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나가 히사히데 松永久秀 | |
타이헤이키에이유우 14: 마쓰나가 단쇼 히사히데」(오치아이 요시키 1867년 작) | |
담쟁이 | |
무사 정보 | |
시대 | 센고쿠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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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에이쇼 5년(1508년) 또는 에이쇼 7년(1510년) |
사망 | 덴쇼 5년 음력 10월 10일(1577년 11월 19일) |
별명 | 마쓰나가 단조 |
계명 | 妙久寺殿祐雪大居士 |
막부 | 무로마치 막부 |
주군 | 미요시 나가요시 → 요시쓰구 → 오다 노부나가 |
관위 | 종4위, 야마시로 탄정대 |
씨족 | 마쓰나가씨(자칭 후지와라, 미나모토씨) |
형제자매 | 동생: 나가요리 |
배우자 | 정실: 마쓰나가 뇨보(미요시 나가요시의 딸) 계실: 히로하시 야스코(히로하시 가네히데의 딸) |
자녀 | 히사미치 등 |
마쓰나가 히사히데(일본어: 松永久秀, 에이쇼 5년(1508년) 또는 에이쇼 7년(1510년) ~ 덴쇼 5년 음력 10월 10일(1577년 11월 19일))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 야마토의 센고쿠 다이묘이다.
부모에 대해서는 누구인지 알지 못 한다. 처는 미요시 나가요시의 딸이다. 출신에 관해서는 아와국, 야마시로국 니시오카, 셋쓰국의 토호출신등 여러설이 있다. 처음에는 후지와라씨라 지칭했지만, 에이로쿠 4년(1561년)부터 미나모토씨라 자칭한다. 소다이는 히사히데의 관위로 있는 단쇼추의 해당하는 당나라 관제의 명칭이다.
처음 미요시 나가요시를 모시지만, 미요시씨 내부에서 실력을 쌓아, 나가요시 사후에는 미요시가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져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살해하고, 기나이를 지배한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가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기 위해 상경하자, 노부나가에 항복하고 그의 가신이 된다. 그 후, 노부나가에 반역하지만, 패해 폭사했다고 한다.
하극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센고쿠 무장으로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 암살과 도다이지 불전소실의 주모자로 알려져있다. 진중에서는 여색을 밝히는 등, 교활하고 오만불손한 난세의 효웅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한편, 미남으로 우아한 행동거지와 연가와 다도에 뛰어난 교양인으로 알려져있고, 자신의 영지에 대해서는 선정을 배풀어 명군으로써 알려져 있고, 시키산성 근교의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공덕을 기리고 있다.
에쇼 7년(1510년)에 태어난다. 히사히데의 생애전반은 불명확 점이 많다. 출신에 관해서 아와국, 야마시로국 니시오카, 셋쓰국의 토호출신이거나 상인출신이다. 그러나 상인출신이라면, 히사히데와 동세대인 사이토 도산도 히사히데와 같은 삶을 살아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같다. 속설에는 히사히데와 도산은 예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덴분 9년(1540년)부터 호소가와씨의 가신 미요시 나가요시의 서기로 일한다.
덴분 18년(1549년) 나가요시가 호소가와 하루모토,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추방하고 교토를 지배하자, 나가요시를 따라 상경하고, 미요시가의 필두 가노가 된다. 단쇼추에 임관되어, 소다이라고 불리었다. 나가요시는 히사히데의 재능을 조기에 파악해서 후에 자신의 딸과 결혼시킨다.
그 후 나가요시를 따라 막부정치에 관여하고, 나가요시가 기나이를 평정한 덴분 22년(1553년)에 셋쓰 다키야마 성에 성주로 임명되고 에로쿠 2년(1559년) 야마토국 시기산 성으로 옮겨 거성으로 삼는다. 에로쿠 3년(1560년) 고후쿠지를 격파하고 야마토국을 통일한다. 한편으로는 나가요시의 적자 미요시 요시오키와 함께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요직에 임명되어 종사위하 단조쇼히쓰(단정소필)에 위계된다. 에로쿠 5년(1562년) 다몬야마 성을 축성해 이주한다.
