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世紀와 더불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석이었던 김일성의 회고록이다. 하지만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의 저자인 마이클 브린은 자신의 책에서 이 책의 일부 내용이 대필되었을 수 있다는 의견을 주장했다. 김일성 회고록 편찬에 직접 간여했던 황장엽은 김일성 본인이 아닌 중앙당 선전부 소속 작가들이 집필했고, 당역사연구소의 일꾼들 1, 2명 참가하여 고문 역할을 했다고 하였다.[1]
김일성은 1991년경부터 회고록 저술에 관한 구상을 시작하였고,[출처 필요] 1992년에 《세기와 더불어》 첫 번째 판이 출판되었다. 이후 회고록은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 여러 번 출판되었고, 조선외국문도서출판사에서는 이 책의 영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번역판을 출판했다.
1997년에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은 북한에 있을 때 김일성 회고록 편찬에 직접 간여한 바 있는데, 저서 「북한의 진실과 허위 (시대정신, 2006)」에서 김일성 회고록 집필 당시의 일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다.[1]
혁명전통을 과장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데서 김정일은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항일 무장투쟁을 주제로 하는 많은 소설과 영화를 만들어 내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임춘추를 비롯한 항일 빨치산들 참가자들이 쓴 회상기를 회수해버렸다. 그것은 빨치산 참가자들이 아무리 김일성을 우상화하여 회상기를 쓴다하여도 실수하여 때때로 진실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가 아니라 소설가들이 생각해낸 허구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게끔 이끌어 나갔다. 이러한 문학작품들은 그것을 김정일이 직접 지도하여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김정일 노작’과 같은 권위를 부여하였으며 당 조직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다 읽도록 하였다. 그러다 보니 소설이나 영화에 나온 사실들을 모든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기초하여 『세기와 더불어』라는 김일성의 회고록이 나오게 되었다.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소설과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들은 다 중앙당 선전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선전부는 자기들이 김일성의 회고록을 쓰겠다고 주장하였으며, 당역사연구소는 회고록을 쓰는 것은 당역사연구소의 과업이라 하면서 이 사업을 당역사연구소가 주관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김정일의 결론에 따라 당역사연구소가 김일성 회고록 집필을 주관하게 되고 선전부가 작가들을 동원해 주기로 하였다. 실제로 회고록을 집필한 것은 작가들이었으며 역사연구소의 일꾼들은 1, 2명 참가하여 고문의 역할을 하였다. 이 사업은 김일성을 우상화하고 혁명전통을 과장하는데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같이 우상화 선전의 내막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회고록을 믿지 않았지만 일반대중들은 소설에서 읽고 영화에서 본 사건들이 재미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회고록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역사연구소에서는 이런 성과에 고무되어 만세를 불렀으며 항일 빨치산투쟁시기뿐 아니라 해방 후 시기를 포함하는 대규모의 회고록 출판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게 되자 회고록 출판사업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나는 단호하게 회고록 출판사업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에도 회고록을 문학전문가들이 너무 재미나게 썼기 때문에 사람들이 본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을 수 있었는데 죽은 다음에도 그런 투로 회고록을 발표하게 되면 이전에 출판한 것까지도 사람들이 믿지 않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명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회고록 속편을 만들어 김정일에게 올렸는데 그는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하였다. 회고록 출판사업은 김일성 사망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위조가 과연 효과를 낼 수 있겠는가? 이들은 역사는 결국 사실대로 밝혀지게 마련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황장엽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이미 노쇠한 김일성이 방대한 분량의 회고록을 직접 집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작가들이 집필한 회고록은 해방 이후 출판된 각종 김일성 전기와 빨치산 회상기들을 참고했을 것이다. 이전에 간행된 김일성 전기류나 소위 혁명역사서들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다.[3] 이런 것들을 토대로 쓰인 김일성 회고록 내용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여러 사람들이 비판을 하고 문제 제기를 하였다.[4][5][6] 세세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회고록에는 김일성의 중국공산당 가입 사실이나, 동북인민혁명군 및 동북항일연군의 하급 전사와 중급 간부로 활동한 전력, 일본군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피하여 소련군에 5년간 복무한 사실 등은 모두 감추고,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존재하지 않았던 날조된 부대를 지휘하여 수많은 대소 전투에서 모조리 큰 승리를 거두고, 종국에는 북조선을 해방시킨 것으로 각색하였다.
