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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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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일본 | |||
생년월일 | 1936년 2월 20일 | (88세)|||
출신지 | 지바현 인바군 우스이정(현: 사쿠라시) | |||
신장 | 178 cm | |||
체중 | 76 kg | |||
선수 정보 |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
수비 위치 | 3루수 | |||
프로 입단 연도 | 1958년 | |||
첫 출장 | 1958년 4월 5일 | |||
마지막 경기 | 1974년 10월 14일(은퇴 경기) | |||
경력 | ||||
선수 경력
감독·코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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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구 전당 | ||||
전당 헌액자 | ||||
선출년 | 1988년 | |||
선출방법 | 경기자 헌액 | |||
나가시마 시게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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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식 한자 표기 | 長嶋 茂雄 |
가나 표기 | ながしま しげお |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 | 나가시마 시게오 |
통용식 표기 | 나가시마 시게오 |
로마자 | Shigeo Nagashima |
나가시마 시게오(일본어: 長嶋 茂雄[주 2], 1936년 2월 20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지바현 인바군 우스이정(현: 사쿠라시) 출신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1957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오랫동안 요미우리의 4번 타자로서 맹활약했다. 동 시대에 활약한 오 사다하루와 함께 ‘ON포’라고 불릴 정도로 팀의 중심 타선 역할을 맡았는데 두 사람의 타격은 요미우리의 V9 달성에 큰 기여를 했다. 일본 프로 야구에서 400 홈런과 2,000 안타 동시 달성은 사상 최초의 기록이다. NPB 최다 기록인 최다 안타 10회 획득, 센트럴 리그 최다 기록인 수위 타자를 6차례나 석권했다. 또한 요미우리 자이언츠 4번 타자로서의 출장 경기수에서 가와카미 데쓰하루 다음으로 역대 2위를 기록했다.
은퇴 후에는 1975~1980년, 1993~2001년에 요미우리 감독을 두 차례나 역임하면서 감독 생활 15년 동안 다섯 차례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두 차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끄는 등 현역 시절과 감독 생활을 통틀어 일본 프로 야구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평가받았다. 선수 시절에 착용했던 등번호 3번은 요미우리의 영구 결번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요미우리 자이언츠 종신 명예 감독[2],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고문, 자이언츠 아카데미 명예 교장을 맡고 있다. 2013년에 국민영예상을 수상했고 2021년에 프로 야구계에서는 최초로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3]
‘미스터 프로 야구’(ミスタープロ野球), ‘미스터 자이언츠’(ミスタージャイアンツ), ‘미스터’(ミスター), ‘쵸 상’(チョーさん), ‘불타는 남자’(燃える男) 등 다수의 별명을 가졌다. 혈액형은 B형.[4]
지바현 인바군 우스이정(현: 사쿠라시)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4남매(형 1명, 누나 2명)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생가는 농가였지만[주 3] 토지는 대출하였고 아버지는 동사무소의 회계 담당 책임자나 조역을 하고 있었고[5] 어머니는 의지가 강할 정도의 견실한 사람이었다.[5]
어린 시절 도큐 플라이어스의 오시타 히로시, 한신 타이거스의 소속 선수였던 후지무라 후미오의 활약상을 보면서 야구 선수에 대한 꿈을 가졌다.[6] 후지무라를 동경하여 당시 간토 지방 거주자로는 드물게 어린 시절에는 한신팬이었다.[7]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형의 영향을 받아 야구를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종전 직후라는 점도 있어 장비가 그다지 갖추지 못해서 어머니가 구슬로 이용한 단단한 천으로 공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글러브도 어머니가 손수 만든 것이고,[8] 처음 쥐었던 방망이도 대나무를 깎아 만든 수제 방망이였다.[9] 초등학교 6학년 때 형이 소속됐던 지역 청년 야구단 ‘하야테 클럽’에 입단하여 형밑에서 유격수로서 활약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종전 직후에 야구의 인기가 대단했던 시절에 나가시마도 야구부에 입단했다. 중학교 3년 동안 같은 담임 교사였고 졸업 시에는 옷장을 선물할 만큼 학생들로부터 존경받았는데 한 명의 학생이 선수의 브로마이드를 갖고 온 것이 발단이 되면서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 이전에 학생들에게 앙케이트로 장래 희망을 적게 하면 대부분 ‘프로 야구 선수’라고 적은 걸 보고 너무나 야구에 열중하는 모습에 ‘좀더 장래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해라’라고 하면서 학생 전원을 책상 위에서 정좌시킨 적이 있다. 훗날 그 선생은 “나가시마가 프로 야구의 대스타가 되리라곤 생각치도 못했었다. 아이의 꿈을 무조건에 부정해서는 안 된다”라고 반성했다.[10]
1951년 4월, 고시엔 출장 경험이 있는 지바 현립 지바 고등학교의 입학도 생각했지만 지바현의 명문고로 알려진 지바 현립 사쿠라 제1 고등학교(현: 지바 현립 사쿠라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나가시마는 집에서 학교까지 게이세이 전철[주 4]의 게이세이 본선 게이세이우스이역(당시 자택에서 가장 가까운 역) - 게이세이사쿠라역(고등학고 근처에 위치한 역) 구간을 이용해서 통학했다.[주 5] 2학년 때는 4번 타자를 맡았는데[8] 고교 시절에는 거의 무명이었지만 고교 시절 마지막 대회이자 지구 예선에서 승리하는 등 다음 단계로 넘어갔고 미나미칸토 대회에 지바현 대표 학교로서 출전했다. 1차전 상대인 구마가야 고등학교와의 경기(1953년 8월 1일, 오미야 구장)에서 당시 유격수였던 나가시마는 경기 전에 부상을 당했던 3루수 스즈키 히데미를 대신해서 3루수를 맡았다.[11] 유격수로서 거듭된 실책을 범했다는 이유로 수비 위치가 변환됐지만 이후에는 3루수로서 정착했다. 이 경기에서는 패했지만 6회초에 상대 투수 후쿠시마 이쿠오로부터 나가시마 본인으로서는 고교 대회에 있어서 유일한 홈런을 때려냈다.[12] 이 날카로운 라이너성 타구의 홈런을[12] 당시 언론들은 비거리를 350 ft(약 107m)라고 추정했다.
이 초대형 홈런에 의해 나가시마는 야구 관계자들의 주목을 끌었는데 당시 나가시마의 홈런 때린 모습을 지켜본 아사히 신문의 기자 구보타 다카유키가 있었고 구보타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호치 신문 기자 다나카 시게미쓰가, 내야수의 스카우트를 담당하고 있던 후지 제철 무로란 야구부 매니저인 오노 히데오에게 이야기를 했다.[13] 오노는 나가시마에게 후지 제철 무로란에 입사를 권했지만 나가시마의 아버지는 대학 진학을 희망했고 더욱이 상부로부터 홋카이도에서의 신인이 발탁됐다는 연락을 받고 이를 포기했다.[14] 오노는 그 대신에 자신이 다녔던 미토 상업학교(현: 이바라키 현립 미토 상업고등학교)의 선배에 해당하는 스나오시 구니노부가 감독으로 있던 릿쿄 대학의 진학을 권했다.[14] 스나오시의 교육 방침에 감명을 받은 나가시마의 아버지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입단 제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가시마에게 알리지 않는 상태에서 대학 진학을 이유로 거절했는데 프로 입단을 희망하고 있던 나가시마는 화를 냈다고 한다.
같은 해 11월 하순, 시즈오카현 이토 스타디움에서 열린 릿쿄 대학 야구부의 선발 시험에서는 펜스를 직격한 것을 포함한 3개의 안타를 때려내(스기우라 다다시에게서도 안타) 참가자 80명 중 20명이 ‘고시엔 출장조’라고 불리는 가운데 추천 순위 2위로 합격하여(1위는 모토야시키 긴고, 3위는 스기우라)[15] 이를 지켜본 스나오시 감독으로부터 인정받았다.
1954년, 릿쿄 대학 경제학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집안의 가장을 잃은 충격으로 인해 궁핍한 생활이 계속됐지만[주 6] 당시 인바 지구에서는 인바 지구 내외곽에서 지바·도쿄 방면에 채소를 파는 행상의 수가 늘어난 것도 있어서 어머니가 게이세이 본선과 게이세이 지바선을 이용해 지바와 도쿄로 가서 채소 행상을 하는 등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대학을 중퇴해서 프로에 입단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머니가 반대하여 결국 포기했다. 야구부에서는 스나오시 감독의 총애를 받아 조 디마지오와 요기 베라 등의 플레이를 참고로 한 메이저류의 연습과 스나오시의 자택에 불러가며 연습을 하는 등 ‘특별 대우의 맹훈련’을 거듭한 끝에 주전 3루수가 됐다.[17] 이듬해에는 대학 선배 오사와 마사요시(오사와 게이지) 등이 ‘스나오시 배척 운동’을 일으켰다.[주 7]
이러한 야구부 환경[주 8]에 싫증이 나서 1955년(당시 대학 2학년) 무렵에는 동기인 스기우라 다다시(난카이 호크스)와 함께[주 9] 야구부 합숙소를 빠져나와 스기우라의 고향이자 아이치현에 연고지를 둔 주니치 드래건스[주 10] 구단 사무소를 방문했다.[19][22][21] 이 자리에서 나가시마는 “군대 같은 분위기의 릿쿄 야구부가 싫어졌기 때문에 대학을 중퇴하고 주니치에서 야구를 해서 돈을 벌고 싶다. 계약금은 필요 없다”라고 입장을 밝혔지만 응대한 주니치 구단 대표[주 11]로부터 제의를 거절당했다.[주 12][19][23][21]
스나오시가 물러난 이후 쓰지 다케시의 지휘 하에서 입단 동기 스기우라 투수, 주장을 맡은 모토야시키 긴고 내야수(한큐 브레이브스, 한신 타이거스)와 함께 ‘릿쿄 3인방’이라고 불리었다.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1956년 춘계 리그전과 1957년 추계 리그전에서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고 1955년 추계 대회부터 1957년 추계 대회까지 5시즌 연속으로 리그 베스트 나인(3루수 부문)에 선정됐다. 1957년에는 도쿄 6대학 리그의 통산 신기록이 되는 8호 홈런을 때려냈다.[주 13] 1955년에는 제2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도쿄 6대학 야구 리그 선발 팀)로 발탁됐다. 도쿄 6대학 리그전 통산 96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할 8푼 6리(304타수 87안타), 8홈런, 39타점, 22도루[26]를 기록했다.
타격에 더해 수비나 빠른 발도 야구 관계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이시이 렌조는 대학 시절의 나가시마의 수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와세다도 분발해서 3루수와 유격수 사이에 안타성 타구를 때렸지만 거의 나가시마에게 걸려들었어요. 그의 수비 범위는 보통 사람의 두배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수비 자세가 거칠어지지 않았습니다.
— 이시이 렌조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프로 입단이 확실시돼 있어 여러 구단에서 나가시마와의 접촉을 꾀하고 있었지만[주 14][주 15][주 16] 난카이 호크스로 가는 것이 거의 정해져 있었다. 그 때를 전후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나가시마의 가족과 접촉하는 등 설득하는 작전으로 나갔고[29] 어머니로부터 ‘최소한 수도권에 있는 구단으로’라고 간청한 것으로 마음을 결정하게 되어[주 17] 나가시마는 태도를 바꿔 요미우리에 입단하기로 결정, 11월 20일에 계약을 맺었다. 등번호는 치바 시게루(작년도에 은퇴)가 착용했던 ‘3’번으로 결정했다. 당초엔 가와카미 데쓰하루로부터 ‘15’번을 권유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가와카미는 ‘15’로 권유한 이유에 대해 ‘14’는 사와무라 에이지, ‘16’은 가와카미였기 때문에 나가시마가 ‘15’번을 붙이면 ‘14’, ‘15’, ‘16’과 3개 연속 영구 결번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주 18] 나가시마가 고사한 이유는 ‘송구하다’면서도 ‘한 자릿수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입단이 결정된 직후에 가와카미의 자택 근처에서 하숙했다고 하며, 가와카미의 장남이 말하기를 실제로 가와카미와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30]
계약금은 당시 최고 액수인 1,800만 엔(당시 난카이는 나가시마가 난카이에 입단할 경우 2,000만 엔을 제시하고 있었다)과 연봉은 200만 엔이었다.
후에 오사와가 말한 바에 의하면 먼저 난카이에 입단해 있던 대학 선배이기도 한 오사와랑 두 사람이서 이야기를 하면서 “아무래도 요미우리로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등 오사와에게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오사와는 “그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가시마 시게오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건도 있어서 그 후에도 오사와에게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나가시마의 획득에 진력하고 있던 당시 난카이 감독이었던 쓰루오카 가즈토에겐 시범 경기 때 직접 찾아가 난카이 입단을 거절한 것에 대해 사과했고 거기에 대해 쓰루오카는 “간토 지방 사람은 간토 지방의 연고지가 있는 팀에 들어가는 것이 제일 좋다”라고 웃으며 대답했다고 한다.
도쿄 6대학 리그에서의 맹활약했던 것을 발판 삼아 입단 당시부터 골든 보이(ゴールデンボーイ), 또는 허리케인(ハリケーン)이라는 별명이 붙여지는 등 입단 당시부터의 활약이 크게 기대되고 있었다.[주 19] 1958년 4월 5일, 개막전인 고쿠테쓰 스왈로스전에서 3번 타자로 선발 출전해 개막전 데뷔를 이뤘지만 고쿠테쓰의 에이스인 가네다 마사이치로부터 4타석 연속 삼진을 당했는데 이 모든 게 혼신의 풀스윙 삼진이었다고 전해졌다. 또 다음날의 경기에서도 구원 등판한 가네다에게 삼진을 당했다. 오픈전 중에 어느 해설자가 나가시마를 칭찬해 ‘가네다를 쓰러뜨리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던 것을 우연히 들은 가네다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이 날의 등판을 위해서 특별 훈련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후 나가시마도 가네타를 상대로 안타를 때려냈고 이듬해 개막전에서는 홈런을 때렸다. 나가시마는 가네다와 여러 차례 상대하면서 통산 전적은 타율 3할 1푼 3리, 18홈런을 기록했다.
