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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 ||||||
본명 | Miguel Jones Castillo | |||||
출생일 | 1938년 10월 27일 | |||||
출생지 |
스페인령 기니 산타 이사벨 (現 적도 기니 말라보) | |||||
사망일 | 2020년 4월 8일 | (81세)|||||
사망지 | 스페인 빌바오 | |||||
포지션 | 은퇴 (과거 미드필더) | |||||
구단 기록* | ||||||
연도 | 구단 | 출전 (득점) | ||||
1956 1956–1959 1959–1967 1967–1968 합계: |
바라칼도 인다우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오사수나 |
56 (24) 80 (28) 10 (2) 161 (58) | 15 (4) ||||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
미겔 존스 카스티요(스페인어: Miguel Jones Castillo; 1938년 10월 27일, 스페인령 기니 산타 이사벨 ~ 2020년 4월 8일, 바스크 주 빌바오)는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현역 시절에 인다우추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활약했다.
비록 스페인령 기니(현 적도 기니) 출신이나, 존스는 빌바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인근 바라칼도에서 축구를 시작하여[1] 인다우추를 거쳤는데,[2] 당시 그는 노장 레사마와 신예 추스 페레다와 한배를 탔다. 존스와 페레다는 또다른 인다우추 선수였던 호세 에울로히오 가라테는 아틀레틱 빌바오의 구단 영입 정책에 따라 입단이 거절되었는데, 모두 비스카이아 도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존스는 백인 선수들만 입단되어 존스의 입단이 거절되었다는 생각과 다르게, 자신은 인종 문제로 입단이 거절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3]
존스는 결국 호세 비얄롱가가 지도하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입단하여 엔리케 코야르나 아델라르도와 같은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했다. 그는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2연패]]의 주역으로 아틀레티코가 레알 마드리드와의 결승전에서 1960년과 1961년 결승전에 모두 승리하는데 일조했다. 아틀레티코가 코파 2연패를 달성하는 과정에 존스는 1960년 결승전에서 선제골을 기록해 3-1 승리를 견인했다. 존스는 1964년 대회 결승전에도 출전했지만, 아틀레티코는 사라고사와의 경기에서 1-2로 패했다. 존스는 아틀레티코 선수단 일원으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도 1962년과 1963년에 2대회 연속 결승전에 출전했다. 그는 1962년 대회 결승전에 득점을 올려 아틀레티코가 피오렌티나를 재경기 끝에 3-0으로 이기도록 도왔으나, 1963년에는 토트넘 홋스퍼에게 1-5로 패했다. 그는 1966년에 라 리가 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1967년 10월, 존스는 오사수나와 1년 계약을 맺었고, 이듬해에 축구화를 벗었다.[4][5]
현역 은퇴 후, 그는 빌바오로 돌아가 인다우추의 단장을 맡았었다. 존스는 루이스 아라고네스의 동료로 절친한 사이였다. 2004년에 아라고네스 감독이 인종차별 의혹이 불거지자, 존스는 아라고네스와의 우정을 언급하며 그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반박했다.[6]
존스는 2020년 4월 8일 향년 81세로 영면에 들었다. 그는 코로나바이러스 범유행이 한창인 와중에 빌바오에서 오랜 기간 암투병중이었다.[6][7][8]
Al no poder intercalar en las filas del Athletic, muy a pesar de la labor de Antón Gorostiaga, Secretario del Club y amigo estudiantil de Jones, recaló inmediatamente en las filas del Barakaldo, recomendado por Daucik.
Ultimado el ventajoso fichaje de Miguel Jones por el Osasuna de Pamplona -900.000 pesetas por una temporada-.
Por cierto que, muchos lo recordarán, acabó su vida deportiva en Osasuna fichado (un millón de pesetas, más sueldo y primas) por Félix Martialay, y aún luego fue 15 años directivo del Indautxu, en Vizcaya, donde reside en Bilba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