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동 東川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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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Dongcheon-dong |
행정 | |
국가 | 대한민국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
행정 구역 | 50통, 339반 |
법정동 | 동천동, 고기동 |
지리 | |
면적 | 16.5 km2 |
인문 | |
인구 | 49,650명(2022년 2월) |
인구 밀도 | 3,010명/km2 |
지역 부호 | |
웹사이트 | 동천동행정복지센터 |
동천동(東川洞)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속하는 행정동으로 동막리(東幕里)와 원천리(遠川里)를 병합해 동막(東幕)에서의 '동'자와 원천(遠川)에서의 '천'자를 따서 이름이 되었다.
이곳은 본래 용인군 수진면(水眞面)에 속한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동막리와 원천동을 합쳐 동천리가 되었고 2001년 12월 24일, 수지읍이 수지출장소로 승격, 동천동이 분할되었고 2006년 9월 1일, 주민센터가 설치되어 현재는 법정동으로 동천동, 고기동을 관할하고 있다.[1]
본래 용인군 수진면(水眞面) 지역이다. 고려시대 용구현(龍駒縣) 수진면(水眞面), 조선시대 태종 13년 용인현(龍仁縣) 수진면(水眞面)이었고 수진면에 속한 행정구역은 성복동(星福洞), 죽전동(竹田洞), 서봉동(瑞峯洞), 신리(新里), 정평리(停坪里), 동막리(東幕里), 손기리(孫基里), 고분현(古分峴)이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때 동막리(東幕里)와 원천동(遠川洞)을 합쳐 동막에서의 '동'자와 원천에서의 '천'자를 따서 동천리라 하였다. 동막은 광주군과 용인군의 경계가 되는 하천의 동쪽에 막을 지어 군 경계의 표시로 삼았다 해서 동막이라는 설이 있고, 병자호란 때 수많은 막사가 있었다 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은 용인군과 광주군의 경계인데 이곳에 지나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주막이 있었고, 동쪽으로 가는 주막이 있던 동네라고 불리던 것이 동막이 됐다는 것이다. 인조실록(仁祖大王實錄)에서는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일어난 수진면 머흐내(馬敵川) 고개, 험천(險川)으로 등장한다.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에서 발원하여 낙생저수지, 분당구 금곡동 동막골과 머내를 지나 탄천으로 유입되는 험천(險川) 또는 머흐내(마희천), 동막천에는 1636년 12월 27일 인조 14년 충청도감사 정세규(鄭世規)가 병사를 거느리고 머흐내 고개 험천(險川)에 도착한 뒤 형세를 이용해서 진을 쳤다가 청나라 군대의 습격을 받아 전군이 패몰했는데, 이 험천 전투는 당시 좌영장 최진립(崔震立), 우영장 심일민(沈逸民), 별장 황박(黃珀), 중군 이건(李楗), 참모관 이경선(李慶善), 방량차사원 이상재(李尙載), 군기차사원 김홍익(金弘翼), 심약(審藥) 이시량(李時亮)을 대동했지만 개전 도중 우영장 심일민(沈逸民)은 화살에 맞았고, 심일민을 제외한 권임길(權臨吉), 공주 영장(營將) 최진립(崔震立), 참모관 이경선(李慶善), 의병장 이민진(李敏進) 등은 모두 전사하였으므로 '이들을 표창하고 우영장 심일민(沈逸民)은 관직을 상으로 주게 하소서.'라는 상소문이 올라와 상이 따랐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해진다. 후일 1636년 인조 14년 조선 제4차 통신사행(通信使行) 부사(副使)로 참여했던 사간 김세렴(金世藏, 1593∼1646)의 해사록(海樣錄)에는 1637년 인조(仁祖) 15년 3월 8일 일기에서 ‘밝음. 새벽에 출발하였다. 용인에 닿으니 용인 현령 이명열(李命調)이 먼 마을로부터 보러 왔다. 용인 마희천(馬敵川=머흐내, 험천)에 이르니 시체가 쌓였고 피가 수십 리에 잇따라서, 말이 나아가지 못하였다. 충청도감사 정세규가 싸움에 진 곳인데 참 혹하고 슬픔을 말할 수 있겠는가! 신원에 이르니 인마가 나아갈 수 없고, 또 양재에 인가가 없다는 말을 듣고 마지못해 여기서 묵었다.'