데뷔 이틀 후인 4월 7일 고쿠테쓰전에서 미쓰바야시 세이지를 상대해 첫 안타를 때려내는 것을 시작으로 4월 10일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곤도 마사토시로부터 첫 홈런을 기록하여 본래의 힘을 발휘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전부터는 요미우리의 중심 타자였던 가와카미 데쓰하루를 대신하는 4번 타자가 되면서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같은 해 9월 19일 히로시마전에서는 우가리 미치오로부터 신인으로서의 신기록(당시)이 되는 28호 홈런을 때렸지만 1루 베이스를 실수로 밟지 않은 바람에 결국 홈런이 취소되는 상황이 벌어졌다[31](당시 기록은 투수 땅볼이었다[주 20]). 만약 1루 베이스를 밟았을 경우에는 신인으로서 또는 요미우리 선수로서도 유일한 ‘트리플 쓰리’(타율 3할, 홈런 30개, 30도루) 기록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31] 나가시마는 다음날 9월 20일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 28호 홈런을 기록하여 신인 신기록을 달성했지만 이듬해 구와타 다케시가 31홈런을 기록하면서 나가시마의 기록을 경신했다.
최종 타격 성적은 홈런 29개, 92타점을 기록해 홈런왕과 타점왕 등 연달아 석권했고 타율에서는 오사카 타이거스 소속이던 다미야 겐지로와의 수위 타자 타이틀을 놓고 경쟁을 펼쳤지만 다미야가 시즌 종반에 결장한 이후 전 경기 출전을 계속하고 있던 나가시마는 타율이 떨어지면서 최종적으로는 타격 2위인 3할 5리에 끝났다. 그러나 시즌 최다 안타인 153개를 기록하였고 도루 부문에서도 리그 2위인 37개를 기록하는 등 센트럴 리그 신인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또한 2루타(34)도 리그 최다였지만 3루타는 다미야에게 1개 미치지 못하고 8개에 그쳤고 ‘2루타, 3루타, 홈런 모두 리그 최다’라는 대기록을 놓쳤다(그 후에도 달성자는 없음).
신인 기록에서는 1956년 사사키 신야(다카하시 유니온스)에 뒤를 이은 역대 두 번째이자 센트럴 리그에서는 처음이다. 신인 선수로서의 전 이닝 출전 기록은 그 후 1961년에 도쿠타케 사다유키(고쿠테쓰 스왈로스), 2017년에 겐다 소스케(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가 기록했다. 또 신인으로서의 89득점은 도쿠라 가쓰키의 90득점에 뒤를 이은 역대 2위이며 신인으로서의 센트럴 리그 기록이다. 그 외에 신인 선수로서 34개의 2루타는 역대 1위, 290루타는 역대 1위, 153안타는 센트럴 리그 기록(2019년에 한신 타이거스의 지카모토 고지에 의해서 기록이 깨질 때까지), 92 타점은 센트럴 리그 기록이며, 타율·홈런·도루도 각각 신인으로서는 역대 5위 이내에 들어가 있다. 시즌 맹타상 14회도 신인 기록이다.[33]
1959년 6월 25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주 21]전에서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천황 참관 경기(천황이 관전한 경기이며 당시는 쇼와 천황)로 치러졌다. 이 경기에서는 한신이 먼저 1점을 얻었지만, 5회에 나가시마와 5번 타자인 사카자키 가즈히코가 연속으로 홈런을 때려내며 요미우리가 역전했다. 6회에는 한신이 3점 홈런을 기록하면서 승부를 뒤집었지만 7회에 6번 타자 오 사다하루가 2점 홈런을 때려내면서 동점을 만들었다. 9회말, 타석에 들어선 선두타자 나가시마는 볼카운트 2-2로부터 두 번째 투수 무라야마 미노루가 던진 5구째에 몸쪽을 노려 공을 때려냈는데 타구는 좌측 관중석을 향해 극적인 끝내기 홈런이 되면서 경기는 요미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이 경기는 대학 야구 시절부터 슈퍼스타였던 나가시마가 때려낸 끝내기 홈런이었던 점도 있고 그 드라마성도 더해져서 크게 보도돼 나가시마의 강한 승부 감각이 일본 내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주 22] 그 때까지는 대학 야구가 가장 인기여서 돈으로 야구를 하는 프로 야구는 경멸하는 면이 있었는데 이후에는 일본 국내에서 프로 야구의 인기가 높아져 갔다. “이 경기에서 프로 야구의 융성은 시작됐다”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34]
당시 나가시마의 끝내기 홈런은 좌측 폴대 상단에 꽂힌 것이어서 무라야마는 1998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그 홈런은 원래 파울볼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참고로 이 경기에서는 당시 신인이었던 오 사다하루도 홈런을 기록했다. 이것은 ‘ON 동반 홈런’ 제1호이다.
2년째가 된 1959년 시즌에는 시즌 도중까지 퍼시픽 리그의 가쓰라기 다카오와 함께 3관왕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막판에 홈런과 타점은 늘어나지 않았다. 2위 이이다 도쿠지(2할 9푼 6리)와의 격차가 크게 벌어진 타율 3할 3푼 4리를 기록해 본인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홈런은 리그 3위인 27홈런, 타점은 리그 4위인 82타점을 기록했다. 이듬해 1960년에도 은퇴한 1974년을 제외하면 개인 최저 기록인 16홈런, 64타점이면서도 타율 3할 3푼 4리를 기록하여 2년 연속 수위 타자를 차지했고 4번 타자이면서도 리그 2위인 31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1961년에는 타율 3할 5푼 3리로 2위 곤도 가즈히코(3할 1푼 6리)와의 큰 격차를 내면서 3년 연속이 되는 수위 타자를 석권했고 생애 첫 센트럴 리그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시즌 28홈런을 기록하면서 홈런왕까지 차지했지만 타점은 리그 2위에 해당되는 86타점을 기록하여 그 해에 타점왕을 차지한 구와타 다케시와는 8개 차이를 나타냈다. 같은 해 35개의 고의 사구는 당시의 일본 기록이었다.[주 23]
1962년에는 타율 2할 8푼 8리를 남겨 리그 5위(수위 타자는 모리나가 가쓰하루의 3할 7리)로 끝났지만 홈런과 타점 부문은 각각 리그 2위, 도루는 리그 3위를 기록했다. 그 해 팀내 절친한 사이이자 동고동락을 하며 지내온 사다하루가 홈런왕과 타점왕 등 연거푸 타이틀을 차지하여 사다하루와 함께 팀 타선의 주축이 된 일명 ON포(사다하루와 나가시마의 영문 이니셜)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것은 메이저 리그인 뉴욕 양키스의 미키 맨틀과 로저 메리스를 MM포에 비유했다. 나가시마는 이 애칭의 표현대로 요미우리의 간판 4번 타자로 맹활약을 했는데 타순은 통상적으로 3번 사다하루·4번 나가시마였지만 두 선수의 컨디션에 따라 나가시마는 3번, 사다하루는 4번으로 자주 바뀌기도 했다. 요미우리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일본 시리즈를 9연패를 달성하여(V9) 이들 두 사람은 당시의 팀을 대표하는 선수였다.
1963년은 타율 3할 4푼 1리, 37홈런, 112타점으로 수위 타자와 타점왕을 동시에 석권했고 홈런은 사다하루의 40홈런에 뒤를 이은 리그 2위를 차지하면서 사다하루의 타점도 나가시마에 뒤를 잇는 리그 2위였다. 2년 만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막대한 공헌을 하는 등 통산 2번째의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했다. 이듬해 1964년에는 리그 3위가 되는 31개의 홈런을 기록해 타율과 타점은 모두 리그 4위를 기록했다. 1965년에는 사다하루의 104타점에 뒤를 잇는 80타점(리그 2위)을 남기는 등의 맹활약을 했다.
1966년 나가시마의 시즌 타율은 3할 4푼 4리를 남겨 통산 5번째의 수위 타자를 획득했고 26홈런과 105타점은 각각 사다하루에 뒤를 이은 리그 2위였다. 그리고 통산 3번째인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했다. 가을에는 미일 야구 대회 참석차 일본을 방문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회장이 ‘나가시마가 우리 팀에 들어오면 좋겠다. 양보해달라’라고 쇼리키 마쓰타로 구단주에게 타진했지만 ‘나가시마가 없어지면 일본 야구는 10년 늦는다’라고 거절했기 때문에 메이저 리그 이적은 이뤄지지 못했다.[35] 그러나 이듬해 1967년에는 입단 이후 처음으로 타율이 10위권에서 벗어나는 등 부진을 겪었다. 특히 그해 5월 27일 주니치전에서는 9회에 요미우리가 3점을 따라붙는 상황에서 가와카미 감독으로부터 대타를 투입하겠다는 통보받고 교체되는 등의 불운도 있었다.[36]
1968년 9월 18일 한신과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는 요미우리가 초반부터 주도권을 잡았고 5대 0이 된 4회초에 3번 타자였던 사다하루를 한신 투수인 진 바크가 2구 연속으로 위협구 수준의 공을 던졌다. 사다하루는 마운드로 몇 걸음 다가가 항의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바크의 손가락 미끄러짐 등의 몸짓을 이해하며 타석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리고 바크도 마운드에 돌아와 몸을 굽히는 순간 3루 코치 박스에 있던 아라카와 히로시가 등 뒤에서 바크에게 기습적으로 달려들어 동시에 난입하던 요미우리 선수들이 바크에게 덤벼들었다. 뒤늦게 한신 벤치에서도 선수와 코칭 스태프들도 뛰쳐나와 양 팀의 난투극으로 번졌다. 이 난투극으로 바크와 요미우리의 아라카와 타격 코치는 퇴장당했다. 또한 분명히 의도를 가지고 바크에게 맨 몸으로 덮친 아라카와는 훗날 상해죄로 기소되는 등 사법처리를 받았다. 바크는 이 난투극으로 인해 오른쪽 손가락이 골절돼 그 해의 시즌을 제대로 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현역 은퇴에 내몰렸다. 그리고 바크를 대신해 곤도 마사토시가 등판했지만 사다하루의 머리 뒷부분을 직격하는 사구를 던졌다. 구종은 커브이며 머리 뒷부분을 향한 사구였지만 그 충격으로 인해 사다하루가 들것에 옮겨졌다(이상 현장에서의 목격담). 이 사건은 요미우리가 다루기 곤란한 바크(노히트 노런을 노리고 있었음)를 배제하기 위해서 짠 잔꾀라고도 말해졌다. 경기는 20분 동안 중단됐다. 난투극에 가담하지 않았던 나가시마(V9이 결정된 고시엔 구장 난입 사건에서도 가장 먼저 그라운드를 탈출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다하루는 한신팬에게서 나막신으로 얻어맞는 봉변을 당했다)는 그 직후, 다음 타석의 나가시마는 곤도가 던진 커브를 노려 3점 홈런(시즌 35호)을 때려냈을 뿐만 아니라 8회에도 2점 홈런을 때려내는 등 혼자서 팀 승리에 기여하는 역할을 했다.
1968년 시즌에는 사다하루와 치열한 타격 경쟁을 벌였던 나가시마였지만 결과적으로 사다하루에 이은 타율 3할 1푼 8리(리그 2위), 사다하루와 데이브 로버츠에 이어 39개의 홈런(리그 3위)과 리그 최다인 125타점을 기록해 타점왕을 석권했다. 39홈런은 2019년에 사카모토 하야토에게 추월당하기 전까지 요미우리의 토박이 일본인 우타자로선 한 시즌 최다 기록이었다.[주 24] 또한 통산 4번째인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했다.
1969년에는 사다하루와 로버츠에 이은 타율 3할 1푼 1리(리그 3위)와 32홈런(리그 4위), 그리고 시즌 최다인 115타점을 기록하면서 타점왕을 차지했다. 그 해에는 야구계 최고 연봉에 해당되는 4,560만 엔으로 서명했다.[37]
1970년에는 타율이 리그 10위에 머물면서 침체됐지만 한편으론 리그 5위의 타이 기록인 22홈런과 리그 최다인 105타점을 기록해 3년 연속 타점왕을 차지했다. 1971년 1월 20일에는 요미우리 13대 주장으로 발탁됐고 같은 해 5월 25일 야쿠르트전에서는 상대 투수 아사노 게이시로부터 역대 5번째가 되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1708경기에서의 2000안타 달성은 가와카미 데쓰하루에 이어 가장 빠른 기록(역대 2위)이며 우타자로서는 역대 최고 속도 기록이다. 또한 대졸자로서 프로에 들어간 프로 야구 선수로서는 첫 달성자가 됐다. 1971년 시즌에는 2위 기누가사 사치오와의(2할 8푼 5리) 격차가 크게 벌어진 3할 2푼의 타율을 남기는 등 통산 6번째의 수위 타자가 됐다.[주 25] 35세 나이에 수위 타자 획득은 당시 가와카미 데쓰하루와 함께 일본 프로 야구 최고령 기록이었다(생일인 관계로 엄밀하게는 나가시마쪽이 웃돈다. 1979년에 다이요 소속이던 펠릭스 미얀이 경신). 34홈런과 86타점은 각각 사다하루에 뒤를 이은 리그 2위였다. 시즌 종료 후인 12월 27일에는 다음 시즌부터 코치를 겸임하는 것으로 공식 발표했고 통산 5번째인 센트럴 리그 MVP에 선정됐다.
플레잉 코치로서 맞이한 1972년 시즌에는 92타점(리그 3위)과 27홈런(리그 4위)을 기록한 반면 타율은 10위권에서 벗어났다.
이듬해 1973년에도 타율 0.269, 20홈런, 76타점을 남기면서 성적이 점점 떨어졌다. 힘이 쇠약해진 나가시마는 이미 4번 타자의 자리를 사다하루에게 내줬지만 9월에 있은 야쿠르트전에서 결정적인 수모를 당했다. 야쿠르트는 4번 타자인 사다하루를 5연타석 고의 사구로 내보냈고 모든 타석에서 5번 타자였던 나가시마와 승부를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1안타에 그쳤지만 득점 기회가 있던 타석에서 모두 범퇴로 물러났다.[38][39] 적장의 지휘에 어쩔 수 없는 스스로를 알게 됨으로써 야구계의 중심이 나가시마에서 사다하루로 바뀐 것을 알게 됐다.[40] 10월 11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전에서 3루 수비 도중 고토 가즈아키의 타구에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맞아 골절상을 입어 남은 경기에 결장을 피할 수 없게 됐다.[41] 난카이 호크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1루 코치로서 출전했다.
