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요시히로 島津 義弘 | |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영정. 쇼코슈세이칸(尚古集成館) 소장. *尚古集成館: 가고시마시(市) 요시노정(吉野町) 소재(所在) | |
마루에 열십자 | |
제17대 시마즈가 당주 | |
재임 | 1587년 ~ 160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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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 시마즈 요시히사 |
후임 | 시마즈 이에히사 |
신상정보 | |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말기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덴분 4년 음력 7월 23일(1535년 음력 7월 23일) 사쓰마 이자쿠성(伊作城) |
사망 | 겐나 5년 음력 7월 21일(1619년 7월 21일) 사쓰마 가지키성(加治木城) |
개명 | 다다히라(忠平)→요시타카(義珍)→요시히로(義弘)→이신사이(惟新斎:은거 후)→시테이(自貞:출가 후 법명) |
별명 | 마타시로(又四郎-통칭), 귀신시마즈(鬼石曼子) |
신호 | 精矛厳健雄命 |
계명 | 묘엔지도노마쓰레이시테이안슈(妙円寺殿松齢自貞庵主) |
주군 | 시마즈 요시히사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데요리 |
관위 | 효고노카미(종5위하), 시종(종4위하), 참의(정3위:사후 증위) |
씨족 | 시마즈씨(島津氏) |
부모 |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 |
형제자매 | 형: 요시히사(義久), 동생: 도시히사(歳久), 이에히사(家久)[1] |
배우자 | 정실: 혼고 다다타카(北郷忠孝)의 딸, 측실: 가메토쿠(사가라 하루히로의 딸), 미도후진(소노다 사네아키의 딸) |
자녀 | 장녀 오야지(혼고 스케히사에게 시집, 시마즈 도모히사에게 재가), 쓰루주마루(鶴寿丸), 히사야스(久保), 다다쓰네(忠恒: 이에히사(家久)로 개명), 만치요마루(万千代丸), 다다키요(忠清), 막내딸 고미카(이주인 다다자네의 부인, 시마즈 히사모토에게 재가) |
묘소 |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이케노우에 정(池之上町) 하세바고 묘(長谷場御墓) |
시마즈 요시히로(일본어: 島津 義弘, 덴분 4년 음력 7월 23일(1535년 음력 7월 23일) ~ 겐나 5년 음력 7월 21일(1619년 7월 21일))는 센고쿠 시대에 태어나 에도 시대 초창기까지 활약한 무장, 다이묘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제4번대 소속으로 조선 반도에도 건너왔으며,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의 일본측 지휘관으로 남원성 점령 당시 심당길 등 조선의 도공 80명을 일본에 강제 연행했던 일 등으로 한국에서도 악명이 높다.[2]
그의 집안은 약 200여 년 조상 대대로 사쓰마 지방의 슈고 다이묘였으며, 시마즈씨의 17대 당주(堂主)이자, 에도 시대 사쓰마번 초대 번주 시마즈 이에히사(:통칭 다다쓰네,일본어: 島津家久)의 아버지이다.
1535년(덴분 4년) 음력 7월 23일 시마즈 다카히사(일본어: 島津貴久)의 차남으로 태어났다[3]. 성인식 때 부여된 이름은 다다히라(忠平)였지만 후일 정이대장군직에 오른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이름 중 한 글자를 하사받고 요시타카(일본어: 義珍)로 바꿨다[4].
1554년(덴분 23년) 아버지 다카히사, 형 요시히사와 함께 오스미 지방[5]의 이와쓰루기(일본어: 岩劍) 공략전에 처녀 출전했다.
1557년(고지 3년) 오스미 지방의 호족 가모씨(蒲生氏) 토벌전에서 처음 적의 수급을 베고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자신 역시 화살 5발을 맞는 중상을 입은 끝에 거둔 승리였다[3].
1560년(에이로쿠 3년) 음력 3월 19일 휴가 지방[6]의 슈고 다이묘인 이토 요시스케(일본어: 伊東義祐)의 침입으로, 오비성(일본어: 飫肥城)의 친척 시마즈 다다치카(일본어: 島津忠親)가 위기에 처했는데 종가 회의 전체의 결정으로 요시히로의 입양이 결정되었다. 그에게 할당된 얼마간의 병력과 함께 오비성에서 농성했다.
1562년(에이로쿠 5년) 버티길 1년여, 이번엔 사마즈 본가가 오스미 지방의 다이묘 기모쓰키(일본어: 肝付) 일족의 공격을 받게 되자 본가로 돌아가야 했는데 오비성이 얼마 더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면서 입양됐던 일도 흐지부지됐다.