고 하였다. 1637년 인조 15년 4월 7일 예조(禮曹)의 청으로 험천의 시체를 수습하여 매장하고 충절과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다. 이후 1656년 효종(孝宗) 7년 5월 24일 예조에서 마희천(麻戱川) 전쟁터로 제사를 지냈고, 1668년 현종(顯宗) 9년에도 마희천 제사 여제등록(厲祭謄錄) 기록이 남아있다. 원천동은 현재 탄천으로 불리는 물길이 '험하다'를 의미하는 험천(險川)과 '머흐다'의 머흔천으로 불렸고 먼천 · 머내 · 모내 등으로 변형되어 다시 한자로 의역화되어 원천(遠川)으로 표기하였다. 『1872년지방지도』에도 험천 · 험천점막 등의 명칭이 보인다. 고기리(古基里)도 1914년 수진면(水眞面) 손기리(孫基里)와 고분현(古分峴) 일부를 합쳐 고분현의 '고'자와 손기리의 '기'자를 따서 고기리(古基里)라 하였다. 고분현(古分峴)은 한글로 고불현, 고분치(古分峙) · 곡현(曲峴) 등으로도 불리는데 의왕시로 넘어가는 과거 고갯길의 모양이 구불구불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2]
동천동의 인구는 49,030명이고 용인시의 4.0%를 차지한다. 남자는 24,185명, 여자는 24,845명이다. 동천동의 인구 구조는 일반적인 도시의 특징이 나타나서 유소년 인구 비율은 17.1%로 용인시 전체(16.1%)보다 높고 노인 인구 비율은 10.8%로 용인시 전체(12.2%)보다 낮다. [4]
고기동 배나무골(이곡)은 순조(純祖) 31년(1831) 어모장군행오위도총부도사(禦侮將軍行五衛都摠府都事) 이진영(李鎭英)이 낙향하고 집에 들어가자 그해 집 뒷편에 죽어있던 배나무가 배꽃을 피워 그 배를 순조에게 올려서 배꽃이 핀 지역을 배나무골(이곡)로 부르게 되었다.
수지읍 동천리에 딸린 마을 중의 하나로 동천식물원 앞에서 동천로 135번길 사이로 음성나환자들이 자급자족하는 염광농원이 있었는데 자활촌의 하나로 나환자를 위한 병원이 필요하여 설립하게 되었다. 나중에 이 병원은 피부병 전문병원으로 전국에 이름이 날 정도로 유명하게 되었다. 현재는 병원은 없어지고 가내공업과 가구단지와 용인동천 지구단위계획구역(최연규 조합장)으로 변경되었다.
그외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401-3번지에는 용인 보정동 고분군에 잔존한 고구려 석실분에 이어 약 10개의 연도를 갖춘 지상식 또는 반지하식 횡혈식 구조 고구려 석실분이 확인된다. 이들 무덤은 유실되거나 훼손되었지만 남아있는 형태에서 횡혈식 석실묘로 지상식과 반지하식으로 나뉘고, 모줄임식 천장구조와 벽체에 회칠흔 등 고구려 무덤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횡혈식 석실묘는 한 개의 봉분에 2개의 석실을 마련한 쌍실묘 등이 확인되고 있으며 추가장을 염두에 두고 무덤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단지명 | 건설사 | 시행사 | 주소 | 입주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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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샵 동천 포레스트 | 포스코이앤씨 | 일레븐건설㈜ | 수지구 동천로178번길 4 | 2018년 8월 | |
더샵 동천 이스트포레 | 2020년 3월 | ||||
동천파크자이 | 지에스건설㈜ | ㈜와이즈플래닝 | 2019년 7월 | ||
동천센트럴자이 | ㈜DSD삼호 | 수지구 고기로45번길 40-18 | 2019년 5월 | ||
동천자이 | 2018년 8월 | ||||
동천 디이스트 | 동문건설㈜ | 동문건설㈜ | 수지구 동천로 64 | 2007년 10월 | |
동천마을 6단지 동문굿모닝힐 | DMC건설㈜ | 수지구 동천로 53 | |||
동천리 삼성쉐르빌 | 삼성중공업 | ㈜유영건설 | 2000년 9월 | ||
보뜨랑마을 벽산블루밍 | 벽산건설 | 벽산동천주택조합 | 수지구 신수로783번길 50 | 2004년 11월 | |
동천마을 1단지 현대홈타운 | 현대건설 | 수지동천현대연합주택조합 | 수지구 수지로 487 | 2002년 4월 | |
동천마을 2단지 현대홈타운 | 서산주택 | 수지구 동천로63번길 10 | |||
수진마을 1단지 써니밸리 | 이테크이엔씨㈜ | 한국토지신탁 | 2004년 1월 | ||
수진마을 5단지 신명스카이뷰 | 신명종합건설㈜ | ||||
수진마을 3단지 우미이노스빌 | ㈜우미토건 | ㈜우미종합건설 | 수지구 손곡로 67 | ||
동천역 센트럴 아이파크 | ㈜효성, 현대산업개발 | 수지구 손곡로 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