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PB 개인 타이틀 |
---|
타격 부문 |
수위 타자 최다 홈런 최다 타점 최다 도루 최다 안타 최고 출루율 |
투수 부문 |
최우수 평균 자책점 최다 승리 최다 탈삼진 최고 승률 최다 세이브 투수 최우수 중간 계투 |
기타 |
최우수 선수 최우수 신인 사와무라 에이지상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컴백상 |
사와무라 에이지상(일본어: 沢村栄治賞)은 일본 프로 야구에서 그 해에 활약한 최고의 투수에게 수여하는 상의 하나이다. 통칭으로 사와무라상(沢村賞)이라고 불리며 수상 대상은 선발투수로 한정된다.
요미우리 신문사는 정식 명칭에 대해 제정 초기부터 현재까지 일관되게 사와무라상으로 불리고 있는[1][주 1] 반면, NPB의 시상명으로는 공식적으로 사와무라 에이지상으로 불리고 있다.[3] 1989년 이후에는 NPB 전체를 대상으로 한 공식 표창에 준하는 특별상이다. 수상자에게는 황금색 트로피와 부상으로 상금 300만 엔이 주어진다.
1947년, 요미우리 신문사가 전쟁 전 프로 야구 여명기에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린 사와무라 에이지의 영예와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1956년 MLB에서 제정된 사이 영 상보다 먼저 생긴 상이다. 또한 사이 영 상은 모든 투수를 선정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사와무라상은 그 해에 활약한 선발투수만을 선정하고 있다.[4][5]
1950년부터는 양대 리그 출범에 따라 선정 대상을 요미우리 신문사가 소유하고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소속된 센트럴 리그 투수만을 대상으로 했다.
1981년까지는 요미우리 신문사가 사와무라상 선정 작업을 ‘도쿄 운동 기자 클럽 부장회’에 넘겨줬는데 같은 해 니시모토 다카시의 수상을 둘러싼 논란이 야구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이듬해 1982년 5월 14일에 도쿄 운동 기자 클럽 부장회는 사와무라상 선정 작업에서 손을 뗐고, 같은 해부터 NPB의 전직 선발 투수(OB)들[주 2]을 중심으로 한 선정위원회 방식으로 개정되면서 7가지 항목의 자격 기준이 마련됐다.[6][7] 1989년부터 수상 범위를 퍼시픽 리그에도 확대됐다.
현재는 사와무라상 선정위원회의 심의를 통해 7가지 항목의 자격 기준이나 보충 항목을 바탕으로 매년 12개 구단 중 원칙적으로 한 명에게 선출된다. 단, 최종적인 판단은 심사위원에게 맡겨져 있으며 자격 기준 항목이나 보충 항목은 어디까지나 참고일 뿐[주 3][주 4][주 5] 항목 외의 완봉이나 심사위원들의 인상에 남은 선발 투수로서의 기록 달성 등도 가미되는 경우가 있다.[10] 기본은 토론으로 결정되지만, 그래도 결정되지 않는 경우엔 다수결이 된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심사위원은 5명으로 구성된다.[11]
선정 기준은 아래 7개 항목이지만 반드시 7개 항목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또한 1981년까지 요미우리 신문사가 도쿄 운동 기자 클럽 부장회에 위촉한 선정회에서의 선정 기준으로는 ‘20승 이상, 승리와 패배의 차이가 10 이상, 평균자책점 2점대 이하, 탈삼진률, 우승에 대한 공헌도’ 등이 거론되고 있었다.[12]