나가시마는 한신과의 직접 대결을 하루 앞둔 그해 10월 9일, 가와카미 감독과 히라카와초의 음식점에서 회식 자리를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가와카미로부터 올해 말까지 현역에서 은퇴하고 감독직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받았다.[42] 하지만 나가시마는 다음 시즌에도 현역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가와카미도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듬해인 1974년에도 가와카미가 감독을 맡게 되면서 나가시마는 현역 생활을 계속 이어가게 됐다.[43]
1974년 10월 12일, 주니치의 리그 우승이 확정되면서 요미우리의 리그 10연패 달성이 무산된 날에 나가시마는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주 26] 다음날 주요 스포츠 신문들은 나가시마의 현역 은퇴 관련 기사를 1면 머릿기사로 실을 정도로 도배된 반면 주니치의 우승은 묻혀 버렸다.[45] 은퇴 기자회견에서 나가시마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주니치와의 나머지 2경기에 출전하겠다고 말했다.
“ |
나는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야구를)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마지막까지 경기에 나가겠습니다. |
” |
또한 다른 인터뷰에서는 “‘내일은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 날 최선을 다해도 잘 안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믿고 그저 열심히 방망이를 휘둘러 왔다. 후회는 없다”라고 말하는 등 자신의 현역시절에 대해 되돌아 보기도 했다.[9]
은퇴 기자회견 다음날인 10월 13일에는 주니치와의 더블헤더가 나가시마의 은퇴 경기로 치를 예정이었지만 우천으로 인한 14일에 순차 연기됐다. 그 날은 주니치의 리그 우승 기념 퍼레이드와 같은 날이었으며 주니치측은 요나미네 가나메 감독을 포함한 호시노 센이치, 다카기 모리미치 등의 주력 선수들은 퍼레이드에 참가할 것을 우선했기 때문에 힘이 쇠약해진 선수나 1군에 절반이나 머물렀던 선수들이 출전하게 됐다. 요나미네 감독, 호시노, 다카기 등은 나가시마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들의 무례함에 대해 사과했지만 나가시마는 이에 대해 “(주니치에 있어서는 1954년 이후)20년 만의 리그 우승을 마음껏 축하해 달라”라고 대답했다.[45]
은퇴 경기를 앞둔 미팅에서 나가시마는 팀 동료들에게 “미련은 없다. 모두들 언젠가는 은퇴하는 날이 오겠지만 그것까지 최선을 다해 후회가 없는 플레이를 해주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그 후, 이 해에 사상 최초의 2년 연속 3관왕을 달성했던 사다하루에게 슬그머니 “미안하다, 오늘은 들러리가 돼 달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사다하루는 웃으면서 “오늘은 기분좋게 동반 홈런 타자로서 가보자”라고 대답했다.[45]
은퇴 경기에서의 1차전에서 3번·3루수로 선발 출전했고 두 번째 타석에서는 무라카미 요시노리로부터 홈런을 때려냈는데 이 홈런이 현역 생활에 있어서는 마지막 홈런(통산 444호)이었다. 이 경기에서는 사다하루도 홈런을 때려냈다. 사다하루의 말대로 마지막(106개째)의 ‘ON 동반 홈런’을 기록했다. 1차전 종료 직후 나가시마는 외야 펜스를 따라 눈물 흘리면서 팬들에게 인사를 했고 애초에는 2차전 종료 후 장내를 일주할 예정이었는데 예상 외의 행동을 한 것이다. 나가시마는 이 때의 행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오늘만큼 관중석에서 흘러나온 박수가 가슴에 와닿은 적은 없었다. 1차전이 끝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외야에 발길이 향하고 있었다.[45] |
” |
계속되는 더블헤더 2차전에서는 4번·3루수로 출전했다. ‘4번·3루수 나가시마’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고라쿠엔 구장은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가와카미 감독은 이 경기에서 포수 모리 마사히코, 유격수 구로에 유키노부를 기용했다. 나가시마는 5회말 두 번째 타석에서 중견수 앞에 안타를 때려냈는데 이것은 현역 생활에 있어서의 마지막 안타이자 통산 2471번째의 안타였다. 8회말 1사의 주자 1, 3루 상황에서의 마지막 타석에서는 사토 마사오와 상대하였지만 유격수 앞에 병살타를 때려냈고(나가시마의 257개 병살타는 기누가사 사치오가 경신할 때까지의 센트럴 리그 기록이었다) 경기는 10 대 0으로 요미우리가 승리했다. 2차전 종료 후 나가시마는 이별이 정말 아쉬웠던지 선수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나눴고 마지막에는 사다하루와 함께 허리에다가 손을 서로 맞대면서 벤치에 돌아왔다.
경기 종료 후 은퇴식이 거행됐는데 나가시마는 고별 인사에서 “우리 교진군은 영구히 불멸입니다!”(我が巨人軍は永久に不滅です!)[주 27]라는 말을 남겼는다.[47] 경기 후 고라쿠엔 구장 내에 있는 ‘살롱 골든글러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현역 은퇴한 경위에 대해 묻자, 타구가 야수의 정면을 찌르는 듯한 힘에 쇠약해짐을 느꼈고, 지난해 오프 때 은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48]
나가시마의 은퇴는 요미우리 신문이 선정한 1974년 10대 뉴스에 4위로 선정되는 등 스포츠에 머무르지 않는 사회적인 사건이었다. 같은 해 11월 21일에는 선수 시절에 착용했던 등번호 3번은 영구 결번으로 제정됐다.[주 28] 같은 해 12월 21일, 나가시마의 은퇴를 기념한 도큐멘트 LP(2장) 《미스터 G: 영광의 등번호 3 나가시마 시게오·그 업적》이 워너 파이오니어로부터 발매돼 오리콘 LP차트에서 최고 16위[49]를 기록했다.[주 29]
훗날 나가시마는 이 은퇴에 대해 당시 시점에서는 ‘아직 2 ~ 3년은 선수로서 뛸 수 있다’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성적 저하와 팀의 연패가 끊긴 것, ‘돈도 명예도 필요없으니 선수로 뛰게 해달라’는 이유로 거절하고 있었던 요미우리 감독의 오퍼를 거절할 수 없게 된 이유 등을 들었다.[51]
1974년 11월 20일, 미일 야구 대회의 모든 일정이 종료된 후 가와카미는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튿날 11월 21일, 요미우리는 고라쿠엔 구장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가와카미의 후임으로 나가시마가 차기 감독으로 부임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나가시마는 ‘클린 베이스볼’(クリーン・ベースボール)을 표방했다. 전임 감독이던 가와카미가 구축한 확률 야구(스스로의 실책을 줄이면서 상대방의 실책을 권한 뒤 거기를 이용해서 승리하는 스타일)를 버리고 투타의 역량 차이가 그대로 승패로 연결된다는 신념 하에서 팀을 재편했다. 실수를 한 선수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감점주의를 폐지하고 좋은 플레이를 연봉에 반영하는 가점주의로 전환했다.[52] 그 때문인지 수석 코치로 세키네 준조, 투수 코치에는 미야타 유키노리, 수비·주루 코치 보좌에는 구로에 유키노부, 배터리 코치에 오고 히로시 등을 각각 초빙했고(구로에, 오고는 현역 은퇴 후부터 잔류) 가와카미는 작전 코치 마키노 시게루, 투수 코치 후지타 모토시를 팀에 남아달라고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53] 모리 마사히코를 코치로 남고, 호리우치 쓰네오를 트레이드로 내보내라고 조언했지만[54] 나가시마는 가와카미 감독 시절의 코치진을 거의 일소시켰다. 나가시마와 모리는 견원지간이었다.[55] 구로에의 말에 의하면 나가시마는 ‘가와카미 같은 무더운 야구는 하고 싶지 않다’[56]라고 말했다고 한다. 새로운 등번호를 ‘90’번으로 정했는데 이 ‘90’번은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들 가즈시게의 아이디어라고 알려져 있는데 “현역으로 있을 때 3이라는 숫자가 세 개가 있었다는(타순은 3번, 등번호는 3번, 수비 포지션은 3루수) 것으로부터 3을 3개 더하면 9. 이것을 0을 붙여서 90번으로 하면?”이라는 가즈시게의 발언이 계기가 됐다(당시 등번호 9번은 요시다 다카시가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주 30]
나가시마는 현역 마지막 연도인 1974년 시점에서는 은퇴하자마자 바로 감독 취임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현역 생활을 2, 3년은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발놀림이 예전같지 않은 것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현역에서 뛸 수 있다고 생각한다)이 있었다. 또한 은퇴 후 2, 3년은 백네트뒤에서 야구를 연구하거나 코치를 경험하고 나서 감독 취임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팀내 사정을 고려해서 은퇴하자마자 감독 취임을 곧바로하는 단계로 이어졌다.[57]
구단으로서는 전후 최초로 비일본계의 외국인 선수인[주 31] 내야수 데이비 존슨을 영입해 나가시마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3루수에 기용했다. 참고로 존슨은 메이저 리그 관련 정보를 나가시마에게 전달한 적도 있어 종종 나가시마 가족들에게 메이저 리그 경기를 녹화한 것을 추려서 나가시마 가족들과 함께 감상하고 있었다. 당시 현장에 같이 있었던 가즈시게는 메이저 리그를 동경해 야구(리틀 리그)나 독학으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그러나 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1975년)에 주력 선수들의 성적 부진과 신통치 않은 팀 성적으로 악재가 겹치면서 결국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최하위(6위, 47승 7무 76패)로 추락하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당시 요미우리 선수였던 시바타 이사오는 “나가시마가 은퇴하고서는 모리 마사히코, 구로에 유키노부도 줄줄이 은퇴하면서 팀 전력에 차질이 빚어진 것도 있었지만 코치진을 완전히 갈아엎기도 하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야구를 하고 싶다는 건지 모르겠다”[58], “코치진과 잘 해나갈 수 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59]라고 말했다. 이때 나가시마는 자신의 야구 인생을 ‘파란만장’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57]
그 때문에 1975년 시즌 종료 후 ‘그린 베이스볼’(グリーン・ベースボール), ‘챌린지 베이스볼’(チャレンジ・ベースボール)을 표방하여 이기는 야구에의 변화를 도모했다. 닛폰햄 파이터스로부터 투수 다카하시 가즈미와 내야수 도미타 마사루와의 맞트레이드로 일명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이 알려질 정도로 닛폰햄의 간판 타자였던 하리모토 이사오를 영입했고, 더 나아가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로부터 선발도 마무리도 모두 할 수 있는 가토 하지메도 영입했다(이때 히가시오 오사무도 트레이드 후보였다). 팀내에서는 외야수 다카다 시게루를 3루수로 변환됐는데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변환하면서 존슨을 본래의 2루로 이동하는 등 팀 전력 강화에 착수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한신의 에나쓰 유타카는 물밑에서 이적을 타진시켜 요미우리 관계자와 협의했지만 신문사에 의해서 폭로돼 결국은 파담이 됐다.[60] 코치진도 작년부터 1군 코치로 유임한 것은 구로에뿐이었고 타격 코치에는 2군 감독이었던 구니마쓰 아키라가 발탁됐고 투수 코치로 부임한 스기시타 시게루는 스즈키 류지 센트럴 리그 회장으로부터의 요청으로 취임했다.[61] 프런트는 한층 더 극비로 진행하여 수석 코치로 나가시마와는 동년배이자 난카이의 선수 겸임 감독이던 노무라 가쓰야를 극비 접촉했다. 요미우리의 구단 상무와 홍보 담당이 연쇄적으로 협상을 벌였고 ‘선수 겸임 수석 코치’를 맡아달라는 오퍼를 타진했다. 당시 팀내 파벌 싸움 논란에 휘말려 궁지에 몰렸던 노무라는 쾌히 승낙했다. 하지만 정작 나가시마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요미우리·노무라 가쓰야’는 수포로 돌아갔고 노무라는 선수 겸임 감독으로 난카이에 잔류했다.[62]
이듬해 1976년에는 작년 시즌에서의 최악의 부진을 뒤집어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77년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로부터 구라타 마코토와의 맞트레이드로 아사노 게이시를 영입했다(아사노는 당시 ‘요미우리 킬러’라는 별명이 불리기도 했다). 1977년에는 2위와 15경기 차이로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1976년 일본 시리즈와 1977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퍼시픽 리그 우승 팀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맞대결에서 2년 연속 완패를 당하는 등 우승 달성에 실패했다. 같은 해 시즌 종료 후에는 다이요 웨일스로부터 존 시핀을 영입해 주전 2루수로 기용했다.
1978년에는 시즌 초부터 침체가 계속되면서 8월 후반에는 한때 팀이 선두 자리에 들어섰지만 결국 2경기 차이로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에게 정규 시즌 우승을 빼앗겼다. 1978년 시즌 종료 직후 에가와 스구루의 거취 문제와 요미우리 입단을 둘러싼 소동(통칭 에가와 사건)이 일어나면서 팀내 에이스인 고바야시 시게루가 에가와의 맞트레이드로 한신에 이적했다.
1979년에는 5위로 끝났는데 그 해 오프 시즌에 퇴단한 하리모토는 침체의 원인에 대한 신문기자의 질문에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것만은 단언할 수 있다. 팀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라고 토로했다. 하리모토는 그 이유를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떠나가는 새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헤어진 여자의 뒷담화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코치진의 자기방어가 눈에 띄었다. 나가시마 감독을 곁에서 도와줄려고 하지 않은 코치가 프런트에게 아첨을 피우고 지위를 지킬려고 했다. 요미우리의 코치라면 급여나 연봉도 높고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지고 좋은 이미지를 심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나가시마 감독은 ‘넘버2’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코치진을 하나로 묶을 사람이 없었다. 내가 요미우리의 유니폼을 입은 마지막 시즌에서 5위로 내려 앉은 나가시마 감독의 다음은 사다하루다. 사다하루에게 바짝 다가가는 무리도 나왔다. 내가 잘못된 방향이라고 한 것은 그런 팀내 분위기를 말한 것이다.
