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즈카 히로시

미쓰즈카 히로시(일본어: 三塚 博, みつづか ひろし, 1927년 8월 1일 ~ 2004년 4월 25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중의원 의원, 대장대신, 외무대신을 역임하였으며, 정3위 욱일대수장(正三位旭日大綬章)을 받았다.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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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미야기현에서 태어나 1951년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고, 대학 졸업 후 두 명의 중의원 의원 비서를 거쳐 1963년에 미야기 현 의회 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되었다. 1970년에는 자유민주당 미야기 현련(宮城県連)의 일방적인 요청에 의해 센다이시장 선거에 입후보해 낙선했지만, 1972년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입후보해 첫 당선되었고, 이후 연속으로 10번 당선되었다.

후쿠다 다케오 파벌에 속했으며, 이 파벌 내에는 뒤에 내각총리대신이 되는 모리 요시로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있었다. 나카가와 이치로의 신용을 얻고 후쿠다 의원이면서도 1979년에 설립된 나카가와 파벌의 간사장을 맡았다. 1985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운수 대신으로 첫 입각하였고, 국철 분할 민영화, 재정 구조 개혁 노선을 추진하였다. 이듬해인 1986년, 아베 신타로가 후쿠다 파벌을 계승하면서 파벌 내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가토 무쓰키, 시오카와 마사주로, 모리 요시로와 함께 아베 파벌의 실력자로 성장하던 중 리크루트 사건으로 파벌 내의 라이벌인 가토와 모리가 타격을 입었으나, 사건에 관여돼 있지 않았던 그는 통상산업대신, 외무대신, 자유민주당 정조회장을 계속해서 역임하였다.

1991년, 아베 신타로가 사망하면서 아베파를 계승하였고, 미쓰즈카 파벌을 이끌며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 후에는 당 간사장, 제2차 하시모토 내각의 대장대신을 맡는 등 총리 총재 후보로서 경력을 쌓았으나 대장대신을 맡은 시기에 연이은 은행 파산과 부패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이후 모리 요시로에게 파벌을 양보하고 정계 일선에서 물러났고, 2003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004년에는 폐렴으로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역대 선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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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년도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1972년 총선거 33회 중의원 의원 미야기현 제1구 자민 91,361표
13.7%
2위 중선거구제
1976년 총선거 34회 중의원 의원 미야기현 제1구 자민 82,771표
11.1%
4위 중선거구제
1979년 총선거 35회 중의원 의원 미야기현 제1구 자민 91,751표
12.9%
2위 중선거구제
1980년 총선거 36회 중의원 의원 미야기현 제1구 자민 107,704표
14.3%
4위 중선거구제
1983년 총선거 37회 중의원 의원 미야기현 제1구 자민 114,369표
15.7%
2위 중선거구제
1986년 총선거 38회 중의원 의원 미야기현 제1구 자민 159,417표
20.83%
1위 중선거구제
1990년 총선거 39회 중의원 의원 미야기현 제1구 자민 138,949표
15.81%
4위 중선거구제
1993년 총선거 40회 중의원 의원 미야기현 제1구 자민 134,076표
16.63%
2위 중선거구제
1996년 총선거 41회 중의원 의원 미야기현 제3구 자민 81,784표
53.14%
1위 소선거구제
2000년 총선거 42회 중의원 의원 미야기현 제3구 자민 84,278표
51.99%
1위 소선거구제
전임
야마시타 도쿠오
제57대 운수대신
1985년 12월 28일~1986년 7월 22일
후임
하시모토 류타로
전임
다무라 하지메
제48대 통상산업대신
1988년 12월 27일~1989년 6월 3일
후임
가지야마 세이로쿠
전임
우노 소스케
제111대 외무대신
1989년 6월 3일~1989년 8월 10일
후임
나카야마 다로
전임
구보 와타루
제102대 대장대신
1996년 11월 7일~1998년 1월 28일
후임
하시모토 류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