최근에는 투수의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완투한 경기 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심사위원으로부터도 완투 경기 수에 대해 선정 기준의 재검토를 시사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었다.[13][주 6] 또한 200 투구 이닝을 달성한 투수가 없는 시즌도 최근 들어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2018년부터 ‘사와무라상 기준으로 정한 퀄리티 스타트(QS) 달성률 포함’이 새로운 보칙 항목으로 추가됐다.[16] QS의 기준은 선발로 등판한 전 경기에서 차지하는 투구 이닝 7이닝에 자책점 3점 이내라는 독자적인 것이다.[16]
연도 | 성명 | 소속 | 등판 | 완투 | 승리 | 승률 | 투구 이닝 | 탈삼진 | 평균자책점 | 심사위원 |
---|---|---|---|---|---|---|---|---|---|---|
1947 | 벳쇼 아키라(1) | 난카이 | 55 | 47 | 30 | .612 | 448.1 | 191 | 1.86 | 1947년~1981년까지는 도쿄 운동 기자 클럽 부장회에 위촉한 선정회가 선정 |
1948 | 나카오 히로시 | 요미우리 | 47 | 25 | 27 | .692 | 343 | 187 | 1.84 | |
1949 | 후지모토 히데오 | 요미우리 | 39 | 29 | 24 | .774 | 288 | 137 | 1.94 | |
1950 | 사나다 시게오 | 쇼치쿠 | 61 | 28 | 39 | .765 | 395.2 | 191 | 3.05 | |
1951 | 스기시타 시게루(1) | 나고야 | 58 | 15 | 28 | .683 | 290.1 | 147 | 2.35 | |
1952 | 스기시타 시게루(2) | 나고야 | 61 | 25 | 32 | .696 | 355.2 | 160 | 2.33 | |
1953 | 오토모 다쿠미 | 요미우리 | 43 | 22 | 27 | .818 | 281.1 | 173 | 1.85 | |
1954 | 스기시타 시게루(3) | 주니치 | 63 | 27 | 32 | .727 | 395.1 | 273 | 1.39 | |
1955 | 벳쇼 다케히코(2) | 요미우리 | 50 | 17 | 23 | .742 | 312 | 152 | 1.33 | |
1956 | 가네다 마사이치(1) | 고쿠테쓰 | 68 | 24 | 25 | .556 | 367.1 | 316 | 1.74 | |
1957 | 가네다 마사이치(2) | 고쿠테쓰 | 61 | 25 | 28 | .636 | 353 | 306 | 1.63 | |
1958 | 가네다 마사이치(3) | 고쿠테쓰 | 56 | 22 | 31 | .689 | 332.1 | 311 | 1.30 | |
1959 | 무라야마 미노루(1) | 오사카 | 54 | 19 | 18 | .643 | 295.1 | 294 | 1.19 | |
1960 | 호리모토 리쓰오 | 요미우리 | 69 | 26 | 29 | .617 | 364.2 | 210 | 2.00 | |
1961 | 곤도 히로시 | 주니치 | 69 | 32 | 35 | .648 | 429.1 | 310 | 1.70 | |
1962 | 고야마 마사아키 | 한신 | 47 | 26 | 27 | .711 | 352.2 | 270 | 1.66 | |
1963 | 이토 요시아키 | 요미우리 | 39 | 18 | 19 | .704 | 236.1 | 166 | 1.90 | |
1964 | 진 바크 | 한신 | 46 | 24 | 29 | .763 | 353.1 | 200 | 1.89 | |
1965 | 무라야마 미노루(2) | 한신 | 39 | 26 | 25 | .658 | 307.2 | 205 | 1.96 | |
1966 | 무라야마 미노루(3) | 한신 | 38 | 24 | 24 | .727 | 290.1 | 207 | 1.55 | |
호리우치 쓰네오(1) | 요미우리 | 33 | 14 | 16 | .889 | 181 | 117 | 1.39 | ||
1967 | 오가와 겐타로 | 주니치 | 55 | 16 | 29 | .707 | 279.2 | 178 | 2.51 | |
1968 | 에나쓰 유타카 | 한신 | 49 | 26 | 25 | .676 | 329 | 401 | 2.13 | |
1969 | 다카하시 가즈미(1) | 요미우리 | 45 | 19 | 22 | .815 | 256 | 221 | 2.21 | |
