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우(普愚: 1301년 10월 23일(음력 9월 21일)~1383년 1월 27일(음력 1382년 12월 24일))는 고려 말 고승으로 불교 개혁에 힘쓴 승려이다. 호는 태고(太古) · 보허(普虛)이며, 속성은 홍씨(洪氏)이고 시호는 원증(圓證)이다.[1][2] 흔히 태고(太古) 또는 태고국사(太古國師)라 불린다.
고려말에 고려는 원나라에 재침략받고 이어 그 지배하에 들어가는 사회상 불안에 따른 불교단의 타락과 오랫동안 쌓여온 기복 불교(祈福 佛敎)의 폐단은 마침내 고려 사회에 배불의 싹을 마련하고 있었다.[3] 한편 원나라의 쇠퇴는 공민왕에게 정치상 자주성을 되찾을 기회를 주어 복고 정치를 과감히 수행해 갔다.[3] 보우와 혜근은 이런 세상에 출현하여 임제종의 선풍(禪風)으로 불교를 일상 현실에 살리려고 하였다.[3] 이들 중에서도 특히 보우는 구산의 통합을 시도하여 그 과제를 조선 대(代)에 넘겨주었다.[3] 공민왕이 훗날 《청사(靑史)》에 요승으로 기록되는 신돈을 기용하여 실정한 탓에 배불의 기운이 비등하였고 고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3] 이에 불교도 운명을 함께하여 조선 전체가 관여하는 배불책 탓에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탄압받아 쇠락하는 과정을 겪었다.[3] 보우와 혜근을 함께 이은 혼수의 법맥이 조선에 이어졌다.[3]
홍주(洪州, 현 충청남도 홍성군)출신. 아버지는 홍연(洪延), 어머니는 정씨이며, 해가 품에 들어오는 태몽이 있었다.
13세(1313년)에 출가하여 회암사(檜巖寺) 광지(廣智)의 제자가 되었고 얼마 뒤 가지산으로 가서 수행하였다.[1]
25세(1325년, 충숙왕 재위 12년)에 승과인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감로사에서 고행하였다.[1][2]
삼각산에 태고사(太古寺)를 지었고 1346년(충목왕 재위 2년) 원나라에 가서 하무산(霞霧山) 청공(淸珙)의 법을 이어받아 임제종의 시조가 되었다.[1]
귀국하여 공민왕의 청으로 왕사가 되었으나 신돈의 횡포를 보다 못해 소설사(小雪師)로 돌아갔으며 신돈의 참해를 피하여 법주사(法住寺)에 은거하였다.[1][4] 그 후 신돈이 죽은 후 우왕의 국사가 되었다.[1][4]
보우는 대각국사 의천이 치선이라고 갈파한 구산을 통합하고 구이지학(口耳之學)을 지양하고자 원융부(圓融府)를 건립하고 선사(禪師)의 품법으로 모든 불교를 총섭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4]
보우는 일찍이 만법귀일(萬法歸一) · 무자(無字)와 같은 화두를 참선하여 크게 깨친 바가 있었지만, 충목왕 2년에 중국에 다시 건너가, 임제(臨濟)의 제17대 법손(法孫) 석옥(石屋)에게서 법을 받고 충목왕 4년에 귀국했다.[2]
그러나 그는 절에 머물지 않고 광주 소설산(小雪山)에서 경작에 힘썼다.[2] 공민왕이 보우를 불러 법을 물었을 때 보우는 왕도는 불교 신앙에 있지 않고 밝은 정치에 있다고 하였다(《고려사》권 38).[2]
그리고 선종 구산을 통합하여 임제종의 백장청규(百丈淸規)로써 기강을 바로잡고 개경은 왕기가 다했으니 복고 정치가 어려우므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자고 아뢰었다《유창선도증국사행장》(維昌撰圖證國師行狀)(공민왕 5년).[2] 공민왕은 보우의 건의를 수용해 곧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두고 9산 통합에 착수하였고 한양에 궁절을 짓게 하였다.[2] 그러나 한양 천도는 일부 신하가 묘청의 예를 들어 반대하므로 좌절되고 이와 함께 원융부[5]도 불과 10개월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2]
구산 통합과 한양 천도 계획은 실패하지만, 이런 보우의 행장에서 그 사람이 얼마나 현실과 유관한 종교인이었는지 추단할 수 있다.[2] 한양 천도는 인심을 일변하게 하고 정교를 쇄신하려는 의도였고 천도하는 이유로 든 풍수지리설은 당시 풍조를 현실에 맞게 이용하려 한 기도였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