회고록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김일성이 소련으로 넘어간 후인 1942년에 자신이 소속했던 부대 동북항일연군 1로군이 만주에서 벌인 투쟁의 역사와 성격에 대해 자술한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 第一路軍 略史)"[7]가 자신의 투쟁에 대해 스스로 내린 비교적 솔직한 평가로 볼 수 있다. 이 문건을 출판하면서 중국 당국이 필자의 이름 김일성을 삭제시켰는데, 만주 빨치산들의 행적을 연구해온 재일교포 김찬정(金贊汀)씨는 중국의 조선족 역사학자 김우종이 원래 필자가 김일성으로 되어 있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한다. 또 일본의 중국 유학생에게 항련제1로군 약사를 번역하게 했더니, 문장이 수준이 낮고 말이 연결이 안 되는 부분이 많다고 했다한다.[8]
1942년 당시는 그가 북한 지도자가 되리라고는 꿈도 못꾸던 시절이므로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과장이나 미화는 거의 없다. 이 문건에는 조선독립이란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으며, 자신의 혁혁한 항일전공으로 내세우는 보천보 사건도 조선인민혁명군도 나오지 않는다. 그가 중공당원으로 만주 실지회복을 위한 중국인들의 투쟁에 동참하여 열심히 싸웠으나 최종적으로 패배했다는 것을 솔직히 시인하고 있다. 어릴 때 중국으로 가서 거기서 성장하고 교육받아 중국에 동화된 조선인, 즉 조선 사람이 아닌 만주의 조선족에 해당하는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 있다. 해방 당시 그가 중국말에는 능하나 조선말은 심하게 더듬거렸다는 것도 이런 것에 연유한다. 비단 김일성 뿐만 아니라 항일연군에 참여한 조선인 대다수도 비슷한 성격의 사람들이었다. 해방 후 소련군의 간택을 받아 북한 핵심 권력층이 된 소수를 제외하면 조선인 빨치산 거의 모두가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고, 한국으로 온 사람은 단 한명도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항일연군시절 김일성의 수하였던 여영준(呂英俊)은 당시 김일성이 해방이 되면 중국 공산당이 안투 현장(安圖縣長) 정도를 시켜주길 원했다고 증언하였다.[9] 이런 말은 결국 당시 김일성은 혈통만 조선인일 뿐 사실상 중국에 동화된 중공 당원으로 일본이 패망해도 만주에서 행세하기를 원하는 중국인이었고, 그의 항일 투쟁이란 것도 중국을 위한 것이었을 뿐 조선 독립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증거이다. 여영준 본인은 북한으로도 가지 않고 중국인인 만주의 조선족이 되었다. 일본군에 쫓겨 소련으로 도망가서는 또 중국보다 앞선 소련의 군인으로 출세하기를 원했다.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전령병이었던 리을설(李乙雪, 1921-2015)도 김일성이 죽고 난 다음부터 강연 다닐 때 소련 시절의 김일성은 소련서 살고 싶어 했고, 국내로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였다.[10] 당시 그는 조선 독립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소련군 내에서 출세하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11]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직후 평양에서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 사상을 가르친 박일(朴一) 전 김일성대 부총장은 "김일성이 주로 중국에서 빨치산활동을 한 탓인지 사물을 판단하는 데 우선 중국어로 궁리하는 습관이 있어 교육에 애로가 많았으며 1백여편의 그의 연설문을 작성할 때 金(김)의 지적능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12] 박씨는 『김은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의 한국말은 형편없이 서툴러 그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면서 김이 어렸을 때부터 중국인들 사이에서 자랐다고 설명했다.[13] 김일성이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등장한 1945년 10월 14일의 집회에 참석했던 김재순(金在淳, 1923~2016) 전 국회의장도 당시 노장군을 기대했던 평양 시민들이 새파란 젊은 김일성을 보고 가짜라고 실망했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했다고 증언한다.[14] KGB장교였던 레오니드 바신은 제1차 조선공산당대회를 앞두고 김일성의 연설문을 만들어주는 일을 했는데, 조선인 출신 소련군장교들은 김일성이 중국어는 꽤 잘 하지만, 조선어 지식이 매우 부족해서 상황에 적절한 연설문 작성에 애를 먹었다고 하였다.[15]
↑해방전 김일성은 소련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김씨 일가의 호위총사 리을설의 증언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6-11-01 : 김일성은 낙후한 북한에 돌아오기보다 그나마 자본주의를 거친 소련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 연안파들을 견제하고 북한을 세력권 안에 넣으려는 소련군의 요구로 조국이 해방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귀국했다는 것입니다.
↑김충석, 소련 극동군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북한 정치에서 제88여단파의 기원과 형성 역사연구 제30호, 2016.6, p.45 가브릴 코로트코프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175~176]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 따라 金日成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