— 하리모토 이사오[63]
나가시마는 V9 시대를 모르는 젊은 선수들을 ‘신데렐라 보이’(シンデレラ・ボーイ)라고 불리면서 이토 스타디움의 추계 스프링 캠프에 집결시켰다. 이것은 나중에 ‘지옥의 이토 캠프’(地獄の伊東キャンプ)라고 불리게 됐다.[주 32] 캠프에서 열린 연습 경기에서 젊은 선수들이 전혀 활약하지 않았던 반면 베테랑 선수들만이 활약한 적도 있어서 당초에는 ‘1976년 오프의 재래’라고도 말해졌지만 이 캠프에서 젊은 선수들의 결속력이 높아져 훗날 후지타 모토시 감독 시절의 주력 선수가 된다.
또 1979년 시즌 종료 후에는 하리모토가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하였고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한 로이 화이트를 영입해 화이트는 하리모토를 대신해서 1980년 시즌 도중 40세가 되는 사다하루와 함께 팀 타선의 주축을 담당하는 간판 선수로서 기대됐다. 코칭 스태프 쪽에서는 나가시마의 이해 당사자이자 요미우리의 선배인 아오타 노보루를 수석 코치로 임명하는 등 팀의 재건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오타 수석 코치는 유력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폭력단과 자신의 접촉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면서 이 발언으로 인한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졌다(아오타 코치의 문제성 발언 사건).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아오타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코치직에서 사임했다.
야구 매스컴이나 팬들 사이에서는 영광의 V9 시대를 그리워하는 가운데 가와카미 데쓰하루 전 감독의 대망론이 서서히 급부상하고 있었다. 실제로 ‘가와카미파’라 불리는 요미우리 OB가 나가시마의 팀 꾸리기에 간섭(앞에서 말한 1976년 오프 당시 시바타의 트레이드 실패 등)하면서[64] 1976년 오프 시즌 훈련 당시 파트너이자 자신이 감독이 될 당시 코치로 발탁했던 오고 히로시를 하라 다쓰노리 드래프트 소동으로 잃는가 하면(하라의 자택에서 나가시마의 비밀편지를 갖고 갔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1979년 오프 시즌에는 앞에서 말한 소동으로 아오타 노보루를 잃는 등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프런트가 11명의 코치(후쿠다 마사히사, 스도 유타카, 세키네, 미야타, 오고, 나카무라 미노루, 다키 야스하루, 구로에, 구니마쓰, 마치다 유키히코, 스즈키 쇼스케)들을 해임시켰다.[65] 구로에는 1978년에 퇴단했지만 나가시마에게서 “한 팔로서 잘해줬지만 구단의 생각이다. 정말 미안하지만 그만둬라”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대해 구로에는 눈물을 흘리며 나가시마에게 “한 팔의 구로에를 자르신다면 자신도 그만두겠다라고,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다고 말했다.[66]
나가시마의 비판에 대한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는 와중에 1980년 8월 가와카미 본인이 아오타 노보루, 마키노 시게루, 후지타 모토시, 구니마쓰 아키라 등이 참석한 슈칸 분슌의 좌담회를 열어 취재를 담당하던 다키 야스하루에게 오프 더 레코드라는 조건으로 나가시마의 후임 감독에 대해서 다양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그 기사가 게재되면서 나가시마에 대한 비판 또는 자신의 하차를 요구하는 움직임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결국 구단주인 쇼리키 도루가 아닌 요미우리 신문사 무타이 미쓰오 사장이 1980년 시즌 종료에 앞서 나가시마 감독을 해임시키기로 결정했다. 구단이 A급을 확보하면 연임하겠다고 공언했던 것이 완전히 뒤집히게 되자 이를 ‘음모’라며 한바탕 시끄러워졌다. 가와카미파의 거듭된 비난에 시달리던 나가시마는 이를 가와카미(와 그 일파들)에 의한 수 년간 꾸민 뒷공작의 결과로 간주해 가와카미에 대한 나가시마의 악감정을 갖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67] 가와카미가 OB회 회장이 된 뒤로는 OB회에 연속으로 불참하다가 ‘1990년에 올해도 참석하지 않으면 제명된다’는 OB회의 권고를 받고서야 마지못해 얼굴을 내비쳤는데[67] 이를 계기로 가와카미와 전격으로 ‘화해’했다. 나가시마는 사임이라는 명목의 ‘실질적 해임’ 이후 쇼리키 도루한테서 프런트 입문 권유를 받았지만 프런트는 자신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고 이후 개인 사무소 ‘오피스엔’을 설립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떠돌이 시대’를 시작했다.
후임 감독은 후지타 모토시가 맡았는데[68] 후지타는 위에서 말한 좌담회에도 참석했고 그 좌담회에서 가와카미가 후임 감독 이름을 언급한 탓에 ‘나가시마파’의 언론으로부터 공격 대상이 됐다. 1981년에 팀이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른 이후에도 ‘후지타 때리기’는 계속됐다. 1980년 오프에는 세이부의 네모토 리쿠오 감독으로부터 “세이부 감독을 맡아주지 않겠나”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69]
한국 야구의 현재 여건은 일본 프로 야구가 생긴 34년보다 여러모로 좋은 것 같다. … 초창기의 일본 프로 야구가 역사깊은 미국 프로 야구와 잦은 친선 경기를 가져 빠른 발전을 이룩한 것처럼 한국 프로 야구도 일본과 깊은 유대관계를 갖는 것이 발전을 촉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요미우리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야구 뿐만 아니라 스포츠 전반의 지도자적 역할, ‘스포츠 외교관’적 역할을 보여주었다. 특히 요미우리 감독에서 물러난 이듬해 1981년 2월에는 쿠바 문화 시찰, 같은 해 6월 중국봉루협회에서의 야구 지도, 10월에는 월드 시리즈 관전 등을 했고 이듬해 1982년 1월에는 KBO 초청으로 대한민국을 방문, 세미나의 강연자로 나선 적도 있다.[70]
그 외에도 스포츠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는데 독특한 캐릭터로 호평을 받아 재미있는 아저씨 이미지를 가질 정도였다. 이듬해 1982년 1월에는 호치 신문의 객원 평론가로 부임함과 동시에 닛폰 TV 계열에서도 프로 야구 중계 해설자로서 연수 경기를 담당하고 있었다. 1988년에는 가즈시게가 야쿠르트에 입단했다.
이전에 타 구단으로부터 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연달아 있었지만 요미우리를 생각해서라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57] 나가시마에 의하면 다이요, 닛폰햄, 야쿠르트로부터 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고[71] 그 가운데에서도 다이요가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당시 포수 층이 얇았던 다이요로서는 미국 마이너 리그 팀에 소속돼 있던 와카나 요시하루의 영입을 건의했다) 최종적으로 ‘좀더 공부해야겠다’라는 이유로 거절했다.[72][73] 세이부에서도 요청이 있었지만 거절했고 히로오카 다쓰로가 감독으로 취임하게 됐다.[74][75] 가즈시게가 소속돼 있던 야쿠르트로부터 1989년 시즌 종료 후 세키네 준조의 후임 감독으로서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가족들의 반대도 있어 고사했고 결국은 노무라 가쓰야가 차기 감독으로 취임했다.[76] 1990년 시즌 종료 후 오릭스로부터 감독 제의를 받았지만 고사했고 고베 출신으로 나가시마의 대학 시절·요미우리 선수 시절의 후배인 도이 쇼조를 추천, 도이가 감독으로 취임했다.[77]
1990년에는 요미우리 감독에서 사임할 당시 갈등을 일으켰던 가와카미 데쓰하루와 화해했고 1991년에 무타이 미쓰오가 사망하면서 와타나베 쓰네오가 요미우리 신문의 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나가시마의 감독 복귀가 기정사실화 됐다. 1992년 오프에는 호치 신문 객원 해설위원직을 사임했고 같은 해 10월 12일에 제13대 감독으로서 기자회견을 열어 등번호를 ‘33’(3을 두 개로 합친 것을 의미함)번으로 결정했다. 같은 해 11월 21일에 열린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세이료 고등학교의 마쓰이 히데키를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했다.[78] 나가시마의 감독 복귀는 다음 해에 출범을 앞둔 J리그의 대책이라는 의미도 있었다.[57]
감독으로 복귀한 나가시마는 오랫동안 ‘스피드 & 충전’(‘スピード&チャージ’, 후에 ‘충전 & 충전’)을 표방했고 낭인 시대에 감명을 받은 쿠바 야구의 실천을 목표로 했다.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했던 제시 바필드를 입단시켰고 또 아들인 가즈시게를 야쿠르트로부터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 부자지간에 요미우리의 일원이 됐다.
감독 복귀 첫 해인 1993년에는 2년 연속 우승한 야쿠르트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3위로 끝났는데 투수진은 사이토 마사키 등의 분투로 호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하라 다쓰노리, 고마다 노리히로 등 베테랑들의 잇단 부진, 이 해에 타격 코치로 발탁한 나카하타 기요시가 재기하지 못했고 팀 타선이 부진을 겪으면서 팀 타율은 12개 구단 가운데 최하위였다. 시즌 종료 후 프로 야구에 자유계약선수제도(FA)가 도입되면서 주니치에서 오치아이 히로미쓰를 영입에 성공했다. 고마다는 FA로 요코하마에 이적했다.
이듬해 1994년에는 주니치와 리그 동률을 이루면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주니치와 상대하여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경기 직전에 나가시마는 이 경기를 ‘국민적 행사’라고 발언하여 후에 ‘10.8’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의 명승부가 됐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퍼시픽 리그 5연패를 달성한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맞대결을 벌였는데 일본 시리즈를 앞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세이부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평판을 내렸지만[79] 4승 2패의 성적으로 감독 부임 이후 처음으로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시즌 종료 후 일본 야구계의 최고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1995년에는 도민문화영예장을 받았다. 그해 FA를 통해 야쿠르트에서 히로사와 가쓰미와 자유 계약이 된 잭 하웰, 히로시마에서도 FA로 가와구치 가즈히사, 메이저 리그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셰인 맥을 4억 엔의 계약금으로 획득하는 등 ‘30억 보강’이라고 불릴 정도의 대대적인 보강을 단행했다. 그러나 히로사와, 마쓰이 등 대형 타선이 오치아이를 제외한 전체적으로 컨디션을 끌어올리지 못했고, 구와타 마스미의 부상에 의한 장기 이탈 등 팀의 전력이 극도로 저하되는 악재가 겹쳐서 당시 리그 선두를 지키고 있던 야쿠르트의 뒤를 쫓아 3위에 끝났다.
1996년에는 최대 11.5경기차로 벌어졌던 히로시마를 제치고 선두 자리를 탈환하면서 리그 우승을 달성했는데 작년에 달성할 수 없었던 2년 넘는 ‘메이크도라마’(メークドラマ)를 완성시켰다(1999년은 ‘메이크 미라클’(メークミラクル), 2001년에 ‘미라클 어게인’(ミラクルアゲイン)이라는 표어를 각각 내걸었지만 우승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오기 아키라 감독이 이끄는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오릭스의 홈구장인 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 1승 4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다. 그 해 시즌 종료 후 아들 가즈시게에게 스스로 방출 통보를 전하면서 현역을 은퇴시켰다.
1997년에는 FA를 통해 세이부에서 기요하라 가즈히로,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에릭 힐만, 긴테쓰 버펄로스로부터 맞트레이드로 이시이 히로오를 영입하는 등 대형 보강을 단행했지만 보강 전력이 부진이나 부상에 시달렸고 더 나아가 에이스인 사이토 마사키의 부진도 있어서 4위에 끝나는 등 젊은 선수들의 부진 등으로 나가시마에 대한 비판도 커졌다.
1998년에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출신의 거물 신인 다카하시 요시노부의 입단으로 야수의 연령이 낮아지면서 개막 5연승을 장식하는 등 순조롭게 시즌을 맞이했지만 6월 이후 사이토와 구와타 등 베테랑 투수진들이 컨디션 난조로 부진에 시달렸다. 7월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게 7점차로 역전패를 당했던 경기가 있는 것을 계기로 이후에는 3위로 시즌을 마쳤다. 개막 첫 4번 타자의 자리를 잡은 마쓰이가 프로 첫 타이틀로 홈런왕, 타점왕에 오르면서 타격 2관왕을 획득했다.
그 사이에도 나가시마는 계속해서 감독직을 맡고 있었지만 시즌이 종료될 때마다 후임 감독 후보로서 호리우치 쓰네오 1군 수석 코치(당시)나 모리 마사아키, 에가와 스구루 등 요미우리 OB의 이름이 유력하게 거론됐다. 그런 와중에 후임으로 지도하기 위해 1998년부터 하라 다쓰노리를 1군 코치로 초빙시켰다(하라는 2000년, 2001년에 1군 수석 코치). 한편 하라는 코치 시절에 대해 “나가시마에게서는 여러 가지 조언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모두 나가시마가 결단을 했다. 무책임한 것 같았지만 3년간 나 자신은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80]
1998년 7월 31일 한신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은 발비노 갈베스가 깃타카 아쓰시 주심을 향해 공을 내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가시마는 감독으로서의 책임으로 구단 사장 와타나베 쓰네오에게 사표를 제출했지만 구단 측의 만류로 한신전이 종료된 다음날에 머리를 깎았다고 밝혔다.[81]
1999년에는 거물 신인 우에하라 고지가 시즌 20승을 올렸고 같은 신인이던 니오카 도모히로도 유격수로 정착, 프로 2년차인 다카하시는 3할 대의 타율과 30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젊은 선수들의 활약이 있었지만 구와타나 사이토, 갈베스 등을 비롯한 베테랑 투수진의 부진이 이어졌고 시즌 종반에는 그 해에 호조를 보였던 다카하시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됐다. 다카하시와 마쓰이가 아닌 부진에 시달렸던 기요하라를 4번 타자로 계속 기용했던 나가시마의 지휘 스타일에 의문이 커지자, 결국에는 2위로 끝나면서 우승을 놓쳤다.