1563년(에이로쿠 6년) 오스미 북부의 기타하라(北原)가 휴가의 다이묘 이토 요시스케에게 점령되자 곧 요시히로가 다시 탈환했으며 그 때부터 기타하라씨의 이이노성(일본어: 飯野城)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다[3].
1566년(에이로쿠 9년) 이토 요시스케가 이노성을 재탈환할 목적으로 미쓰야마산에 교두보를 건설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급히 큰형 요시히사, 동생 도시히사(歳久)(일본어: 歳久)와 함께 완공 직전에 함락시켰다. 그런데 때마침 이토의 원군이 도착하면서 재편성을 마친 이토의 부대에 의해 성안으로 쫓겨들어가 고립됐다. 미처 미완공된 성벽은 방어력이 없어 절망적인 전투를 강요당해야 했고,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한 지경에서 겨우 퇴로를 뚫고 삼형제 모두 사지를 빠져나왔다.이후 삼형제중 한명이 고니시와 연애를 한다.
1566년(에이로쿠 9년), 하쿠유(伯囿)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승이 되어 은거 한 아버지 다카히사의 뒤를 이어 큰형 요시히사가 16대 당주 자리에 올랐다. 지략이 뛰어나기로 규슈에서 유명했던 형[3][7]을 보좌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마즈씨의 세력확대에 절대적인 공헌을 시작했다.
1572년(모토카메 3년), 기사키하라의 전투에서 숙적 이토 요시스케의 3천의 대군을 300명에 불과한 병사로 요격했다. 이 전투는 후일 규슈의 오케하자마 전투로 불린다.
1577년(덴쇼 5년)에는 이토 요시스케를 휴우가 지방에서 몰아내고 규슈 남부를 제패했다. 이토씨 북규슈의 오토모씨에게 귀순한다.
1578년(덴쇼 6년)에는 미미카와(耳川) 전투를 진두 지휘, 분고[8] 방면에서 쳐들어온 규슈 북부의 패자(覇者) 오토모 소린을 격퇴했다.
1581년(덴쇼 9년)에는 히고 지방[9]의 슈고 다이묘 사가라씨(相良氏) 일족이 시마즈 씨에게 귀순했고, 공석이 된 히고 슈고직에 그가 임명됐다. 원래 거점이었던 이노 성에서 사가라 일족의 근거지였던 야시로성(八代城)으로 옮겨 아소씨(阿蘇氏) 등 규슈 중부의 반 시마즈 세력들을 정리하고 분고 지방으로 쳐들어가 규슈 북부 오오토모 일족의 영토를 하나하나 점령해 들어갔다. 그는 다이묘였던 형을 대신하여 사쓰마 군의 총대장으로서 직접 진두에서 승전을 거듭했다.
1587년(덴쇼 15년) 음력 4월 17일 파죽지세로 규슈 통일을 목전에 두게 된 시점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일본어: 豊臣秀吉)가 보낸 10만 연합 규슈 원군과 네시로자카(일본어: 根白坂) 언덕에서 맞닥뜨렸다. 이때 요시히로는 총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칼을 뽑아들고 뛰어들어야 했을 정도로 전황은 어려웠고, 분전을 거듭했으나 상식적으로도 일개 사쓰마 지방의 병력으로는 일본을 거의 통일한 도요토미 연합군과 애당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윽고 음력 5월 8일에 형 요시히사가 먼저 항복했다. 요시히로의 시마즈군 본대는 수 만 병력에 포위돼 이 사실조차 몰랐고, 마지막 결전만을 앞둔 상태에서 5월 22일 형이 직접 항복을 설득하러 오자 장남 히사야스(久保)를 인질로 보낸 후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 히데요시는 원래 시마즈씨의 영지였던 사쓰마[10], 오스미[5] 지방에 휴가(日向) 지방까지는 시마즈 씨의 영지로 인정해줬다. 도요토미 치하에서도 시마즈 씨는 규슈 남부 전체를 수중에 넣게 됐다.
패전의 결과, 형 요시히사가 모든 책임을 지고 출가했다. 스님이 된 형의 후임으로 요시히로가 뒤를 이어 17대 당주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일 뿐으로 형이 시마즈씨 집안의 정치 군사적 실권을 계속 쥐고 있어 정식적인 다이묘 이임식조차 없었다고 한다. 일각에선 다이묘 직 이임이 히데요시와 그의 측근들의 기획으로서 형제가 권력다툼으로 서로 싸우게 되면 영지를 바로 몰수할 심산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1588년(덴쇼 16년) 관백[11]에 오른 히데요시가 요시히사, 요시히로 형제를 교토로 불러올렸다. 같이 상경(上京)[12] 한 형제는 천황에 이어 히데요시를 배알했고, 이 때 요시히로는 원래 히데요시의 성씨인 하시바씨와 일본 유수의 귀족 성씨인 도요토미씨를 하사받은 반면 형에겐 하시바 글자만 하사됐다. 히데요시의 시마즈 분열책은 그 이후로도 계속됐지만 시마즈 형제는 평생 결속을 풀지 않았다[13][14].
