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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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 | 1909년 3월 30일 대한제국 한성부 |
사망 | 2007년 8월 18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98세)
성별 | 남성 |
국적 | 대한민국 |
장르 | 한국 전통 음악 |
활동 시기 | 1923년 ~ 2007년 |
악기 | 해금, 아쟁, 양금 |
종교 | 개신교 |
김천흥(金千興, 1909년 3월 30일 ~ 2007년 8월 18일[1])은 조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해금, 아쟁, 양금 연주자이자 궁중무용의 명인으로, 조선의 마지막 무동이기도 하다. 호는 심소(心韶)이고, 1923년에 순종황제오순 탄신 경축진연때 무동으로 정재 출연했다. 1930.7.영친왕 내외분의 환국근친환영시 정재 <무고>,<봉래의>등 무동으로 출연했다 .[2]
서울시 남대문 양동 출생이다.[3] 14세 때인 1922년 이왕직 아악부 아악생양성소(李王職雅樂部雅樂生養成所)에서 해금을 전공했으며, 아쟁과 양금도 배웠고, 이듬해인 1923년 제2기생으로 졸업하였다.[4] 같은 해에 순종황제 탄신 오순경축공연에 무동으로 출연했고, 1926년부터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보, 아악수, 아악수장을 지냈다.[5]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해금과 일무(佾舞, 여러 줄로 벌여 서서 추던 춤) 부문과 제39호 처용무의 무용과 가면 제작 부문의 보유자였다.[6]
1951년부터는 국립국악원에서 예술사, 연주원, 자문위원을 거쳐 원로사범을 지냈다.[5]
아악과 궁중무(宮中舞)의 재현·전승·보급에 힘썼고, 탈춤을 체계화시키고 보급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58년부터 ‘김천흥 무용연구소’를 개설, 5회의 발표회를 가졌으며, 1962년에는 〈처용랑(處容郎)〉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64년에 〈종묘제례악〉으로 기능보유자 제1호로 지정되었고,[4] 196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제 제1호 〈종묘제례악〉, 197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5]
국립국악원 이사, 국립국악원 국악사, 문교부 문화보존위원회 위원, 서울시 문화위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경희대·이화여대 강사 등을 역임했다.[4]
2018년 4월 우정사업본부는 국악인 3명의 모습을 담은 ‘한국의 소리’ 기념우표 3종을 발행했는데 이번 기념우표에는 전통무용가이자 해금 연주자인 김천흥씨의 모습이 담겼다. 우표 전지에 있는 QR코드를 휴대전화로 찍으면 연주를 들을 수 있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