2000년에는 FA로 입단한 에토 아키라에게 등번호 33번을 양보하고 나가시마는 현역 시절 등번호였던 3번으로 변경했다. 당초에 이 등번호 3번을 나가시마는 유니폼 위에 옷을 덧입어 언론과 팬에게는 숨기고 있었다. 세간에는 등번호 3번을 착용한 나가시마가 보고 싶다고 하는 분위기가 고조됐을 무렵에 유니폼을 공개하여 당시에 화제성이 결여돼 있던 팀의 화제몰이에 크게 기여했다. 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부터 FA로 입단한 구도 기미야스, 한신에서 자유 계약 선수로 있던 대럴 메이, 드래프트에서는 다카하시 히사노리를 영입했다. 그 해엔 4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일본 시리즈 상대팀이자 오 사다하루 감독이 이끄는 전년도 일본 시리즈 우승팀 다이에였는데, 일명 ON 대결로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1·2차전 연속으로 패하는 등 고전했지만 그 후 4연승을 기록하여 자신으로서는 통산 두 번째의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이듬해 2001년에는 이 해를 끝으로 감독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9년 간의 감독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9월 28일에 감독 퇴임과 동시에 종신 명예 감독으로 취임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82][83] 나가시마의 용퇴 및 당시 1군 수석 코치였던 하라를 차기 감독으로 부임했다는 내용의 발표가 이루어진 기자 회견장에서 요시다 신이치로(닛폰 TV 아나운서)가 “나가시마에게 있어서 야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야구라는 스포츠는 인생 그 자체입니다”(野球というスポーツは人生そのものです) 라고 말했다.[주 33]
2002년 2월 20일에 미야자키시 명예시민, 같은 해 3월에는 사쿠라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됐고 4월 22일에 아테네 올림픽을 목표로 하는 일본 대표팀의 강화위원장으로 부임했다. 7월에는 릿쿄 학원 영예상(제1호)을 수상했고 같은 해 12월 2일에 아테네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정식 부임했다. 이듬해 2003년 11월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과 중국, 중화 타이베이 등 아시아 각국들을 상대로 연달아 승리하는 등 올림픽 본선 진출이 확정됐다. 그러나 이듬해 2004년 3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84][주 34] 한때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지만 우반신에 마비가 남아있어 언어 능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가시마 본인과 주변에서는 아테네 올림픽으로의 복귀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단기간으로의 병상 회복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돼 가즈시게가 “(아테네에는)가지 않는다”라고 기자 회견을 통해서 이렇게 밝혔고[주 35] 직함은 그대로이지만 나가시마가 현지 아테네에서 대표팀 지휘를 맡을 수 없게 됐다. 나가시마를 대신해서 대표팀 수석 코치인 나카하타 기요시가 지휘를 맡았지만 결과는 3위(동메달 획득)에 끝났다.
2005년 7월 3일, 나가시마는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 히로시마전을 관전하면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약 1년 4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경기에서의 관전에는 같은 해 1월 1일부터 ‘구단 대표 특별 보좌’가 된 장남 가즈시게가 동행했다. 이 때는 사실상 요미우리 그룹의 독점 취재가 되면서 나가시마의 육성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같은 해 11월 4일 고쿄에서 열린 아키히토·미치코 황후와의 간담회에 참석하여 가벼운 대화에 응하는 나가시마의 모습이 전해졌다.
2005년 11월 3일에는 2005년도의 문화공로자(스포츠 진흥)로 선정됐고 이듬해 2006년에는 소년 야구 교실에 참여하는 것 외에도 재활훈련의 성과도 있어 조금씩 활동을 재개했다. 또,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을 중심으로 2005년부터 시작된 ‘나가시마 시게오 드림 프로젝트’[주 36]에 특별 게스트로서 참여하는 등 어린이들을 상대로 야구 지도를 했다.
2007년 7월, 니혼케이자이 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인기 코너 ‘나의 이력서’에 등장했으며 같은 해 9월 18일에는 부인이 병으로 사망했다. 2009년 9월에 방송된 NHK 스페셜 ‘ON의 시대’(전2회)에 출연하여 뇌졸중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인터뷰에 응했는데 텔레비전에서의 장시간 동안 가진 인터뷰는 뇌졸중이 발병된 이후 처음이었다. 그 프로그램에서의 나가시마는 “주변에서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말도 있었다”라고 밝히는 등 자택 주변에서의 보행하는 훈련이나 근력 트레이닝 등의 재활훈련을 공개했다.
2010년에는 《슈칸 분슌》에서 방송인이자 수필가인 아가와 사와코와 대담하는 모습을 게재해 발병 당시의 모습을 되돌아보기도 했고[주 37] 2012년 11월에는 쿠바 정부로부터 우호 훈장이 수여됐다.[85]
2013년 4월 1일 오후,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국민영예상 수여와 관련해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국민영예상 수여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고[86][87][88] 같은 달 16일에 일본 정부는 나가시마와 마쓰이를 국민영예상 공동 수상자로 결정했다.[89] 5월 5일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대 히로시마전의 경기에 앞서 마쓰이 히데키의 은퇴식과 더해 국민영예상 시상식이 거행[90]돼 나가시마는 이 자리에서 도쿄 돔을 찾은 관중들에게 “국민영예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경기 전에 열린 시구식에서는 나가시마가 한 손 치는 것으로 타석에 들어섰고 투수에는 마쓰이, 포수는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감독, 주심은 아베 신조 총리가 맡았다.[91][92][93]
같은 해 5월 31일에 지바현민 영예상[94][95], 7월 12일에 사쿠라시민 영예상[96][97]을 각각 수상했다. 후자의 수상에 맞춰 사쿠라시 이와나 운동 공원 제1 야구장의 명칭을 같은 날부터 ‘나가시마 시게오 기념 이와나 구장’(長嶋茂雄記念岩名球場)으로 변경됐다.[97]
2014년 8월, 도쿄도 명예도민으로 선정되면서[98] 10월 1일에 시상식이 열렸다.[99]
2014년 12월,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의 이사직에서 물러나 고문으로 취임했다.[100]
2018년 7월 초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는데 정밀 검사에서 담석이 발견돼 그대로 치료를 진행했다.[101] 같은 해 말에는 퇴원하여 자택에서 요양, 재활 치료를 계속했다.[102]
2020년에 개최될 예정이었던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고 있었지만[103] 담석으로 인한 장기 입원으로 이전의 재활로 단련됐던 근력이 입원 생활로 인해서 쇠퇴해버렸고[104] 여름 시점에서는 참가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103] 하지만 도쿄 올림픽 개최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2021년으로 연기되면서 나가시마는 그해 가을부터 재활을 재개했다.[103] 담석으로 인한 입원 후 공식 석상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였지만 2021년에는 도쿄 돔에서 개막전을 관전하기까지 회복된 모습을 보였다.[105] 그리고 2021년 6월 하순 경에 대회 조직위원회로부터 정식 제안을 받아[106] 같은 해 7월 23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의 올림픽 개막식 성화 봉송에 오 사다하루,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참가하면서 요시다 사오리, 노무라 다다히로로부터 나가시마는 왼손에 든 성화봉에다가 전달 또는 이동하는 역할을 맡았다. 성화봉을 사다하루에게 건네준 뒤 마쓰이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경기장을 걸었다.[107]
2021년 10월 26일, 일본 정부는 나가시마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키로 발표했다.[3]
2024년 5월 3일,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대 한신전은 교진군 창설 90주년 기념 특별 경기 ‘나가시마 시게오 DAY’라는 이름으로 개최돼 5회말 종료 시에는 나가시마 본인이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내 아베 신노스케 감독,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세 사람이서 기념 촬영에 응했다.[108]
가네다 마사이치, 무라야마 미노루, 곤도 히로시, 아다치 미쓰히로, 에나쓰 유타카, 반도 에이지, 이나오 가즈히사 등의 투수, 또 포수로서 올스타전이나 일본 시리즈에서 상대했던 노무라 가쓰야가 나가시마를 ‘계산 할 수 없는 타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곤도나 아다치는 “나가시마는 칠 수 없을 것 같은 코스라도 방망이를 내던지거나 순간적으로 팔을 굽히거나 해서 때려내는 타자였다”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칠 수 있는 공을 확실히 친다. 잠재력이 높아 대부분의 스트라이크 존에 오는 볼은 오 사다하루에게 있어서 ‘칠 수 있는 공’이 돼버리지만, 칠 수 없는 공까지 왠지 친다고 할 타입은 아니었다”라고 평가하는 사다하루와 비교하면서 말했다.[109][110] 에나쓰는 “타석마다 왜 쳤었던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라고 나가시마에 관해서 이야기했고, 노무라는 자신의 저서 《교진군론》 중에서 나가시마를 “날아오는 공을 칠 수 있는 천재”라고 극찬했다.[111]
극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웃 스탭이 특징이었다. 나가시마가 내디딛는 아웃 스텝은 스윙의 악습의 사례로 해설자로부터 비판받을 수도 있고, 상대 팀의 수비진에서 “얼굴 방향과는 전혀 관계없는 타구가 날아오기 때문에 지키기가 어렵다”라고 평가한 적도 있었다.[112] 그런 한편으로 허리와 어깨를 벌리는 방망이를 높은 위치에 유지하여 공을 끌어당겨서 왼쪽 무릎도 한껏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아웃 스텝을 하면서도 공을 강하게 칠 수 있었다.[112] 이에 대해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보통 타자라면 1할도 확실하지 않은 폼, 나가시마는 타고난 능력으로 방망이의 머리를 마지막까지 남겨두었기 때문에 그런 폼이라도 여러 가지 볼에 대응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고 소년 야구 교실 등에서는 “저렇게 치는 것은 나가시마 자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흉내내선 안 된다”라며 이론을 전개했다. 이 점은 가네다 마사이치도 언급하였고, “나가시마는 아무리 자세가 무너져 있어도 방망이의 머리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져 있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할 수 없었다. 매우 박력있었다”라고 말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오 시프트’(王シフト)를 만들어낸 계기가 된 도요 공업의 컴퓨터는 당연하게 나가시마에 대해서도 같은 데이터를 분석했지만 나가시마에 관해선 전혀 특징적인 경향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나가시마 시프트’를 만드는 일은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오카자키 미쓰요시는 “오 시프트를 만들게 해서 그걸 신경쓰지 않고 홈런을 계속쳤던 사다하루는 정말로 위대하다. 그러나 동시에 나가시마 시프트를 만들어 주지 않았던 나가시마도 대단하다”라고 평가했다.
나가시마의 헛스윙은 벗겨졌던 헬멧이 3루 벤치 쪽으로 날아갔다고 할 정도로 호쾌한 헛스윙으로 팬들을 들끓게 했다. 삼진당했을 때의 그림을 생각하여 크기가 작고 타원형의 헬멧을 미국에서 가져와 헬멧이 날아가는 각도 등을 따져가며 헛스윙 연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호쾌한 헛스윙이나 데뷔 당시의 4타석 연속 삼진 등을 기록할 정도로 삼진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 슬러거로서는 삼진은 적은 편이었다. 삼진 개수의 타수에 대한 비율 0.090는 통산 400홈런 이상을 기록한 15명 중에서는 하리모토 이사오, 도이 마사히로에 이어 가장 낮다. 또 40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 중에서 삼진률이 1할을 끊고 있는 건 이 3명 뿐이다.
수위 타자를 획득한 시즌에서는 모두 안타 개수에서도 리그 1위였다. 시즌 최다 안타 10회는 현재도 프로 야구 기록(6년 연속을 포함하지만 이것도 프로 야구 기록)이며 6차례를 석권한 수위 타자 중 가장 큰 2위와의 차이가 적었던건 1963년에 고바 다케시와는 2리차로 그 외의 5차례는 모두 1푼 5리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6차례의 수위 타자 중 2차례(1959년, 1971년)는 나가시마가 센트럴 리그에서 유일한 3할 타자이다.
나가시마가 전성기였던 시대에는 리그 평균 타율이 2할 3푼 등 극단적인 타저투고의 환경 아래인데다 게다가 1974년에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타자에게 유리한 래빗 볼이 보급됐는데 이듬해 1975년 이후에는 센트럴 리그의 타고화가 단번에 진행됐다. 그 때문에 걸출값[113]을 측정하는 세이버매트릭스(RC 관련, XR 관련, 장타율 걸출도와 OPS 걸출도 등)에 있어서 대부분의 통산 기록 지표에서의 나가시마는 프로 야구 역대 3위 이내에 위치하고 있다. 타율걸출도(RBA)에서도 우타자로서는 역대 1위이며 그 시대에 걸출한 타자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치러졌던 미일 야구에서는 다른 많은 선수들이 통산 타율 1할대에서 2할 전후인데 나가시마는 69경기에서 타율 2할 9푼 5리(200타수 59안타)라는 높은 타율을 기록했고, 통산으로 장외 홈런을 포함한 6개 홈런과 27타점, 4사구 26개, 도루 5개 등을 남겼다.
사다하루가 홈런 타자로서 각성한 이후에는 홈런왕 타이틀을 획득할 순 없었지만 특히 타율과 타점에서 2관왕이었던 1963년에 사다하루와는 불과 3개 차이로 홈런왕 타이틀을 놓쳤고 타율과 홈런으로 2관왕을 석권했던 1961년에도 구와타 다케시에게 8타점 차이로 타점왕 타이틀을 빼앗겨 3관왕을 놓쳤다. 한편으론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년 동안 사다하루가 수위 타자·홈런왕·타점 2위를 기록하여 타점왕은 나가시마가 석권해 3년 연속으로 사다하루의 타격 부문 3관왕을 저지하기도 했다. 타율·홈런·타점 부문에 있어서 ‘2관왕, 남은 한 부문이 리그 2위’인 시즌을 1958년, 1961년, 1963년 통산 3차례나 남겼지만 이것은 사다하루의 5차례와 나카니시 후토시의 4차례에 이은 역대 3위의 기록이다.
통산 고의 사구 205개, 타율 10위권 진입이 통산 13회 등은 우타자 역대 1위의 기록이며 통산 2471안타는 가네모토 도모아키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오랫동안 대졸 선수로서의 역대 최다 기록이었다. 센트럴 리그 외곬수로 활약하면서 통산 기록에서는 3루타, 장타, 타점, 희생 플라이 개수 모든 우타자의 센트럴 리그 기록을 갖고 있다. 또, 통산 안타를 실제 프로 생활 기간으로 나눈 평균 안타 개수는 145개에 이르러 동 시대에 활약한 하리모토 이사오, 134개, 에노모토 기하치 128개, 후쿠모토 유타카 127개, 오 사다하루 126개, 오스기 가쓰오 117개, 노무라 가쓰야 111개, 기누가사 사치오 110개, 가도타 히로미쓰 106개 등 다른 일류 타자의 평균 개수와 비교해도 내밀고 있어 현역 시절에는 우타자이면서도 나름대로 안타를 겹쳐 쌓았다. 통산 타율 3할 5리는 7000타수 이상을 기록한 선수 중에서는 역대 4위이며, 8000타수 이상의 선수 중에서는 역대 2위(우타자에서는 역대 1위)이다.
