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두드 아흐메드
মওদুদ আহমেদ | |
무두드 아흐메드(2012년) | |
방글라데시의 제8대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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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88년 3월 27일~1989년 8월 12일 |
대통령 | 후세인 무하메드 에르샤드 |
전임 | 미자누르 라흐만 초드리(제7대) |
후임 | 카지 자파르 아흐메드(제9대)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40년 5월 24일 |
출생지 | 영국령 인도 노아칼리구 |
사망일 | 2021년 5월 16일 | (80세)
사망지 | 싱가포르 |
국적 | 방글라데시 |
정당 |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 |
배우자 | 하스나 자시무딘 무두드 |
무두드 아흐메드(벵골어: মওদুদ আহমেদ, 1940년 5월 24일~2021년 5월 16일)는 방글라데시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의 상임위원이었다.[1] 아흐메드는 노아칼리 1번과 노아칼리 5번 선거구에서 총 5차례 자티요 상샤드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아흐메드는 독립 후 방글라데시의 우체국장으로 일했다. 1980년대부터 방글라데시 정부에서는 부총리(1976년~1978년, 1987년~1988년), 방글라데시의 총리(1988년~1989년), 방글라데시의 부통령(1989년~1990년), 법무·의회 장관(2001년~2006년) 등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정치 직책을 역임했다.
아흐메드는 1940년 영국령 인도에 노아칼리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맘타주딘 아흐메드는 수피즘 이슬람 학자이자 다카의 이맘이었다. 아흐메드는 다카 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2] 그는 1966년 런던의 링컨 여관에 있는 잉글리시 바에 불려갔다.[2]
영국에 있는 동안, 아흐메드는 방글라데시 독립을 구상하는 데 있어 동파키스탄 학생들 사이에서 증가하는 지적 운동의 일부였다.[3] 다카로 돌아온 그는 1968년 아가르탈라 음모사건 재판에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법무팀에 합류했다. 그는 1969년 아유브 칸 원수와의 라왈핀디 원탁회의에 셰이크 무지브르 라흐만이 이끄는 벵골 대표단과 동행했다.[3] 아흐메드는 방글라데시 독립을 향한 많은 중요한 발전들을 목격했다.[3] 그는 1971년 해방 전쟁 동안 캘커타의 방글라데시 임시 정부에 참여했다. 그는 대외 홍보 부서에서 일했다.[2]
아흐메드는 1974년 12월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명령으로 수감됐으나 나중에 석방됐다.[3]
아흐메드는 벵골 시인 자시무딘의 딸 하스나 자시무딘 무두드와 결혼했다.[4] 그들에게는 시인 아나 카슈피야 무두드라는 딸이 있다.[5] 그들의 장남인 아시프 맘타주 무두드는 3살에 죽었다.[6] 또 다른 아들 아만 맘타지 무두드는 2015년 뎅기열로 사망했다.[7][8][9]
아흐메드는 방글라데시 대법원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그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연구원이었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방문 연구원이었다.[2] 1997년 가을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 엘리엇 국제 관계 학교의 블랜드 초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또한 엘리엇 학교의 국제 평의회 회원이기도 했다.[10]
2020년 12월 30일, 아흐메드는 헤모글로빈 수치 감소로 다카에 입원했고 결국 뇌졸중을 앓았다.[11] 몇 주 후, 심박 조율기가 이식되었다.[11]
아흐메드는 2021년 2월 1일 싱가포르에서 폐정체와 신장 합병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11] 그는 한 달 뒤인 3월 16일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2]
전임 미자누르 라흐만 초드리 |
제8대 방글라데시의 총리 1988년 3월 27일 ~ 1989년 8월 12일 |
후임 카지 자파르 아흐메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