1970 | 히라마쓰 마사지 | 다이요 | 51 | 23 | 25 | .568 | 332.2 | 182 | 1.95 | |
1971 | 수상자 없음 | |||||||||
1972 | 호리우치 쓰네오(2) | 요미우리 | 48 | 26 | 26 | .743 | 312 | 203 | 2.91 | |
1973 | 다카하시 가즈미(2) | 요미우리 | 45 | 24 | 23 | .639 | 306.1 | 238 | 2.21 | |
1974 | 호시노 센이치 | 주니치 | 49 | 7 | 15 | .625 | 188 | 137 | 2.87 | |
1975 | 소토코바 요시로 | 히로시마 | 41 | 17 | 20 | .606 | 287 | 193 | 2.95 | |
1976 | 이케가야 고지로 | 히로시마 | 51 | 18 | 20 | .571 | 290.1 | 207 | 3.26 | |
1977 | 고바야시 시게루(1) | 요미우리 | 42 | 11 | 18 | .692 | 216.1 | 155 | 2.92 | |
1978 | 마쓰오카 히로무 | 야쿠르트 | 43 | 11 | 16 | .593 | 199.1 | 119 | 3.75 | |
1979 | 고바야시 시게루(2) | 한신 | 37 | 17 | 22 | .710 | 273.2 | 200 | 2.89 | |
1980 | 수상자 없음 | |||||||||
1981 | 니시모토 다카시 | 요미우리 | 34 | 14 | 18 | .600 | 257.2 | 126 | 2.58 | |
1982 | 기타벳푸 마나부(1) | 히로시마 | 36 | 19 | 20 | .714 | 267.1 | 184 | 2.43 | 벳쇼, 스기시타, 가네다, 호리모토, 무라야마 |
1983 | 엔도 가즈히코 | 다이요 | 36 | 16 | 18 | .667 | 238.1 | 186 | 2.87 | 벳쇼, 스기시타, 가네다, 호리모토, 무라야마 |
1984 | 수상자 없음 | 벳쇼, 스기시타, 가네다, 호리모토, 무라야마 | ||||||||
1985 | 고마쓰 다쓰오 | 주니치 | 33 | 14 | 17 | .680 | 210.1 | 172 | 2.65 | 벳쇼, 스기시타, 가네다, 호리모토, 무라야마 |
1986 | 기타벳푸 마나부(2) | 히로시마 | 30 | 17 | 18 | .818 | 230 | 123 | 2.43 | 벳쇼, 스기시타, 가네다, 호리모토, 무라야마 |
1987 | 구와타 마스미 | 요미우리 | 28 | 14 | 15 | .714 | 207.2 | 151 | 2.17 | 벳쇼, 스기시타, 가네다, 호리모토, 무라야마★ |
1988 | 오노 유타카 | 히로시마 | 24 | 14 | 13 | .650 | 185 | 183 | 1.70 | 벳쇼, 스기시타, 가네다★, 호리모토, 고야마[주 7] |
1989 | 사이토 마사키(1) | 요미우리 | 30 | 21 | 20 | .741 | 245 | 182 | 1.62 | 벳쇼, 스기시타, 가네다, 호리모토, 고야마, 이나오, 요네다[주 8] |
1990 | 노모 히데오 | 긴테쓰 | 29 | 21 | 18 | .692 | 235 | 287 | 2.91 | 벳쇼, 스기시타, 호리모토, 이나오, 요네다[주 9] |
1991 | 사사오카 신지 | 히로시마 | 33 | 13 | 17 | .654 | 240 | 213 | 2.44 | 벳쇼, 스기시타, 이나오, 요네다, 호리우치[주 10] |
1992 | 이시이 다케히로 | 세이부 | 27 | 8 | 15 | .833 | 148.1 | 123 | 1.94 | 벳쇼, 스기시타, 이나오, 호리우치★, 야마다[주 11] |
1993 | 이마나카 신지 | 주니치 | 31 | 14 | 17 | .708 | 249 | 247 | 2.20 | 벳쇼, 스기시타, 이나오, 야마다, 히라마쓰[주 12] |
1994 | 야마모토 마사히로 | 주니치 | 29 | 14 | 19 | .704 | 214 | 148 | 3.49 | 벳쇼, 이나오, 도바시[주 13], 히라마쓰★, 호시노[주 14] |
1995 | 사이토 마사키(2) | 요미우리 | 28 | 16 | 18 | .643 | 213 | 187 | 2.70 | 벳쇼, 이나오, 도바시, 히라마쓰, 호시노 |
