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
도모에 | |
신상정보 | |
시대 | 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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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덴분 2년(1533년) |
사망 | 게이초 2년 6월 12일(1597년 7월 26일) |
별명 | 아명: 도쿠주마루(徳寿丸) 통칭 : 마타시로(又四郎) |
계명 | 黄梅院泰雲紹閑 |
씨족 | 모리씨(毛利氏)→고바야카와씨 |
부모 | 아버지: 모리 모토나리 어머니 : 묘큐(깃카와 구니쓰네의 딸) 양아버지 : 고바야카와 오키카게 |
형제자매 | 모리 다카모토 고류쓰보네(시시도 다카이에 부인)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니노미야 나리토키 호이다 모토키요 모리 모토아키 이즈하 모토토모 아마노 모토마사 스에쓰구 모토야스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
배우자 | 問田の大方(고바야카와 마사히라의 딸) |
자녀 | 양자: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
묘소 | 히로시마현 미하라시의 東盧山 베이산지 절(米山寺) 교토시 기타구의 류호잔 산 다이토쿠지절의 탑두사원인 오바이인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일본어: 小早川隆景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한 센고쿠 무장・다이묘이다. 모리 모토나리의 3남으로 모리 료센(毛利両川)의 한 사람이다. 어릴 때 이름은 도쿠주마루(徳寿丸)이며 통칭은 마타시로(又四郎)다.
덴분 2년(1533년) 모리 모토나리와 묘쿄 부인의 3남으로 태어났다.
덴분 13년(1543년)에 다케하라(竹原) 고바야카와가의 당주 고바야카와 오키카게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양자가 되었다. 모토나리의 조카(모리 오키모토의 딸)가 오키카게의 아내였던 인연도 있어 다카카게가 양자로 들어가는 과정은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다카카게는 다케하라 고바야카와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덴분16년(1547년) 오우치 요시타카가 빈고 간나베성을 공략할 때 종군해 첫 출진[初陣]을 치렀다. 이때 다카카게는 간나베 성의 지성인 류오산 요새를 고바야카와 군 단독으로 떨어뜨리는 공적을 세워 요시타카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고바야카와 씨의 본가 누타(沼田) 고바아캬와가의 당주 고바야카와 시게히라는 어린데다가 병약했기 때문에, 요시타카는 아마고씨의 침공이 시작되면 막을 수 없다며 걱정하고 있었다. 결국 덴분 19년(1550년) 요시타카는 모토나리와 협력해 시게히라를 아마고와 내통한다는 죄를 씌워 구금했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은거・출가하도록 몰아붙이는 한편 다사카 요시아키 등 누타 고바야카와가의 중신들을 정리했다. 그 후 다카카게는 시게히라의 누나를 아내로 맞아 사실상 누타 고바야카와 씨를 지배하에 두고 그 가독을 이었다. 이렇게 해서 다카카게는 누타・다케하라 양쪽 고바야카와 가문을 합체・통일한 모양으로 고바야카와가의 당주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고바야카와가는 모리 문중에 포함되어 모리 직할의 정예 수군으로 활약하게 된다. 모리가 일약 시대의 무대로 뛰어오른 계기가 된 고지 원년(1555년)의 이쓰쿠시마 전투에서도, 다카카게가 이끄는 고바야카와 수군은 스에 하루카타가 이끄는 오우치 수군을 격파하고 해상을 봉쇄해 모리군의 승리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노미 무네카쓰를 통해 무라카미 수군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책략에도 공적을 올렸다고 한다.
고지 3년(1557年) 모토나리가 은거하면서 다카카게는 형 깃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모리 료센”이라 하여 모리 가문의 중추가 된다. 겐키 2년(1571년)에 모토나리가 사망하고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가독을 잇자 모토하루와 함께 데루모토의 보좌역을 맡는다. 다만 모토하루가 군사면을 담당한 반면 다카카게는 수군의 정보수집력을 활용해 주로 정무・외교면을 담당했다고 한다.