큰 무대에서도 잘 치고, 승부욕이 강한 인상이 남아 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통산 68경기에 출전하여 출루율 4할 2리, 장타율 6할 9푼 4리, OPS 1.096의 성적을 남겼고 일본 시리즈 첫 출전에서는 통산 12경기에서 타율 4할 2푼 9리(49타수 21안타 4홈런)을 기록했다. 또 일본 시리즈 MVP 통산 4차례 획득은 사상 최다 기록이다. 2개의 홈런을 때린 천황 참관 경기에 대해 팀 동료인 히로오카 다쓰로는 “천황 참관 경기는 나가시마를 위해 있었던 것과 같은 것”라고 말해 “그가 그런 무대에서 힘을 확실하게 발휘할 수 있는 건 실력이 있는 것도 그렇지만 사고방식(큰 시합에서 겁먹지 않고, 오히려 즐긴다)이 굉장한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크다”라고 평가했다.[114] 1966년 11월 6일의 미일 야구·천황 참관 경기에서도 장외 홈런을 때려내 황실 관람 경기에서는 통산 10경기에서 타율 5할 1푼 4리(35타수 18안타 7홈런)를 기록했다.
포수에 의한 ‘속삭임 전술’이 전혀 먹히지 않았던 선수였다. 노무라 가쓰야는 동요를 일으키려고 타격폼이 이상하다고 지적했는데 나가시마는 내색을 한 후에 다음 공을 홈런으로 날려 홈을 밟은 나가시마로부터 ‘알려줘서 고맙다’라는 말을 듣고 아연실색한 일화를 소개했다.[115] 또한 쓰지 야스히코에게는 “어이, 단푸(ダンプ, 쓰지의 별명), 시끄러워! 야구를 하라고. 야구를!” 하고 소리치며 방귀를 이용해서 공격했던 적이 있다.[116] 타석에서의 집중력이 강한 나머지 타석에 들어선 뒤 헛스윙으로 쓰지의 머리 부분에 방망이가 부딪혀버려서 실신, 그것을 알아차리면서 ‘무슨 짓이냐!’며 무심코 일갈했다는 에피소드도 남아 있다.
대학 시절, 감독인 스나오시 구니노부와 함께 조 디마지오, 요기 베라, 미키 맨틀, 로저 메리스, 프랭크 로빈슨 등의 연속 사진을 연구해 타격 폼, 배트를 준비하는 방법, 스탠스, 허리의 회전 등을 철저하게 몸에 걸쳤다.[117] 또한 방망이는 현역 생활 17년 동안 대부분 루이스빌 슬러거 등과 같은 미국산을 사용했다(미쓰이 물산 경유해서 입수).[118]
비교적 잘치지 못하는 코스나 구질이 없던 나가시마는 고의 사구를 당한 경우가 많았다. 신인 시절인 1958년에는 6경기 연속 고의 사구를 기록했고 1961년에는 연간 고의 사구 개수가 35개에 달하면서 8월 29일 한신전에서는 고야마 마사아키로부터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의 고의 사구로 출루했다. 1960년 고쿠테쓰와의 개막전에서는 5회 2사 1루의 상황에서 1스트라이크 2볼이 됐을 때 포수 히라이와 쓰구오가 일어서서 나가시마를 고의 사구로 보낼려고 했다. 무라타 겐이치 투수는 포수가 지시한 코스로 던졌지만 나가시마는 억지로 방망이를 휘둘러 좌측 관중석 중간에 홈런을 날렸다. 같은해 7월 16일에는 투수가 고의 사구로 던진 공을 가까스로 쳐서 2루타를 기록했다. 또한 1962년 7월 12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도 9회초 2사 2·3루의 타석에서 가와무라 야스히코가 던진 고의 사구성 공을 좌익수 앞에 떨어진 역전 적시타를 때려냈다.
그런 나가시마가 잘 치지 못하는 공으로 몸쪽 슈토를 들 수 있다. 1960년대 일본 프로 야구계에서는 사인 훔치기(일명 ‘스파이 행위’)가 공공연하게 퍼지고 있었다(원래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사인 훔치기를 지시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119]). 노무라 가쓰야가 요미우리에서 트레이드로 난카이에 입단한 아이바 요시히로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당시 요미우리에서는 포수의 사인을 보고 벤치에서 소리로 사인을 전달하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 나가시마는 ‘몸쪽의 슈토가 올 때만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노무라는 ‘몸쪽 슈토’ 이외에는 배우지 않아도 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119]
또한 몸쪽으로의 슈토를 자랑으로 여겼던 히라마쓰 마사지에 대해서는 나가시마 스스로가 ‘히라마쓰의 슈토는 칠 수 없었다’라고 분한 듯이 회고하여 히라마쓰도 “(슈토를 사용하기 시작한)그 해 이후 나가시마에게서 맞은 기억은 없었다”라고 말했다.[120] 슈토를 사용하기 전부터의 통산 전적에서도 히라마쓰와 상대했을 때의 타율은 0.193이었다.[121]
고의 사구에 대한 항의로써 나가시마는 맨손으로 타석에 들어선 적도 있다. 1968년 5월 1일 주니치전에서는 2사 2루의 상황에서 투수 야마나카 다쓰미는 고의 사구를 던졌다. 나가시마는 여기에서 3구째부터 방망이를 들지 않은 채 타석에 들어서 맨손만으로 자세를 취하는 등의 행동으로 항의를 표했다. 경기장 안은 술렁거렸지만 공을 절대로 칠 수 있을리 없는 나가시마를 야마나카는 그대로 볼을 2개 연속으로 던져서 볼넷으로 내보냈다. 게다가 1971년 6월 17일 히로시마전에서는 7회 2사의 주자 3루 상황에서 히로시마의 이노우에 요시오 - 미즈누마 시로 배터리는 고의 사구로 승부를 피하려고 했다. 3구 연속 볼을 던진 시점에서 나가시마는 방망이를 버리고 맨손으로 타격 제스처를 취했다. 관중석이 떠들썩해지는 와중에 결코 공을 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4구째는 고의 사구가 되면서 1루로 출루했다.[주 38]
평범한 3루수보다 1.5미터 정도 뒤에서 수비하고, 특히 좌우(1루쪽으로 향하는 라인) 수비 범위가 넓고 유격수와 투수의 수비범위에 있는 타구도 대신 처리해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주 39] 나가시마의 말에 따르면 “저 범위의 타구는 3루수 최대의 멋진 장면”이라고 했는데 수비에 대해서는 타격보다도 “팬과 일체가 될 수 있는 수비를 좋아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땅볼에는 15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해서 잡기가 어려운 땅볼을 간단하게 잡아내는 것이 프로라고 말하는 한편 “거꾸로 솟아오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단순한 땅볼을 어렵게 잡은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한편으로 플라이에 대해서는 한 가지의 종류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유격수인 구로에 유키노부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나가시마는 “그냥 플라이볼은 놀이나 기예가 필요없기 때문에 잡아도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122] 또한 송구 후에 오른손을 팔랑팔랑거리는 독특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것은 가부키의 움직임에서 따온 것이다.
나가시마가 등장할 때까지는 요미우리의 수비 차례가 오면 모두가 화장실에 갔었어. 즉 수비는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나가시마가 등장하고 나서는 그 수비가 보고싶어서 말이지. 화장실마저도 갈 수 없게 돼버렸거든.
별 것 아닌 땅볼을 알까기하는 진기한 플레이가 TV에 잡히는 등 실책하는 장면이 자주 방송돼 수비의 명수로서 언급되기 보다는 화려함이나 재치 넘치는 플레이가 화제에 자주 오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수치상으로는 수비 능력이 매우 높은 선수로서 통산 수비율 9할 6푼 5리는 스미 후지오의 9할 7푼 5리에 이은 3루수로서의 센트럴 리그 역대 2위(1,000경기 이상의 선수가 대상이며 스미는 통산 1,350경기·3,296차례 수비 기회)를 기록하고 있어 1,500경기 이상 및 4,500차례 수비 기회를 대상으로 했을 경우에는 3루수로서의 프로 야구 역대 1위가 된다. 데뷔한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계속 경기에 출전하여 7,353차례 수비 기회를 시작으로 경기수·플라이 아웃·(1루)송구 아웃·병살 등, 실책 수를 제외한 모든 통산 수비 기록에서 다른 3루수들을 압도하고 있다(모두 3루수로서의 프로 야구 역대 1위).
시즌에 있어서도 수비 지표의 RRF(레인지 팩터)로 데뷔 이후 7년 연속을 포함하여 3루수로서의 리그 1위를 통산 8차례(1958년 ~ 1964년, 1967년)를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다른 3루수와 비교하여 뛰어난 수치를 남겼다. 1968년부터 (RRF가)플러스인 수치가 적어지고 1970년 이후에는 1973년 이후의 4시즌에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어 34세 이후부터 수비에 대한 쇠퇴가 보였다. 리그 1위를 7년 연속·통산 8차례는 모두 3루수 역대 1위의 성적이며 플러스였던 시즌의 합계치도 3루수 역대 1위이다. 수치에서 봤을 때 전성기 때는 타구를 아웃시키는 능력이 아주 높고, 수비 범위가 넓은 3루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즌 214차례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이라는 3루수 프로 야구 기록도 보유하고 있었다(연속 시즌에서는 2012년에 미야모토 신야가 경신).
릿쿄 대학 시절에 스나오시 구니노부 감독이 도입·연구한 메이저 리그의 스텝이나 글러브 다루기 등 당시의 최첨단 기술을 도입해 연습했다.[17] 젊은 시절엔 짧기는 하지만 유격수와 외야수로서도 출전했다.
히로오카 다쓰로는 나가시마의 수비에 대해 “프로 3년 차까지는 잘했다. 수비 범위도 넓었고, 무서운 녀석이 들어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4년 차부터 움직일 수 없게 됐다”[123]라고 평가했다.[124]
젊은 시절에는 뛰어난 준족과 과감하고 좋은 주루가 장점 중의 하나였다. 러닝 홈런을 세 번이나 기록했는데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도 기록했다. 특히 1960년 7월 17일의 다이요 웨일스전에서는 고의 사구성 공을 치고 나서 러닝 홈런을 기록했다. 또한 같은 해 8월 21일 고쿠테쓰 스왈로스전에서는 1사 1·2루에서 사다하루가 때린 좌익수 플라이에서 1루 주자였던 나가시마는 기세좋게 스타트를 시작하여 2루에 되돌아오려고 했던 후지오 시게루를 따라잡으며 아웃이 됐다.
신인 시절에는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37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등 젊은 시절에는 도루가 많았다. 하지만 나가시마 본인은 “달리는 것이 너무 좋다”라고 말하면서도 “1루에서 2루로의 도루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1루에서 3루까지의 거리감이 너무 좋았다”라고 말했다. 나가시마의 3루타는 통산 74개(역대 8위, 우타자에서는 히로세 요시노리에 이어 역대 2위)로 많았고 1960년 5월에는 4경기 연속 3루타라는 일본 기록도 세웠다. “관객들에게 가장 어필해서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3루타라고 하는 이유에서, 나 자신이 프로로서의 가치는 3루타라고 생각했었다”라고 말했다.[125] 신인 시절 항목에서 언급한 ‘홈런 취소 사건’은 유격수 머리 위 아슬아슬하게 라인 드라이브할 듯한 타구였기 때문에 “좋아, 3루타다!”라고 생각하여 전력질주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125]
30세 전후가 되기까지는 단타성 타구라도 틈이 있으면 적극적인 주루로 과감하게 다음 루를 노려 3루타가 많은 한편으론 2루타도 많았다(통산 418개는 역대 7위이며, 우타자에서는 야마우치 가즈히로, 사카모토 하야토에 이어 역대 3위). 리그 최다 2루타 통산 3차례라는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도 갖고 있다.
홈스틸을 6차례 시도해서 2번 성공시켰고 그 외에 1루 주자로서 후속 타자의 외야 플라이에 의해 2루를 돌아간 지점에서 되돌아올 때 2루를 통과하면서 2루를 밟지 않고 통과하여 1루로 되돌아 왔다고 하는 ‘삼각 베이스 사건’을 1960년, 1964년, 1968년에 세 차례나 일으켰다.
성의 표기로는 ‘長嶋’ 와 ‘長島’ 두 종류가 있으며(‘嶋와 ‘島’는 이체자) 모두 시기에 따라 본명으로 정식 사용됐다.
출생 당시의 호적상 표기는 ‘長嶋’였으며 프로 입단하기 전에는 그것에 따라서 ‘長嶋’라고 표기하는 언론과 당용한자로 대치해 ‘長島’라고 표기하는 언론이 혼재하고 있었다.[126] 하지만 1958년 프로에 입단할 당시에 기자 클럽과 본인의 합의에 의해서, 보도할 때는 표기가 간단한 ‘長島’로 통일하기로 결정했다.[126] 본인도 입단 초에는 ‘長嶋’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 후에는 현역 선수로 있는 동안 일관되게 ‘長島’를 팬들에게 사인할 때에 사용하게 됐다.[127] 더욱이 《거인의 별》이나 《도카벤》 등과 같은 창작물들이 대다수는 ‘長島’라고 표기했다.
한편 구단 측 담당자에 의하면 현역 시절 구단의 공식 명단에는 1964년부터 1965년에만 신문사의 요청에 따라 ‘長島’라는 표기를 사용했지만 그 외의 연도는 ‘長嶋’ 로 표기했었다고 밝혔다.[127] 실제로 구장 전광판에는 ‘長島’ 뿐만이 아니라 ‘長嶋’를 사용한 적도 있어서 은퇴 경기를 치른 고라쿠엔 구장에서도 ‘長嶋’를 표기했다.[128]
은퇴 후 1992년 시즌 종료 후 두 번째 감독 취임이 결정됐을 때 본인의 요청에 따라 ‘長嶋’라고 표기했다. 문화훈장 수상자 발표 당시 주무 부처인 문부과학성 대신관방 인사과에 의한 발표에서는 본명(長島)으로 표기했고 예명 등에서는 ‘長嶋’로 병기됐다.