1996 | 사이토 마사키(3) | 요미우리 | 25 | 8 | 16 | .800 | 187 | 158 | 2.36 | 벳쇼, 이나오, 도바시, 히라마쓰, 후지타[주 15] |
1997 | 니시구치 후미야 | 세이부 | 32 | 10 | 15 | .750 | 207.2 | 192 | 3.12 | 벳쇼, 이나오, 도바시, 히라마쓰, 후지타 |
1998 | 가와사키 겐지로 | 야쿠르트 | 29 | 9 | 17 | .630 | 204.1 | 94 | 3.04 | 벳쇼, 이나오, 도바시, 히라마쓰★, 후지타 |
1999 | 우에하라 고지(1) | 요미우리 | 25 | 12 | 20 | .833 | 197.2 | 179 | 2.09 | 후지타★, 이나오, 도바시, 히라마쓰, 호리우치[주 16] |
2000 | 수상자 없음 | 후지타, 이나오, 도바시, 히라마쓰, 호리우치 | ||||||||
2001 | 마쓰자카 다이스케 | 세이부 | 33 | 12 | 15 | .500 | 240.1 | 214 | 3.60 | 후지타, 이나오, 도바시, 히라마쓰, 호리우치 |
2002 | 우에하라 고지(2) | 요미우리 | 26 | 8 | 17 | .773 | 204 | 182 | 2.60 | 후지타, 이나오, 도바시, 히라마쓰, 호리우치 |
2003 | 이가와 게이 | 한신 | 29 | 8 | 20 | .800 | 206 | 179 | 2.80 | 후지타, 이나오, 도바시, 히라마쓰, 호리우치 |
사이토 가즈미(1) | 다이에 | 26 | 5 | 20 | .870 | 194 | 160 | 2.83 | ||
2004 | 가와카미 겐신 | 주니치 | 27 | 5 | 17 | .708 | 192.1 | 176 | 3.32 | 후지타, 이나오, 도바시, 히라마쓰, 사이토[주 17] |
2005 | 스기우치 도시야 | 소프트뱅크 | 26 | 8 | 18 | .818 | 196.2 | 218 | 2.11 | 후지타, 이나오, 도바시, 히라마쓰, 사이토 |
2006 | 사이토 가즈미(2) | 소프트뱅크 | 26 | 8 | 18 | .783 | 201 | 205 | 1.75 | 이나오, 도바시, 히라마쓰 |
2007 | 다르빗슈 유 | 닛폰햄 | 26 | 12 | 15 | .750 | 207.2 | 210 | 1.82 | 도바시, 이나오★, 히라마쓰, 호리우치, 오노 |
2008 | 이와쿠마 히사시 | 라쿠텐 | 28 | 5 | 21 | .840 | 201.2 | 159 | 1.87 | 도바시, 히라마쓰, 호리우치, 오노, 무라타[주 18] |
2009 | 와쿠이 히데아키 | 세이부 | 27 | 11 | 16 | .727 | 211.2 | 199 | 2.30 | 도바시, 히라마쓰, 호리우치, 오노, 무라타 |
2010 | 마에다 겐타(1) | 히로시마 | 28 | 6 | 15 | .652 | 215.2 | 174 | 2.21 | 도바시★, 히라마쓰, 호리우치, 무라타, 기타벳푸[주 19] |
2011 | 다나카 마사히로(1) | 라쿠텐 | 27 | 14 | 19 | .792 | 226.1 | 241 | 1.27 | 도바시, 히라마쓰, 호리우치, 무라타, 기타벳푸 |
2012 | 셋쓰 다다시 | 소프트뱅크 | 27 | 3 | 17 | .773 | 193.1 | 153 | 1.91 | 도바시, 히라마쓰, 호리우치, 무라타, 기타벳푸 |
2013 | 다나카 마사히로(2) | 라쿠텐 | 28 | 8 | 24 | 1.00 | 212 | 183 | 1.27 | 호리우치★, 히라마쓰, 무라타, 기타벳푸, 구도[주 20] |
2014 | 가네코 지히로 | 오릭스 | 26 | 4 | 16 | .762 | 191 | 199 | 1.98 | 호리우치, 히라마쓰, 무라타, 기타벳푸★, 구도 |
2015 | 마에다 겐타(2) | 히로시마 | 29 | 5 | 15 | .652 | 206.1 | 175 | 2.09 | 호리우치, 히라마쓰, 무라타★, 기타벳푸, 야마다[주 21] |
2016 | 크리스 존슨 | 히로시마 | 26 | 3 | 15 | .682 | 180.1 | 141 | 2.15 | 호리우치, 히라마쓰, 무라타, 기타벳푸, 야마다 |
