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지타오
戴季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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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지타오 | |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고시원 원장 | |
임기 | 1931년 11월 30일 ~ 1932년 2월 29일 |
주석 | 장제스 (국민정부 국가주석) |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난징 총통부 사정비서관 | |
임기 | 1936년 11월 16일 ~ 1936년 12월 12일 |
주석 | 린썬 |
수상 | 장제스 행정원장 |
이름 | |
별명 | 본명은 다이촨셴(戴傳賢) 아명(兒名)은 다이량비(戴良弼) 자(字)는 쉬안탕(選堂), 지타오(季陶) 호(號)는 톈처우(天仇), 푸쿵(不空), 푸둥(不動)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90년 11월 26일 |
출생지 | 청나라 쓰촨성 더양 부 광한 현 한저우 구역 |
사망일 | 1949년 2월 21일 | (58세)
사망지 | 중화민국 광둥성 광저우 |
경력 | 중국국민당 선전부 부장 중국국민당 상임대표최고위원 |
정당 | 중국국민당 |
부모 | 아버지 다이샤오쉬안(戴小軒) |
배우자 | 초배 뉴여우헝(鈕有恒)[1] 계배 자오원수(趙文淑)[2] 측실 루루 미치코(津淵 美智子)[3] 측실 하야시 아이코(林 愛子)[4] 측실 시게마쓰 가네코(重松金子)[5] 측실 자오링이(趙令儀)[6] |
자녀 | 1남 1녀 적녀 다이자양(戴家洋) 서자 다이안궈(戴安國) |
친인척 | 친조부 다이롄(戴廉) 증조부 다이충제(戴崇節) 고조부 다이원톈(戴聞天) 5촌 종숙부 다이바오후이(戴寶輝) 6촌 재종제 다이촨차오(戴傳僑) 6촌 재종제 다이촨쩡(戴传曾) |
종교 | 불교 |
군사 경력 | |
복무 | 일본군, 국민혁명군 |
복무기간 | 1917년 ~ 1932년 |
근무 | 중화민국 고시원 |
최종계급 | 국민혁명군 육군 중령 |
지휘 | 중화민국 고시원 원장 |
주요 참전 | 중국 국민당 북벌 |
다이지타오(중국어: 戴季陶, 병음: Dài Jìtáo, 한자음: 대계도, 1890년 11월 26일 ~ 1949년 2월 21일)는 중화민국의 군인, 혁명가, 정치인, 저술가이다. 본명은 다이촨셴(중국어: 戴傳賢, 병음: Dài Chuánxián, 한자음: 대전현)이다.
아명은 다이량비(戴良弼)이고 자(字)는 쉬안탕(選堂), 지타오(季陶)이며 호(號)는 톈처우(天仇), 푸쿵(不空), 푸둥(不動)인데 그 가운데 톈처우(天仇)라는 호(號)는 "다이촨셴(戴傳賢) 자신은 청(淸) 제국과 불공지천대원수(不共地天大怨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타오는 청나라 쓰촨성 더양 부 광한 현 한저우 구역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저장성 후저우 부 우싱 구와 장쑤성 상하이와 광둥성 광저우를 거쳐 푸젠성 푸저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899년 일가족과 함께 청나라 허베이 성 톈진에 본격 이주하면서 그 후 톈진에서 성장하였다.
일본어에도 능통했던 지타오는 쑹아이링(宋藹齡), 쑹칭링(宋慶齡) 자매와 함께 쑨원(孫文)의 비서로 일하였으며, 장제스(蔣介石)와 절친한 친구 관계였다.
만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국부군이 공산당에게 패전되는 난처한 상황이 임박해진 가운데 1949년 2월 21일 광저우에서 휴양 중 갑자기 음독 자살하였다.
그의 유족들은 1949년 12월 27일을 전후하여 중국국민당의 일원들을 따라 타이완으로 이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