나가시마는 ‘미스터 타이거스’(나가시마가 동경했던 야구 선수인 후지무라 후미오 및 나가시마의 라이벌인 무라야마 미노루의 칭호)를 본떠 ‘미스터 자이언츠’(ミスタージャイアンツ)라는 별명이 현역 시절부터 널리 쓰였다. 현역 은퇴 후에는 이미 요미우리뿐만이 아니라 프로 야구를 상징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요미우리팬 이외의 야구팬들로부터 그 업적을 칭찬받아 ‘미스터 프로 야구’(ミスタープロ野球), 혹은 단지 ‘미스터’(ミスター)라고도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팀 동료들로부터는 나가시마의 ‘長’을 음독한 ‘쵸 상’(チョーさん)이라는 애칭으로 친분을 쌓았다. 그 외에 ‘허리케인’(ハリケーン), ‘불타는 남자’(燃える男), ‘황실남’(皇室男) 등이 있고, 고등학생 시절에는 자신의 출신지인 군명과 출신지 근처에 있는 사쿠라 지구의 명소 중 하나인 인바 늪을 본뜬 ‘인바’(インバ) 등 다수 있다.
나가시마는 천진난만하고 대범한 성격으로 묘사되며, 진지하고 신경질적인 오 사다하루와는 대조적이라고 얘기되는 경우가 많지만 가까운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실은 정반대라고 한다.[129]
자신의 성격에 대해 나가시마는 “성급하긴 하지만 일을 내팽개치지는 않는다.[5] 내던지지 않고 한 걸음씩 차근차근 계속하는 게 습관화돼 있다.[5] 매일 조금씩이라도 쌓아 올려가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5]”라고 말했다.
좌우명은 ‘쾌타세심’(快打洗心)인데, 도비타 스이슈의 ‘일구입혼, 쾌타세심’(一球入魂、快打洗心)에서 빌려온 것으로 현역 시절에는 사인을 내릴 때 이 말을 덧붙이는 때가 많았지만 감독 시절의 사인에는 ‘쾌타’를 떼고 ‘세심’ 또는 ‘세’까지 떼고 ‘심’이라는 말을 사인에 덧붙이곤 했다.
릿쿄 대학 감독인 스나오시 구니노부로부터 배운 메이저류의 ‘개성의 중시’, ‘고객에게 평가받는 자신의 야구 스타일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는 사고 방식에 영향을 받았고 야구 인생을 통해서 주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자신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항상 생각했다.[130] 메이저 리그의 간판 타자였던 조 디마지오의 팬이었으며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프로 의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117]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은 니노미야 손토쿠(긴지로)[5]인데 나가시마가의 마당에는 니노미야 긴지로의 석상이 있다.[5] 나가시마에 따르면 “호우 피해 관련 뉴스를 신문과 TV에서 보고 한숨 지으며 집 마당에 눈길을 주면 긴지로의 석상이 눈에 들어온다.[5] 그 모습을 보고 분발하고 있다[5]”라고 말했다.
1961년 10월 3일자 아사히 신문의 ‘내가 기자라면’이라는 인터뷰 기사에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이 실리면서 물의를 빚었다.
“ |
뭐니뭐니해도 저희는 보수당 편이니까요. 사회당 천하가 되면 야구, 야구하면서 그쪽에 신경 쏟을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니까요. (진심으로 그렇게 여기는 말투)하지만 이쪽만 활성화된다고 완전 틀려먹었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죠?[주 40] |
” |
평범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독특한 감각을 지녔기에 이와 관련되는 에피소드가 가장 많다. 이러한 에피소드에는 신빙성이 다소 부정확한 것들도 포함된다.[주 41]
대화에 있어서는 화법도 상당히 독특해서 현역 시절에는 이미 한 문장 안에 주어와 술어가 몇 번씩 되풀이되고 이야기가 끊어지는 곳 없이 줄줄 이어지는 화법을 구사했는데 취재 기자들은 이를 두고 ‘나가시마 화법’(長嶋話法)이라고 칭했다. 감독 시절에는 ‘으응’(うーん), ‘그래’(ええ), ‘이른바’(いわゆる), ‘하나의’(ひとつの) 등의 말을 즐겨 사용했고 말과 말 사이에 틈을 두게 됐다. 1981년 오토모 고헤이에게 한 말에 따르면 “무심코 한 발언으로 여러 사람한테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 오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말을 자꾸 고르다 보니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됐다”라고 말했다.[131]
남의 이름을 기억하는 게 불안정(친한 사람의 이름도 잊어버리는 한편, 딱 한 번 만났을 뿐인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는 식)한가 하면 속담을 잘못 인용하거나 이중 표현 등을 자주 쓰는 통에 처음 들어서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대화 자체보다는 바디랭귀지로 커뮤니케이션을 취하는 유형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봐도 알게 되는 의미 없는 블록 사인(이 중 유명한 것으로 번트 블록 사인을 냈을 때, 마지막에 번트 자세를 하고 있었다)을 내보내는 일이 간혹 있었다. 1979년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와의 원정 경기 당시 자신이 낸 사인을 그날 주부닛폰 방송에서 해설을 맡고 있던 반도 에이지에게서 간파돼 방송 중에 지적된 일도 있었다.[주 42]
또한 그 독특한 감각은 선수 시절이나 일상 생활 뿐만 아니라 은퇴 후에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제1차 감독 퇴임 후인 평론가 시절에 슬럼프에 시달려 전화로 조언을 해달라는 가케후 마사유키와, 그리고 제2차 감독 퇴임 후에는 뉴욕 양키스로 이적했던 마쓰이 히데키에 대해서는 국제전화로 그 자리에서 배트로 휘두르게 하여 그 휘두르는 소리를 전화너머로 듣고 타격 지도를 한 적이 있어서 두 사람 모두 은퇴 후에 가장 인상에 남았던 에피소드를 나가시마의 전화 지도를 꼽았다. 한편, 감각을 중시하기 때문에 의음을 많이 사용하는 야구 이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선수도 적지 않아서 은퇴 후에 나가시마가 지도했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선수도 있다.
선수로서의 실력은 물론이고 연습에 대한 자세도 진지해, 노무라 가쓰야로부터 “나가시마와 사다하루의 연습하는 자세는 본보기가 된다”라고 말했다.[132]
생가는 농가였고[5] 아버지는 우스이정 사무소의 회계 담당 책임자나 조역을 맡고 있었지만 1954년에 급사했다. 당시 아버지의 사인을 두고 심장병으로 사망했는지, 뇌일혈로 사망했는지에 대한 관련 문헌이 나오기도 했다. 어머니는 1994년 7월 9일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1964년 10월, 오 사다하루와 함께 호치 신문이 ‘ON 올림픽을 간다’라는 기획으로 도쿄 올림픽의 컴패니언 몇 사람과 대담을 나누고 있을 때 그 중 나가시마 아키코(본명 니시무라 아키코)에게 첫 눈에 반하여 같은 해 1964년 11월 26일에 약혼,[133] 이듬해인 1965년 1월 26일에 결혼해 2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가정을 교육면에서 칸막이 역할을 하고 있던 아키코는 2007년에 만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장남 나가시마 가즈시게는 전 프로 야구 선수이며 탤런트로 활동 중이고, 차녀 나가시마 미나는 스포츠 캐스터, 차남·나가시마 마사오키는 카레이서로 활동하다가 현재 환경운동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가즈시게에 의하면 일가족 6명이 모여서 여행이나 같이 식사한 적은 없어서 그것이 나가시마 집안에 있어서는 보통이었다고 말했다.[134] 나가시마 일가는 ‘야구계의 로열 패밀리’라고 불릴 정도로 압도적인 지명도를 가졌다.[135]
그 후 공식 석상에서는 시게오 본인과 아키코·가즈시게는 ‘長嶋’를, 미나·마사오키는 ‘長島’라는 표기를 사용하게 됐다.[136]
취미가 다양한데 릿쿄 대학 4학년 때 요도가와 나가하루가 편집장으로 있는 《영화의 벗》과의 인터뷰를 한 적 있다. 그 인터뷰에서는 ‘최근에 본 영화’로 엘리아 카잔 감독의 《군중 속의 얼굴》,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저항》 등을 꼽았다. 특히 《저항》은 심리 묘사가 철저한 이색작으로 요도가와가 “스포츠 선수가 이런 영화를 선택하다니”라고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더욱이 영화 취향에 대해서는 “달달한 영화는 꼭 낮은 아웃 코스로 들어오는 볼 같아서 나로서는 힘들다. 천성에 맞지 않다”라고 말했다.[144]
그 밖의 취미로는 독서(현역 시절에는 역사 소설이나 전기 소설, 감독 시절에는 관리학 관련 서적과 확률론 서적 등), 그림 감상(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좋아함), 쇼기 등이 있는데 쇼기에 관해서는 나카하라 마코토로부터 명예 3단 증서를 수여받은 것 외에도 1995년에 후지 TV의 특별 프로그램 기획으로 하부 요시하루와 대담을 가졌을 때에 하부로부터 명예 5단의 증서를 수여받았다.[145]
1997년 봄, NHK 아나운서인 우도 유미코와 만났을 때 ‘《NHK 뉴스 오하요 닛폰》(당시 우도가 메인 캐스터를 맡고 있었다)을 잘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146]
2003년까지 시부야에 있던 도큐 문화 회관 3층(현재는 ‘시부야 히카리에’가 있다)에는 나가시마의 단골 이발소인 ‘문화 이발실’이 있었다. 도큐 문화 회관이 폐관된 후 문화 이발실은 오타구 기타센조쿠로 이전했다. 상호명은 변함없었고 나가시마도 이 곳을 방문하고 있다.
1959년 6월 25일 천황 참관 경기에서 끝내기 홈런을 터뜨린 나가시마였지만 이때 그 끝내기 홈런을 맞은 투수는 당시 한신의 대졸 신인이자 나중에 ‘2대째 미스터 타이거스’라고 불리게 된 무라야마 미노루였다. 이 경기 이후 두 사람과의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고 TV 등을 비롯한 언론에서는 ‘쇼와의 명승부’ 등이라고 자주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1966년 6월 8일, 무라야마는 앞으로 4개만 달성하면 통산 1500탈삼진 기록을 앞둔 시점에 “1500개의 탈삼진은 나가시마로부터 잡겠다”라고 선언했다. 한편, 나가시마는 경기를 앞두고 “번트를 해서라도 삼진은 하지 않는다”라고 보도진에게 말하기도 했다.[147] 무라야마는 5이닝까지 3개의 삼진을 뺏어냈고 6회초에 나가시마는 무라야마와 상대하여 2스트라이크 1볼의 볼카운트에서 4구째인 포크볼을 헛스윙 삼진을 당해 2구째와 4구째에 두 차례나 스윙을 했지만 삼진을 당한 4구째의 스윙을 하다가 헬멧이 벗겨졌다. 나가시마는 경기 종료 후 “저것은 칠 수 없어도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해 기록을 달성한 무라야마에 대해서 경의를 나타냈다. 무라야마는 그 후 1969년 8월 1일에 개인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해 이 기록은 나가시마로부터 삼진을 빼앗았다.
두 사람은 현역 시절에 서로 대화나 의견을 주고 받진 않았지만 현역 은퇴 후 의기투합하고 서로 ‘쵸 상’(チョーさん), ‘무라 상’(ムラさん)이라고 불릴 정도의 가까운 사이가 됐다. 무라야마가 사망(1998년)한 이후 나가시마는 “그(무라야마)는 단 1개의 불공평한 공(빈볼)을 던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147]
대우가 언제쯤 달라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964년 8월 6일에 발생한 히로오카 다쓰로의 경기 도중 귀가 사건(히로오카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나가시마가 홈스틸을 감행했는데 이를 사인 플레이로 착각한 히로오카가 당시 감독이던 가와카미 데쓰하루에게 비난을 한 뒤 경기 중에도 불구하고 돌연 귀가한 사건) 이전에 이미 대우가 바뀌었다.
히로오카는 훗날 자신의 저서 《감독론》에서 당시의 플레이를 사인 플레이로 오해했다는 점, 예전에도 나가시마가 홈스틸을 하는 바람에 화가 났다는 점 등을 이야기하면서 나가시마의 특별 대우 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1985년 10월부터 일본 트라이애슬론 연맹의 회장을 맡아 매년 구마모토현 아마쿠사에서 열리고 있던 트라이애슬론 국제 대회의 스타터를 맡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대회의 스타트 지점인 혼도시(현: 아마쿠사시)에 있는 시영 히로세 공원 구장(1989년 완공)을, 1991년에 ‘나가시마 시게오 구장’(長嶋茂雄球場)으로 변경해 나가시마의 업적을 기리게 됐다.
또한 국민영예상 수상을 기념해서 사쿠라시가 시영 이와나 야구장을 ‘나가시마 시게오 기념 이와나 구장’(長嶋茂雄記念・岩名球場)이라는 새로운 구장명을 발표, 2013년 7월, 신 구장 이름의 명판 피로연과 시민 영예상의 시상식이 사쿠라시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148] 2017년 6월 4일에 리뉴얼 오픈했고[149] ‘나가시마 시게오 기념 이와나 구장’에서 개최된 2군 경기인 요미우리·지바 롯데전에 시구자로 나와 등번호 3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등장했다.[150][151]
1980년에 감독직에서 물러났지만 선수 시절의 업적과 활약상을 기려 그 후 고라쿠엔 구장이 폐장되는 1987년까지 3번 게이트는 ‘나가시마 게이트’(長嶋ゲート)라고 불리었다. 또한 고라쿠엔 구장이 폐장할 때는 선수 시절에 요미우리의 3루수로서 활약한 것에 것에서 고라쿠엔 구장의 3루 베이스도 기증됐다. 도쿄 돔이 완공된 후 이 게이트의 이름은 잠시 없어졌지만, 1998년에 개장 10주년을 기념하여 3번 게이트는 ‘나가시마 게이트’로서 부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화 중에 ‘이른바’(いわゆる), ‘하나의’(ひとつの), ‘자칫하면’(ややもすると) 등의 관용구가 들어갈 때가 많다.