2017 | 스가노 도모유키(1) | 요미우리 | 25 | 6 | 17 | .773 | 187.1 | 171 | 1.59 | 호리우치, 히라마쓰, 무라타, 기타벳푸, 야마다 |
2018 | 스가노 도모유키(2) | 요미우리 | 28 | 10 | 15 | .652 | 202 | 200 | 2.14 | 호리우치, 히라마쓰, 무라타, 기타벳푸, 야마다 |
2019 | 수상자 없음 | 호리우치, 히라마쓰, 무라타, 기타벳푸, 야마다 | ||||||||
2020 | 오노 유다이[17] | 주니치 | 20 | 10 | 11 | .647 | 148.2 | 148 | 1.82 | 호리우치, 히라마쓰, 무라타, 기타벳푸★[주 22], 야마다 |
2021 | 야마모토 요시노부(1)[18] | 오릭스 | 26 | 6 | 18 | .783 | 193.2 | 206 | 1.39 | 호리우치, 히라마쓰, 무라타, 기타벳푸★, 야마다 |
2022 | 야마모토 요시노부(2)[19] | 오릭스 | 26 | 4 | 15 | .750 | 193 | 205 | 1.68 | 호리우치, 히라마쓰, 기타벳푸★, 야마다[주 23] |
2023 | 야마모토 요시노부(3)[20] | 오릭스 | 23 | 2 | 16 | .727 | 164 | 169 | 1.21 | 호리우치, 히라마쓰, 야마다, 구도[주 24] |
선수 | 횟 수 |
연도 |
---|---|---|
스기시타 시게루 | 3 |
1951, 1952, 1954 |
가네다 마사이치 | 1956, 1957, 1958 | |
무라야마 미노루 | 1959, 1965, 1966 | |
사이토 마사키 | 1989, 1995, 1996 | |
야마모토 요시노부 | 2021, 2022, 2023 | |
벳쇼 다케히코 | 2 |
1947, 1955 |
호리우치 쓰네오 | 1966, 1972 | |
다카하시 가즈미 | 1969, 1973 | |
고바야시 시게루 | 1977, 1979 | |
기타벳푸 마나부 | 1982, 1986 | |
우에하라 고지 | 1999, 2002 | |
사이토 가즈미 | 2003, 2006 | |
마에다 겐타 | 2010, 2015 | |
다나카 마사히로 | 2011, 2013 | |
스가노 도모유키 | 2017, 2018 |
팀 | 횟수 |
---|---|
요미우리 | 20 |
주니치(나고야) | 11 |
히로시마 | 9 |
한신 | 8 |
소프트뱅크(난카이·다이에) | 5 |
야쿠르트(고쿠테쓰) | 5 |
세이부 | 4 |
오릭스 | 4 |
라쿠텐 | 3 |
DeNA(다이요) | 2 |
닛폰햄 | 1 |
지바 롯데 | 0 |
그 외 | 2 |
수상자 없음 | 5 |
전체 항목을 채웠는데도 불구하고 상을 놓친 경우(선정 기준이 마련된 1982년 이후 및 퍼시픽 리그 구단 소속 투수는 1989년 이후)
연도 | 투수 | 소속 | 등판 | 완투 | 승리 | 승률 | 투구 이닝 | 탈삼진 | 평균자책점 |
---|---|---|---|---|---|---|---|---|---|
1982 | 에가와 스구루 | 요미우리 | 31 | 24 | 19 | .613 | 263.1 | 196 | 2.36 |
2008 | 다르빗슈 유[주 25] | 닛폰햄 | 25 | 10 | 16 | .800 | 200.2 | 208 | 1.88 |
2011 | 다르빗슈 유 | 닛폰햄 | 28 | 10 | 18 | .750 | 232 | 276 | 1.44 |
2013 | 가네코 지히로 | 오릭스 | 29 | 10 | 15 | .652 | 223.1 | 200 | 2.01 |
1980년, 요미우리의 에가와 스구루가 34등판, 18완투, 투구 이닝 261과 1/3, 16승, 승률 0.571, 평균자책점 2.48, 219탈삼진의 성적으로 다승왕과 최다 탈삼진을 획득했는데도 기자단 투표에서는 수상자 없음으로 취급했다.
1981년, 에가와는 31등판, 20완투, 투구 이닝 240과 1/3, 20승, 승률 0.769, 평균자책점 2.29, 221탈삼진의 성적을 남기며 다승왕, 최우수 평균자책점, 최다 탈삼진 및 최고 승률 등의 선발 투수 타이틀[주 26]을 모두 석권했다.