이 같이 히사히데는 나가요시의 신뢰를 얻어 세력을 키우고 있었지만, 주군 나가요시의 동생 소고 가즈마사와 미요시 요시카타의 불의의 죽음, 게다가 적자 요시오키의 죽음 등 불행이 거듭어 해마다 기력을 잃게 되었다. 소고 가즈마사와 미요시 요시카타에 관해서는 히사히데에 의한 암살이라 전해지지만, 추측에 불과하다. (통설에서는 가즈마사는 낙마에 따른 부상, 요시오키는 병사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나가요시의 통솔력 저하는 히사히데의 세력확대를 더욱더 부추긴다. 히사히데는 주가의 실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나가요시의 동생 아타기 후유야스를 나가요시에 참언을 해 모살한다. 후유야스의 죽음으로 미요시가는 히사히데와 대등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히사히데는 주가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에로쿠 7년(1564년)에 나가요시가 죽자, 히사히데는 나가요시의 양자 미요시 요시쓰구를 주군으로 앉히고 괴뢰화시킨다. 이로써 미요시 산닌슈와 함께 미요시가를 좌지우지하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나가요시 사후, 미요시 산닌슈와 함께 미요시 요시쓰구의 후견인이 되고, 에로쿠 8년(1565년)에는 막부 정치를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해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암살한다. (에이로쿠의 변). 그리고, 요시테루 사후, 로마 가톨릭교회 선교사를 추방한다.
이렇게해서 기나이를 통치하게 되었지만, 같은 해 동생 마쓰나가 나가요리가 단바에서 아카이 나오마사에 패해 전사한다. 더욱이 에로쿠 9년(1566년) 기나이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미요시 산닌슈와 대립하게 된다. 이 산닌슈와의 전투에서 히사히데는 에로쿠 10년(1567년)에 미요시 산닌슈와 그의 동맹자 쓰쓰이성의 성주 쓰쓰이 준케와의 가미시바 전투에서 협격을 받아 패하게 된다. (가미시바 전투)
10월, 미요시 산닌슈가 농성하고 있는 도다이지를 공격해 대불전을 불태워 버린다. 그러나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미요시 측의 가톨릭 신자가 방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일설에는 히사히데군의 장병이 산닌슈의 군세와 싸울 때, 승리에 취해 불을 냈다고 전해진다).
에로쿠 11년(1568년) 9월, 오다 노부나가가 상경해오자, 재빨리 항복하고 명다기라 불리는 [쓰쿠모카미나스]를 보내 순응의 뜻을 나타낸다. 이 때문에 야마토 일국에 안도되었다. 겐키 원년(1570년), 노부나가의 아사쿠라 요시카게 토벌에 참가하고, 노부나가가 제부 아자이 나가마사의 배신으로 어쩔 수 없이 철퇴를 하자, 노부나가와 함께 행동을 같이 해, 오미 구쓰키다니의 영주 구쓰키 모토쓰나를 설득해 우군으로 많들어 궁지를 탈출했다.
그 후에도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이시야마 혼간지 공격에 참가하는등 노부나가에 충성을 보이는 듯했지만, 노부나가 포위망이 결성되자,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포위망의 한축을 담당한다. 겐키 4년(1573년) 3월에는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동맹을 맺고 노부나가의 배후를 치지만, 4월 노부나가 최대의 강적 다케다 신겐이 병사하고 다케다 군은 가이로 철퇴한다. 이렇게 해 노부나가는 위기를 탈출하고 반격하기 시작한다. 7월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추방하고 막부를 멸망시킨다. 덴쇼 원년(1573년) 11월에 미요시 요시쓰구가 가와치 와카에성에서 전사하자, 다몬야마성을 내주고 다시 노부나가에 항복한다.
그 후에 노부나가를 따라 이시야마 혼간지 공격에 참가하지만, 덴쇼 5년(1577년) 다시금 노부나가 포위망이 결성되자, 그에 호응해 노부나가의 명령을 무시하고 혼간지 공격에서 멋대로 이탈한다. 그리고, 야마토 시기산성에서 농성한다.
노부나가의 적자 오다 노부타다를 총대장으로 해 대군을 이끌고 10월에 시기산성을 포위한다. 이때 노부나가는 히사히데가 소유한 명기 [고텐묘히라구모]를 바치면 목숨은 살려준다고 했지만, 히사히데는 거절한다. 이 때문에 노부나가에게 인질로 보냈던 자식 둘은 교토 로쿠조가와라에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10월 10일 (11월 19일)에 오다 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히라구모를 천수각에서 산산조각을 내고 자신은 폭사했다고 하는데 다기에 폭약을 넣고 자폭했다고도 전해진다. 향년 68세.
기묘하게도 그날은 10년 전 도다이지 대불전을 불태웠던 날과 같은 날로 머리무덤은 나라현 기타카쓰라기군 오지초의 다루마지에 존재한다.
묘소: 교토시 시모교구 妙恵会総[모호한 표현]묘지. 나라현 기타카쓰라기군 오지초 다루마지. 나라현 이코마군 산고초에 공양탑이 있다.
정실은 미요시 나가요시의 딸이다. 적자는 히사미치. 양자로는 마쓰나가 나가타네, 또 동생으로는 나가요리가 있다. 딸은 이세 사다요시의 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