덴쇼 3년(1575년)에 들어서자 동쪽의 오다 노부나가 세력이 모리의 영지에 육박한다. 이에 형 모토하루가 산인 지방을 담당하고 다카카게는 산요 지방의 군사를 담당해 오다측과 싸운다. 덴쇼 3년(1575년)에 미무라 모토치카가 오다측과 내통해 배반하자 그 토벌을 맡는다. 더불어 분고의 오토모 소린이 노부나가와 손잡고 침공해 오자 수군을 이끌고 오토모 군과 싸운다.
그러나 오다가의 주고쿠방면군 사령관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휘 아래서 오다 군의 침공은 점점 격렬해졌다. 덴쇼 10年(1582년)에는 시미즈 무네하루가 지키는 빗추 다카마쓰성이 포위당해, 다카카게는 데루모토・모토하루와 함께 모리 가문 주력 3만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미 3만의 오다 군과 병력이 팽팽한 상태였는데, 5월에 다케다가를 멸망시킨 노부나가의 본군이 쥬고쿠 지방을 향해 출병을 준비하는 것을 알게 된다. 다카카게는 모리가 오다에게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안코쿠지 에케이를 통해 하시바 히데요시와의 평화교섭을 비밀리에 진행한다.
그해 6월 혼노지의 변이 발생해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쓰히데 토벌을 위해 기나이에 병사를 돌려야만 했다. 히데요시를 추격해야만 한다는 깃카와 모토하루・모토나가 부자에게 다카카게는 「맹세를 쓴 종이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추격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며, 노부나가의 죽음에 편승하는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고 주장해, 모리 군이 하시바 군을 추격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 외에 히데요시가 기나이에 향할 때 다카마쓰 성을 둘어싸고 있던 제방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양군 사이에 수렁이 생기는 바람에 추격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덴쇼 10년(1582년) 다카카게는 거성을 니타카야마성에서 미하라성으로 옮긴다.
덴쇼11年(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 때는 중립을 지켰으나 이 전투에서 하시바 히데요시가 시바타 가쓰이에를 격파하자 모리씨는 그 때까지의 관망 노선을 버리고 히데요시에게 복속한다. 이때 양자인 모리 모토후사(고바야카와 히데카네)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낸다.
이후에는 히데요시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덴쇼13년(1585년)의 시코쿠 정벌 때는 이요의 고노 미치나오를 격파하는 등 공적을 세워 전후 히데요시에게 이요노쿠니를 영지로 하사받았다. 덴쇼 14년(1586년)부터의 규슈 정벌에도 참가하여 전후 히데요시로부터 지쿠젠・지쿠고・히젠1군 총 37만 1300석을 하사받았다. 하지만 규슈 정벌에서 형 모토하루와 그의 적장자 깃카와 모토나가가 차례로 죽는 바람에 다카카게는 혼자 데루모토를 보좌하게 된다. 덴쇼 16년(1588년)에는 히데요시에게 하시바 성(羽柴姓)을 받는다. 덴쇼 18년(1590년)엔 오다와라 정벌에도 종군한다.
덴쇼 20년(1592년)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분로쿠의 역이 발발하자 다카카게는 노구를 이끌고 2년째에 출진하여 1592년 이치 전투에서 1만여 명의 병력을 가지고도 권율이 이끄는 1천여 명의 조선군에게 패퇴하기도 했으나 분로쿠 2년(1593년)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함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격파하는 공을 세운다.
임진왜란 종료 후에는 귀국하여 히데요시로부터 고다이로의 지위에 임명된다. 분로쿠 4년(1595년)에 양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 칩거하였으며, 게이초 2년(1597년) 6월 12일에 65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전임 고바야카와 시게히라 |
누타 고바야카와 가문 당주 1550년 ~ 1595년 |
후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
전임 고바야카와 오키카게 |
다케하라 고바야카와 가문 당주 1544년 ~ 1595년 |
후임 누타 가문 상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