에가와 스구루 | 니시모토 다카시 | |
---|---|---|
등판 | 31 | 34 |
완투 | 20 | 14 |
투구 이닝 | 240과 1/3 | 257과 2/3 |
승리 | 20승 | 18승 |
승률 | .769 | .600 |
평균자책점 | 2.29 | 2.58 |
탈삼진 | 221 | 126 |
수상자 선정은 1981년 10월 14일, 유라쿠초 스키야바시에 있는 리틀 도쿄 9층 중화요리점 ‘론’에서 도쿄 운동 기자 클럽에 가입된 44개사 중 31개사의 운동부장이 회의에 참석했다. 연례적으로 우선 몇 명의 후보자를 꼽았으며, 그 중에서 고마쓰 다쓰오(주니치)가 제외돼 마지막으로 니시모토와 에가와가 남았다. 그 후 ‘이 상에는 인격적인 기준이 있느냐’, ‘올해만 성적이 대상이냐’는 가나이 세이이치 닛칸 스포츠 부장의 질문이 쏟아졌고 사회자가 “지금까지 인격을 운운하는 것을 가미한 사례는 없다. 어디까지나 금년도 성적이 대상”이라고 답변했지만 이 무렵부터 점차 니시모토를 밀어주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다나카 야스히코 아사히 신문사 부장이 “요미우리의 우승은 전반기에서의 무서운 기세로 결정됐다고 해도 좋다. 개막전 선발 투수의 중책을 완수하여 독주 태세에 들어간 시점의 성적은 니시모토가 10승 2패, 에가와는 7승 3패였다. 에가와의 승리는 독주 후 올린 것이 많다. 우승 공헌도는 니시모토가 한 수 위”라고 발언하자, 데일리 스포츠의 곤도 부장은 “숫자로 판단하는 것이 객관적”이라고 반박하며 에가와를 지지했다. 그러자 다나카 부장은 “숫자만으로 결정한다면 공식 기록원으로 위촉하면 되고, 이러한 모임을 여는 것 자체가 의미는 없다”라고 어디까지나 니시모토를 지지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곤도 부장은 “우승 기여도를 평가하는 것은 MVP가 아닌가? 사와무라상은 어디까지나 투수로서의 역량을 평가해야 한다”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등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26] 최종 투표 결과는 16 대 13, 기권 2표로 니시모토를 수상자로 결정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수상자 선정과 그 방식을 놓고 뉴스에서 보도될 정도로 논란이 일자 각 언론사의 전화가 빗발쳤는데 “니시모토가 안 된다고 하는 게 아니냐. 오히려 니시모토쪽은 좋지만 사와무라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에가와다”, “에가와는 지금도 너무 싫어하지만 숫자는 숫자로 평가하지 않으면 무엇을 기준으로 정할지 애매해진다. 개인적인 좋고 싫음의 감정으로 선택하는 것은 최악”이라며 당시에는 아직 많았던 ‘안티 에가와’ 세력에서도 결과에 대한 이의 제기는 많았는데 대부분 에가와에 대한 동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더 나아가 현역 선수 중에서도 닛폰햄 소속이던 에나쓰 유타카는 “투수로서 최고의 영예이다. 숫자나 실력 모두 에가와 말고는 없을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을 나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고 요미우리의 호리우치 쓰네오도 “사와무라상의 권위가 없어져 버릴 수도 있다. 일본 시리즈가 코앞인데 바보같은 짓을 했다”라고 당시 수상자 선정 작업에 참여했던 심사위원들을 향해 비판했다.[27] 이같은 여론의 거센 반발이 이어지자, 각 신문사 운동부장은 이듬해 사와무라상 선정위원직에서 사퇴했고 그 후 1982년부터 전직 선발 투수(OB)들을 중심으로 한 ‘사와무라상 선정위원회’로 바뀌었다.[6]
2022년 3월, 에가와는 마키하라 히로미의 YouTube 채널 ‘미스터 퍼펙트 마키하라’에 출연해 당시를 회고하면서 “불쌍한 건 니시모토였어. ‘스구루짱(卓ちゃん)[주 27], 미안해’”라며 당시 니시모토가 자신에게 사과하러 왔던 걸 밝혔고 “나는 제대로 하려면 (투표를) 두 사람에게 해야한다고 말했거든. 니시모토가 되는데 정작 나를 뽑지 않는게 이상하다고 했어. 그 해에만 두 사람으로 했으면 좋았을텐데…”라며 사와무라상을 공동 수상했어야만 했다고 밝혔다.[28]
사와무라상 본연의 자세에 대해서는 크게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데, 선정 기준과 관련해서 현역 시절 선발 완투형을 관철하여 쇼와 시대에 활약한 원로 야구인들 대부분은 현행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 한편으로 입단 초기부터 투수 분업제 시대에서 현역을 지낸 젊은 야구인이나 현역 선수 등은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29]
