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쓰카 요지
戸塚洋二 | |
2003년 8월 15일,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에서 | |
출생 | 1942년 3월 6일 일본 시즈오카현 후지군 요시나가촌 후지오카(현: 후지시 후지오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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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8년 7월 10일[1] | (66세)
국적 | 일본 |
출신 학교 | 도쿄 대학 |
주요 업적 | 중성미자 진동을 연구 |
수상 | 니시나 기념상(1987년) 브루노 로시상(1989년)[주 1] 아사히상(1998년)[주 2] 파노프스키상(2002년) 벤저민 프랭클린 메달(2007년) |
분야 | 입자물리학 중성미자 천문학 |
소속 | 도쿄 대학 고에너지 가속기 연구 기구 |
박사 지도교수 | 고시바 마사토시 |
도쓰카 요지(일본어:
1960년에 시즈오카 현립 후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에 도쿄 대학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1972년에는 도쿄 대학 대학원 이학계 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도쿄 대학 이학부 교수를 거쳐 1988년에 도쿄 대학 우주선 연구소 교수를 역임했다.
1995년에는 가미오카 우주소립자 연구시설장으로 부임했고, 1997년부터는 도쿄 대학 우주선 연구소장, 이듬해 1998년에는 슈퍼 가미오칸데로 중성미자 진동을 확인하는 중성미자의 질량이 제로가 아님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2001년에 일어난 슈퍼 가미오칸데의 광전자 증배관의 70%를 손실하는 대규모 파손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2002년에는 고에너지 가속기 연구 기구 소립자 원자핵 연구소 교수로 부임했고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고에너지 가속기 연구 기구장을 맡았다. 2008년 7월 10일에 직장암으로 사망했다(향년 66세).
도쓰카는 200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고시바 마사토시의 애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고시바는 분게이슌주 2008년 9월호에 기고한 추모 문집 ‘제자의 조사를 읽는 통한’에서 도쓰카의 장례식 당시 조사를 낭독해 “앞으로 18개월, 네가 살아있었다면 국민 모두가 기뻐했을 것이다”라고 노벨상 수상을 기대받으며 세상을 떠난 것을 안타까워하며 밝혔다. 사후인 이듬해 2009년에 헤이세이 기초과학재단이 도쓰카의 공적을 기려 ‘도쓰카 요지상’을 창설했다.[3] 더욱이 역시 고시바 문하생 중의 한 명으로 도쓰카로부터 지도를 받은 인물이자, 제1회 ‘도쓰카 요지상’ 수상자이기도 한 가지타 다카아키가 2015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해 도쓰카가 이루지 못했던 비원을 실현시키게 됐다.[4]
통상적으로 높은 수준인 자연과학 연구에는 다수의 학자가 멤버로 참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노벨상의 자연과학 부문에서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대표자 3명까지 수상이 인정되곤 있지만, 2015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택된 것은 위에서 말한 가지타 다카아키와 아서 B. 맥도널드 등 두 사람 뿐이었다. 이는 본래대로라면 수상자 가운데 한 명으로 선택되었을 도쓰카를 위해서 스웨덴 왕립 과학원의 노벨상 선정위원회가 세 번째 수상자 자리를 일부러 공석으로 해둔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가지타도 NHK의 특별 프로그램에서 마찬가지로 생각한다고 밝혔다.[5][6][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