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결투쟁(Dirty protest)은 북아일랜드 분쟁 당시 HM 교도소 메이즈에 수감된 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PIRA)와 아일랜드 민족해방군(INLA) 요원들이 자신들을 잡법이 아닌 정치범으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하며 벌인 5년간의 시위의 두 번째 단계이다. 아마 여성교도소에서도 동참자가 나타났다.
PIRA를 비롯한 분리주의자들은 1972년부터 특수범주지위에 의해 정치범 내지 전쟁포로 대우를 받았으나, 1976년부터 그 특혜가 취소되었다. 이에 키어런 누겐트를 시작으로 수감자들이 죄수복을 거부하고 벌거벗거나 모포 한장만 걸치고 다니는 모포투쟁에 돌입했다.[1]
1978년 3월, 일부 수감자들이 교도관들의 폭행을 이유로 샤워장이나 화장실을 가기 위해 감방에서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이에 요강과 세숫대야가 제공되었다.[2][3] 수감자들은 감방 안에 샤워기를 설치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세숫대야를 사용하기를 거부하고 나섰다.[2] 1978년 4월 말에 수감자 한 명과 교도관 한 명 사이에 싸움이 붙었고, 그 수감자는 독방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수감자가 몹시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는 소식이 감옥 안에 번졌다.[2] 수감자들은 감방의 가구를 박살내면서 항의했고, 이에 교도소 측은 아직 박살나지 않은 가구들을 감방에서 싹 빼 버리고 매트리스만 던져주는 것으로 응대했다.[2] 수감자들은 감방에서 나가길 거부했고, 그 결과 교도관들은 그들을 씻길 수가 없었다. 이런 전차로 모포투쟁은 불결투쟁으로 진화하였다. 수감자들은 감방에서 나가길 거부하며 감방에서 먹고 싸고 하면서 감방 벽에 배설물을 비롯한 배출물들을 처바르며 시위했다.[4]
7월 31일, 아마 주의 대주교인 토마스 오 피어크가 교도소를 위문 방문했다가 이 꼴을 보고 충격을 받아 대중에 그 실태를 고발했다. 피어크는 감옥 상태가 “참을 수 없었으며, 구토할까 두려워 수감자들과 대화를 나누지 못했을 지경”이라 하였다.[5]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감자들의 사기는 매우 높다고 밝혔다.[6]
시위는 그 뒤로도 계속되었으나 영국 정부는 무시로 일관했다. 1980년 1월, 수감자들은 소위 "5개조 요구"로 알려진 요구사항을 발표하게 된다.
1980년 2월 아마 여성교도소의 마레드 페렐을 비롯한 서른 명 이상의 수감자들이 남성 교도관들의 여성 수감자 처우 문제에 대해 교도소장과 논쟁을 벌인 뒤 불결투쟁에 동참했다.[8] 여성 수감자는 원래 자기 옷을 입을 수 있었기에 이들은 모포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대신 남자 수감자들의 행태에 더하여 생리혈을 감방 벽에 뿌려대며 시위했다.
1980년 6월, 유럽 인권위원회가 이들 수감자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동정을 유도하기 위해 설계된” 행동을 한 것으로써, 그들의 상태가 “비인간”적이지 않다고 결론내렸다. 이에 따라 영국 정부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7] 그리고 1980년 10월 27일, 사태는 그 유명한 아일랜드 단식투쟁으로 번져가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