애초 사이 영 상과 사와무라상은 별개라는 의견이 뿌리 깊은데다[30] 특히 오랫동안 사와무라상 선정위원회를 맡고 있는 호리우치 쓰네오는 2019년 시점에서 ‘사와무라상은 본래 사와무라 에이지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상’이라고 전제한 뒤 ‘선발 완투형 No.1 투수에게 수여한다는 것이지 결코 그 시즌에서 최고의 투수를 뽑는 상이 아니라는 것과 투수 분업제 시대에 완투수가 이래라저래라하는 시대가 아니다’라는 의견이 있는 것도 인지한 뒤 ‘상의 이름에 사와무라 에이지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이상 그 수준이나 숫자를 쉽게 바꾸고 싶진 않다’라며 선정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을 무리하게 뽑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31] 그 외에도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을 무리하게 뽑을 필요는 없다. 사와무라상은 야구계에서도 특별한 상이자 권위가 있는 상이다. 뽑힌 사람도 역시 사와무라상에 걸맞는 성적을 남기지 않으면 상에 대한 권위를 실추한다”는 의견과 “과거 수상자를 봐도 사와무라상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 뽑혔다. 선정 문턱을 낮추는 것은 상 자체나 과거 수상자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29]
반면 기준을 바꿔야 한다는 주요 의견으로는 ‘예전과 지금은 타자의 수준이 다르다. 현재 프로 야구에서는 하위 타선에서도 시즌 10홈런 이상 타자가 많이 나오고 있다. 선발 투수는 숨이 빠지는 이닝이 없고 필연적으로 투구수를 돌아보면 완투도 할 수 없다. 예전과 같은 기준으로 투수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됐다’, ‘이미 우리가 프로 야구에 들어갔을 때는 선발, 중간 계투, 마무리 투수의 분업제가 뿌리내렸다. 감독도 승리를 위해서는 선발이나 완투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런 환경에서 10완투나 200투구 이닝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다’, ‘(선정 기준이 되는 7항목을)MLB 투수이면서 마지막으로 모든 조건을 채운 것은 1999년의 랜디 존슨이다’라고 지적하여 완투수를 의문시하는 목소리도 있다.[29][32]
사이 영 상과 사와무라상은 별개라는 의견을 고려하여 “시대가 변하고 있는 만큼 기용법도 변하니까 숫자도 달라질 수도 있다. 현재 시대에 맞는 평가를 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다르빗슈 유)라는 의견과 “투수 분업제나 투구수 제한이 메이저 리그의 영향을 받고 진화했다면 사와무라상도 미국식으로 변하는 것이 괜찮지 않을까. 예를 들어 퀄리티 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 요소를 선정 기준에 추가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메이저 리그의 사이 영 상을 본받아 구원 투수까지 선정 대상으로 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초기 컨셉에서 벗어나더라도 모든 투수가 동경한다면 상의 권위는 높아질 것이다”(야마모토 마사)라고 컨셉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33][34]
2019년까지는 사와무라상 심사위원 다수가 선정 기준을 수정하는 것에 대해선 부정적이었지만[주 28] 최근 상황을 고려하여 선정위원회 좌장이던 호리우치 쓰네오는 2020년 선정위원회의 회견에서 선정 기준에 관해 신중하면서도 사와무라 에이지의 이름을 먹칠하지 않기 위해 미래에 걸쳐 전면적으로 선정 기준을 재검토하는 시기에 들어갔다고 밝혔다.[36]
“ | 나는 2008년에 선정 기준을 모두 채웠지만 21승을 거둔 이와쿠마 투수가 수상했다. 공동 수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결과에 만족한 사람은 이와쿠마 투수뿐이었다. 하지만 오프에 들어가자마자 하네다 공항 화장실에서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모 선배로부터 ‘자네는 젊으니까, 내년 이후에도 들어갈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들으면서 당시 내 나이가 22살이었지만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목표로 했던 타이틀이라 너무 아쉬웠다. 이듬해부터 사와무라상을 노리는 걸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25]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