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단(先農壇)이란 조선 시대에 임금이 직접 농사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농경에 관계되는 신농씨(神農氏)하고 후직씨(后稷氏)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8]
홍선표가 기술한 『조선요리학(朝鮮料理學)』(1940년)에 따르면 어느날 세종이 선농단에서 제를 지내고 친경(親耕) : 임금이 친히 전답을 가는 의식)을 하던 중에 갑자기 심한 비가 내려서 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한다. 비가 계속되자 배고픔을 못 견디어 친경 때에 쓰던 소를 잡아 맹물에 넣고 끓여서 먹었는데, 이것이 그 유래라고 한다.[3]
'선농단(先農壇)'하고 관련 있으니 '선농탕'이었던 것이 '설농탕' 등 음운변화를 거쳐서 '설렁탕'이 되었다는 것이다.[8]
또 다른 설은 『성종실록』에 보면 조선 성종이 성종 6년에 선농단(先農壇)에 제를 지낸후 백성들하고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다고 기록되어있다.[9] 이때에 식량공급을 늘리기 위해 가장 적은 재료를 사용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요리를 개발하라고 명했다는 설이 있다.[10]
그렇게 만들어진 국밥을 '선농탕'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11] 신하가 임금께 바친 헌시(獻詩) 중에 “살찐 희생의 소를 널리 베푸시니 사물이 성하게 일고······”[12]라는 시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선농단에서 탕을 끓여 함께 먹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1]
몽고 유래설도 있다. 13세기 전반기 몽고가 고려를 침공했을때, 소주와 함께 설렁탕이 전래되었다는 설이다.[4] 『몽어유해(蒙語類解)』에는 고기 삶은 물인 공탕(空湯)을 몽고어로는 슈루라고 한다고 되어 있고,[13] 『방언집석(方言輯釋)』에서는 공탕을 한나라에서는 콩탕, 청나라에서는 실러, 몽고에서는 슐루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실러, 슐루가 설렁탕이 되었다는 것이다.[11]
만주족 같은 수렵민족은 구이를 선호하고 몽고인과 같은 유목 민족은 장시간 삶거나 고아 먹는 것을 좋아한다.[14]
특히 많은 군사들이 한꺼번에 신속히 음식을 먹으려면 고기를 물에 끓여 먹어야 유리하다.[15]
한반도에 주둔했던 몽고군들이 맹물에 고기를 끓여서 먹던 조리법을 고려인들이 받아들인 것이다.[3] 그 외에도 오랫동안 ‘설렁설렁’ 끓인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11]
서울의 향토음식이자 크고 작은 식당에서 쉽게 먹을 수 있던 대중음식이었다. 주문하면 뚝배기에 밥을 담고 10시간 이상 끓여 우려낸 뜨거운 국물로 토렴하여 밥을 데운다. 그 다음에 채반에 놓여 있는 편육을 손님의 요구에 따라 집어넣고 뜨끈뜨끈한 국물을 듬뿍 부어 내주었던 패스트 푸드였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한우' 수탈을 위해 식용 소 사육을 장려하자 쇠고기가 돼지고기보다 쌌다. 그래서 설렁탕 값도 쌌고 평민들의 음식이 되었다.[21]
1924년 2월 10일자 매일신보의 기사 내용중에 '설렁탕은 실로 조선 음식계의 패왕'이라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10전, 1940년대에는 1949년 11월 4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설렁탕 광고 기사에 의하면 100원(소), 150원(중), 200원(대)이었다.[22] 2011년 전국 평균 가격은 6,700원으로 조사됐다.[23]
한때는 설렁탕의 뽀얀 국물의 모습을 흉내내기 위해 커피 프림이나 우유, 분유를 탄 가짜 설렁탕이 있었다.[24]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 주인공 김첨지가 아내를 위해 사 간 음식이 바로 설렁탕이다. 그러나 병들어 누워있던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울며 중얼거린다.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26]
MBC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소뼈로 국물을 우려내는 시간이 부족하자 타락(우유)을 넣어 부족한 맛을 보충하는 장면이 나온다.
KBS 다큐 '한식연대기' 2022년 9월 22일 방송에 따르면 음식 배달문화의 시조는 장국밥의 일종이었던 '설렁탕'이었다고 한다. 실제 당시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서울에는 설렁탕을 배달하는 배달부들이 많았다고 한다.
월간잡지 별건곤(別乾坤) 1929년 9월자에 설렁탕에 대해서 "집에 갈 노자돈이나 마누라 치마 사 줄돈이라도 안 사먹고 견디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27]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4403&cid=58987&categoryId=58987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설렁탕 - 조선 왕의 고깃국은 아니나 (팔도식후경, 황교익)].......설렁탕이 한국 외식시장에 크게 번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잡아먹을 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일제는 한반도의 소(그 당시에는 '조선우'라 하였다. '한우'라는 이름은 1950년대에 작명된 것이다)를 일소에서 고기소로 만들었다. 고기가 맛있고 번식을 잘하며 가죽의 질도 좋다 하여 적극적인 소 사육 정책을 폈다. 1930년대 말 한반도의 소는 180만 마리에 이르렀으며, 그 당시에는 쇠고기가 돼지고기보다 쌌다(그러니 설렁탕 값도 저렴했던 것은 당연지사). 1930년 동아일보 기사에 보면 경성 시내 음식점 조합이 음식 가격을 일제히 내리기로 하였는데, 냉면, 장국밥, 어복장국, 떡국, 대구탕반 등은 15전으로 정한 데 비해 설렁탕은 10전으로 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6.25 전쟁을 거치면서 소 사육 기반이 무너지는 바람에 쇠고기 가격은 올랐고, 설렁탕 값도 올랐다. 설렁탕이 몸에 좋은 음식인양 포장된 것은 이때부터의 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