 폐하였다.[2] 태화 3년(229) 11월, 종묘가 완성되자 부절을 받아 고제, 태제, 무제, 문제의 위패를 업에서 모셔오고, 12월 10일에 신주를 낙양의 종묘에 안치했다.[4] 관직에 8년 있다가 질병을 이유로 물러났다.[2] 경초 2년 2월 11일[4]에 사도가 되었고, 4월 9일[4]에 죽었다.[2][4] 시호를 공후(恭侯)라 했다.[2]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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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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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한연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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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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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삼국지》위서 한기전에는 경초(景初) 2년(238년) 봄에 조칙을 내렸을 때, "태중태부(太中大夫) 한기는 몸과 덕을 수양하여 뜻과 절개가 고결하며, 나이는 여든이 넘었는데도 바른 도리를 준수함이 더욱 굳으니 가히 순박하고 독실하며, 나이가 들수록 부지런하고 발분한다고 할 수 있다. 한기를 사도(司徒)로 임명하라." 라고 나와있다. 이로 보아 한기는 158년 이전에 태어난 것이 확실하다.
  2. 진수, 《삼국지》 권24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3. 장방(張方), 《초국선현전》(楚國先賢傳)[진수, 《삼국지》 권24 한최고손왕전 배송지주에 인용]
  4. 진수, 《삼국지》 명제기
전임
진교
조위의 사도
238년 2월 11일 ~ 4월 9일
후임
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