이후 요시히로는 도요토미 정권에 대해 협력적인 자세로 전향해 1592년 임진왜란 때부터 1597년 정유재란까지 조선반도에서 침략전을 수행했다. 임진왜란 준비 단계에 히데요시에게 1만여 장병의 차출을 명[15] 받았으나, 사쓰마 번의 내부 모순 등으로 인한 농민 봉기로 1만명을 채 동원하지 못하고 기일을 한참 넘겼다. 이 탓에 4번대 총대장 모리 가쓰노부(毛利勝信)[16] 밑으로 배속돼 길이 험한 강원도로 진군해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인 1593년 음력 9월에는 후계자 히사야스(久保)를 조선 진중에서 풍토병으로 잃었다.
정유재란(1597년)에는 1천여 척의 일본 전선들이 총집결, 연합 함대가 조직됐는데 시마즈 군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수군에 배속돼 칠천량 해전을 치렀다. 조선함대는 거제도 앞바다에 모두 수장됐고 삼도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이 전사했다. 음력 8월에는 남원성 전투를 지휘했으며, 휘하 장수들과 함께 왜군 수뇌부들이 모인 전주회의에 참석한 후 충청남도 부여까지 일단 북상했다가 전라북도 정읍을 경유, 전라남도 해남까지 남하했다. 그 후 음력 10월 말에는 경상남도 사천 방어에 투입돼 성까지 지었으며 현재 선진리성이란 이름으로 터가 남아있다.
1598년 봄 사천성 전투에서 단 7천 명으로 조명연합군 4만명을 격파했다. 음력 8월 18일 히데요시의 사망에도 불구, 병사들의 사기와 명나라와의 강화 교섭을 위해 그의 죽음을 숨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에 본국 후퇴령이 하달됐다. 음력 12월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일본어: 小西行長)를 구출하기 위해 5백 척의 함대가 출동했으나, 훗날 노량 해전이라 불리는 이 전투에서 조·명 연합 함대와 야간 해전을 벌였고 갑문포로 유인당해 포위공격을 당한 끝에 겨우 50여 척 만이 도주했을 정도로 처참한 패전을 겪었다. 이때 조선군의 이순신과 명군의 부장 등자룡 등이 전사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성 전투에서 "위세를 떨치고 군사를 거두어 돌려오는 것을 용이하게" 한 공으로 가장 으뜸되는 공훈을 인정받아 봉읍 4만석을 하사받았다.[17]
1600년 귀국한지 2년이 채 안된 시점에서 히데요시의 후계자리를 놓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대항해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서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시다 미쓰나리는 고작 1천 5백명의 병력이었던 사쓰마 군에 대해, 명색이 다이묘가 병력이 1만도 안되냐며 마구 꾸짖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줬다고 한다. 이후로도 계속 둘은 이견을 보이며 충돌을 거듭한 모양으로, 한 번은 요시히로가 미쓰나리에게 직접 기습작전을 건의했으나 고작 그 병력으로 말이 많다는 면박을 당한 일도 있었다. 전세는 결국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잇다른 배신으로 승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쪽으로 기울었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전황 파악 후 적진을 정면으로 돌파 철수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1,500명의 병사 중 300여명만이 살아남는 비극 속에, 그나마도 집요한 동군의 공격을 받아 사쓰마로 최종 탈출한 인원은 8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도쿠가와 측의 승리로 에도 막부가 자리잡자,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쓰마 번은 이이 나오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화해를 도모하는 한편,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을 바탕으로 군비를 증강한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주축으로 한 사쓰마 토벌군을 보내지만 번번이 패하였고, 장기전으로 막 출범한 막부 위신의 손상을 우려한 이에야스는 정벌 중단 명령을 하달했다.
1602년 결국 쇼군 이에야스에게 아들 다다쓰네를 인질로 보내는 조건하에 영지를 보존받을 수 있었고 그의 집안은 유력 도자마 다이묘로서 에도 시대에도 존속하게 됐다. 1619년 음력 7월 21일 요시히로는 오스미 가지키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85세.
전임 시마즈 요시히사 |
제17대 시마즈가 당주 1587년 ~ 1602년 |
후임 시마즈 이에히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