일본어와 영어가 부자연스럽게 섞인, 혹은 굳이 영어로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영어로 하는 습관 때문에 ‘미스터 잉글리시’(ミスターイングリッシュ)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유명하다(예를 들면 ‘실패는 성공의 마더’(失敗は成功のマザー), 고등어를 ‘물고기 변에 블루’(さかなへんにブルー)[152]). 일설에 의하면 결혼 후에 집안에서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이러한 말투가 됐다고 한다.[153] 근육이 급격하게 수축했을 때를 표현한 ‘미트 굿바이’(ミートグッバイ) 등이라는 말도 있다.[154]
감각을 중시하여 ‘확 간다’(ガッといく) 등의 의음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다는 선수도 적지 않았지만 은퇴하고 나서 나가시마가 지도했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선수들도 있다.[155]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나가시마의 성대모사 대상으로 삼는 개그맨들도 많이 있다. 특히 나가시마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화제가 된 프리티 나가시마는 연예계에 입문했다.
또한 했던 말을 반복적으로 많이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158] 대표적인 표현은 아래와 같다.
연 도 |
소 속 |
경 기 |
타 석 |
타 수 |
득 점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홈 런 |
루 타 |
타 점 |
도 루 |
도 루 자 |
희 생 번 |
희 생 플 |
볼 넷 |
고 4 |
사 구 |
삼 진 |
병 살 타 |
타 율 |
출 루 율 |
장 타 율 |
O P S |
---|---|---|---|---|---|---|---|---|---|---|---|---|---|---|---|---|---|---|---|---|---|---|---|---|
1958년 | 요미우리 | 130 | 550 | 502 | 89 | 153 | 34 | 8 | 29 | 290 | 92 | 37 | 10 | 1 | 6 | 36 | 15 | 5 | 53 | 3 | .305 | .353 | .578 | .931 |
1959년 | 124 | 526 | 449 | 88 | 150 | 32 | 6 | 27 | 275 | 82 | 21 | 6 | 0 | 3 | 70 | 17 | 4 | 40 | 9 | .334 | .426 | .612 | 1.038 | |
1960년 | 126 | 524 | 452 | 71 | 151 | 22 | 12 | 16 | 245 | 64 | 31 | 12 | 0 | 2 | 70 | 32 | 0 | 28 | 8 | .334 | .422 | .542 | .964 | |
1961년 | 130 | 543 | 448 | 84 | 158 | 32 | 9 | 28 | 292 | 86 | 14 | 11 | 1 | 5 | 88 | 35 | 1 | 34 | 14 | .353 | .456 | .652 | 1.108 | |
1962년 | 134 | 584 | 525 | 69 | 151 | 38 | 5 | 25 | 274 | 80 | 18 | 7 | 0 | 3 | 51 | 7 | 5 | 61 | 14 | .288 | .354 | .522 | .876 | |
1963년 | 134 | 577 | 478 | 99 | 163 | 28 | 6 | 37 | 314 | 112 | 16 | 3 | 0 | 10 | 86 | 18 | 3 | 30 | 14 | .341 | .437 | .657 | 1.094 | |
1964년 | 133 | 566 | 459 | 81 | 144 | 19 | 6 | 31 | 268 | 90 | 13 | 2 | 0 | 6 | 96 | 15 | 5 | 34 | 8 | .314 | .433 | .584 | 1.017 | |
1965년 | 131 | 560 | 503 | 70 | 151 | 23 | 5 | 17 | 235 | 80 | 2 | 6 | 0 | 5 | 50 | 12 | 2 | 42 | 16 | .300 | .363 | .467 | .830 | |
1966년 | 128 | 543 | 474 | 83 | 163 | 31 | 3 | 26 | 278 | 105 | 14 | 7 | 0 | 8 | 58 | 14 | 3 | 39 | 17 | .344 | .413 | .586 | .999 | |
1967년 | 122 | 515 | 474 | 65 | 134 | 25 | 3 | 19 | 222 | 77 | 2 | 3 | 0 | 3 | 37 | 4 | 1 | 37 | 24 | .283 | .334 | .468 | .802 | |
1968년 | 131 | 569 | 494 | 80 | 157 | 21 | 4 | 39 | 303 | 125 | 8 | 3 | 1 | 5 | 66 | 12 | 3 | 74 | 19 | .318 | .398 | .613 | 1.011 | |
1969년 | 126 | 546 | 502 | 71 | 156 | 23 | 2 | 32 | 279 | 115 | 1 | 1 | 0 | 4 | 38 | 1 | 2 | 58 | 15 | .311 | .359 | .556 | .915 | |
1970년 | 127 | 525 | 476 | 56 | 128 | 22 | 2 | 22 | 220 | 105 | 1 | 2 | 0 | 9 | 40 | 1 | 0 | 52 | 15 | .269 | .320 | .462 | .782 | |
1971년 | 130 | 547 | 485 | 84 | 155 | 21 | 2 | 34 | 282 | 86 | 4 | 3 | 0 | 1 | 59 | 8 | 2 | 45 | 20 | .320 | .395 | .581 | .976 | |
1972년 | 125 | 520 | 448 | 64 | 119 | 17 | 0 | 27 | 217 | 92 | 3 | 2 | 0 | 8 | 63 | 11 | 1 | 34 | 23 | .266 | .352 | .484 | .836 | |
1973년 | 127 | 530 | 483 | 60 | 130 | 14 | 0 | 20 | 204 | 76 | 3 | 2 | 1 | 8 | 37 | 3 | 1 | 35 | 20 | .269 | .318 | .422 | .740 | |
1974년 | 128 | 476 | 442 | 56 | 108 | 16 | 1 | 15 | 171 | 55 | 2 | 1 | 1 | 4 | 24 | 0 | 5 | 33 | 18 | .244 | .288 | .387 | .675 | |
통산: 17년 | 2186 | 9201 | 8094 | 1270 | 2471 | 418 | 74 | 444 | 4369 | 1522 | 190 | 81 | 5 | 90 | 969 | 205 | 43 | 729 | 257 | .305 | .379 | .540 | .919 |
연 도 |
연 령 |
리 그 |
타 율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홈 런 |
타 점 |
도 루 |
출 루 율 |
---|---|---|---|---|---|---|---|---|---|---|
1958 | 22 | 센트럴 리그 | 2위 | 1위 | 1위 | 2위 | 1위 | 1위 | 2위 | 5위 |
1959 | 23 | 1위 | 1위 | 2위 | 11위 | 3위 | 4위 | 7위 | 1위 | |
1960 | 24 | 1위 | 1위 | 8위 | 1위 | 7위 | 6위 | 2위 | 1위 | |
1961 | 25 | 1위 | 1위 | 1위 | 2위 | 1위 | 2위 | 8위 | 1위 | |
1962 | 26 | 5위 | 1위 | 1위 | 3위 | 2위 | 2위 | 3위 | 6위 | |
1963 | 27 | 1위 | 1위 | 2위 | 1위 | 2위 | 1위 | 9위 | 2위 | |
1964 | 28 | 4위 | 6위 | 19위 | 4위 | 3위 | 4위 | 12위 | 2위 | |
1965 | 29 | 5위 | 2위 | 4위 | 3위 | 8위 | 2위 | - | 4위 | |
1966 | 30 | 1위 | 1위 | 2위 | 10위 | 2위 | 2위 | 7위 | 2위 | |
1967 | 31 | 12위 | 6위 | 6위 | 11위 | 9위 | 6위 | - | 14위 | |
1968 | 32 | 2위 | 1위 | 13위 | 10위 | 3위 | 1위 | 16위 | 2위 | |
1969 | 33 | 3위 | 1위 | 5위 | 11위 | 4위 | 1위 | - | 5위 | |
1970 | 34 | 10위 | 5위 | 6위 | 15위 | 5위 | 1위 | - | 12위 | |
1971 | 35 | 1위 | 1위 | 4위 | 15위 | 2위 | 2위 | - | 2위 | |
1972 | 36 | - | 16위 | 19위 | - | 4위 | 3위 | - | 11위 | |
1973 | 37 | 13위 | 9위 | 20위 | - | 6위 | 4위 | - | 19위 | |
1974 | 38 | - | - | 18위 | - | 18위 | 14위 | - | - |
연도 | 소속 | 3루 | 유격 | 외야 | |||||||||||||||
---|---|---|---|---|---|---|---|---|---|---|---|---|---|---|---|---|---|---|---|
경 기 |
척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 비 율 |
경 기 |
척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 비 율 |
경 기 |
척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 비 율 | ||
1958 | 요미우리 | 130 | 129 | 385 | 25 | 31 | .954 | - | - | ||||||||||
1959 | 123 | 103 | 370 | 15 | 25 | .969 | - | - | |||||||||||
1960 | 123 | 92 | 362 | 19 | 30 | .960 | 10 | 14 | 24 | 2 | 4 | .950 | - | ||||||
1961 | 129 | 125 | 369 | 16 | 30 | .969 | 8 | 12 | 17 | 1 | 4 | .967 | - | ||||||
1962 | 134 | 120 | 341 | 15 | 29 | .968 | - | 1 | 0 | 0 | 0 | 0 | .--- | ||||||
1963 | 132 | 114 | 374 | 13 | 33 | .974 | - | - | |||||||||||
1964 | 133 | 118 | 385 | 16 | 30 | .969 | - | - | |||||||||||
1965 | 131 | 117 | 317 | 14 | 24 | .969 | - | - | |||||||||||
1966 | 127 | 109 | 314 | 14 | 20 | .968 | - | - | |||||||||||
1967 | 121 | 88 | 274 | 13 | 29 | .965 | - | - | |||||||||||
1968 | 131 | 111 | 285 | 19 | 31 | .954 | - | - | |||||||||||
1969 | 126 | 109 | 305 | 12 | 22 | .972 | - | - | |||||||||||
1970 | 127 | 88 | 256 | 19 | 8 | .948 | - | - | |||||||||||
1971 | 129 | 79 | 262 | 14 | 21 | .961 | - | - | |||||||||||
1972 | 124 | 103 | 237 | 10 | 28 | .971 | - | - | |||||||||||
1973 | 127 | 96 | 279 | 12 | 25 | .969 | - | - | |||||||||||
1974 | 125 | 66 | 210 | 15 | 18 | .948 | - | - | |||||||||||
통산 | 2172 | 1767 | 5325 | 261 | 434 | .965 | 18 | 26 | 41 | 3 | 8 | .957 | 1 | 0 | 0 | 0 | 0 | .--- |
경 기 |
타 수 |
득 점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홈 런 |
루 타 |
타 점 |
도 루 |
도 루 자 |
희 생 번 |
희 생 플 |
볼 넷 |
고 4 |
몸 맞 |
삼 진 |
병 살 타 |
타 율 |
---|---|---|---|---|---|---|---|---|---|---|---|---|---|---|---|---|---|---|
43 | 150 | 21 | 47 | 10 | 0 | 7 | 78 | 21 | 8 | 3 | 0 | 1 | 17 | 0 | 0 | 13 | 6 | .313 |
경 기 |
타 수 |
득 점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홈 런 |
루 타 |
타 점 |
도 루 |
도 루 자 |
희 생 번 |
희 생 플 |
볼 넷 |
고 4 |
몸 맞 |
삼 진 |
병 살 타 |
타 율 |
---|---|---|---|---|---|---|---|---|---|---|---|---|---|---|---|---|---|---|
68 | 265 | 49 | 91 | 14 | 2 | 25 | 184 | 66 | 3 | 6 | 0 | 3 | 27 | 1 | 1 | 21 | 5 | .343 |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1975년 | 요미우리 | 6위 | 130 | 47 | 76 | 7 | .382 | 27 | 117 | .236 | 3.53 | 39세 |
1976년 | 1위 | 130 | 76 | 45 | 9 | .628 | - | 167 | .280 | 3.58 | 40세 | |
1977년 | 1위 | 130 | 80 | 46 | 4 | .635 | - | 181 | .280 | 3.48 | 41세 | |
1978년 | 2위 | 130 | 65 | 49 | 16 | .570 | 3 | 136 | .270 | 3.61 | 42세 | |
1979년 | 5위 | 130 | 58 | 62 | 10 | .483 | 10.5 | 154 | .259 | 3.85 | 43세 | |
1980년 | 3위 | 130 | 61 | 60 | 9 | .504 | 14 | 153 | .243 | 2.95 | 44세 | |
1993년 | 3위 | 131 | 64 | 66 | 1 | .492 | 16 | 105 | .238 | 3.22 | 57세 | |
1994년 | 1위 | 130 | 70 | 60 | 0 | .538 | - | 122 | .258 | 3.41 | 58세 | |
1995년 | 3위 | 131 | 72 | 58 | 1 | .554 | 10 | 139 | .252 | 3.40 | 59세 | |
1996년 | 1위 | 130 | 77 | 53 | 0 | .592 | - | 147 | .253 | 3.47 | 60세 | |
1997년 | 4위 | 135 | 63 | 72 | 0 | .467 | 20 | 150 | .251 | 3.69 | 61세 | |
1998년 | 3위 | 135 | 73 | 62 | 0 | .541 | 6 | 148 | .267 | 3.74 | 62세 | |
1999년 | 2위 | 135 | 75 | 60 | 0 | .556 | 6 | 182 | .265 | 3.84 | 63세 | |
2000년 | 1위 | 135 | 78 | 57 | 0 | .578 | - | 203 | .263 | 3.34 | 64세 | |
2001년 | 2위 | 140 | 75 | 63 | 2 | .543 | 3 | 196 | .271 | 4.45 | 65세 | |
통산: 15년 | 1982 | 1034 | 889 | 59 | .538 | A클래스: 12회, B클래스: 3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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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10시 경에 집에 도착하자, 나가시마는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유연 체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가시마는 나를 한 번 보자마자 ‘거기 앉아 있어’라고 말했다. (중략) 노트를 꺼내와서 ‘오늘 선발은 오이시일까, 오바일까’라고 혼잣말을 하고 이 두 사람과 지난번 상대했을 때의 볼배합을 연구하고 있었다. ‘1구째가 커브고 2구째가 슈토구나’라고 노트를 읽어가면서 예비지식을 넣는가 하면 벌떡 일어나 야구장에 갈 준비를 시작한 것이었다. (중략) 솔직히 말해서 ‘동물적인 느낌’이나 ‘천성의 자질’로 플레이한다고 말하고 있던 나가시마는 매일 노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야구를 하는 줄로만 생각했다.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다. 저 정점에 서있는 나가시마는 매일 경기 전에 필요한 준비를 하면서 야구에 임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빛나는 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깊이 반성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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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모토 가즈요시 저 《わが人生、わが野球道(Vol.15)》, ‘월간 The Carp’ 1992년 5월호(No.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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