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제1동 始興第1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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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제1동주민센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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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Siheung 1(il)-dong |
행정 | |
국가 | 대한민국 |
지역 | 서울특별시 금천구 |
행정 구역 | 56통, 535반 |
법정동 | 시흥동 |
관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대로58길 36 |
지리 | |
면적 | 1.71 km2 |
인문 | |
인구 | 32,715명(2022년 2월) |
세대 | 15,150세대 |
인구 밀도 | 19,100명/km2 |
지역 부호 | |
웹사이트 | 금천구 시흥1동 주민센터 |
시흥제2동 始興第2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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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제2동주민센터 | |
로마자 표기 | Siheung 2(i)-dong |
행정 | |
국가 | 대한민국 |
지역 | 서울특별시 금천구 |
행정 구역 | 33통, 233반 |
법정동 | 시흥동 |
관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금하로 764 |
지리 | |
면적 | 1.26 km2 |
인문 | |
인구 | 21,159명(2022년 2월) |
세대 | 8,763세대 |
인구 밀도 | 16,800명/km2 |
지역 부호 | |
웹사이트 | 금천구 시흥2동 주민센터 |
시흥제3동 始興第3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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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제3동주민센터 | |
로마자 표기 | Siheung 3(sam)-dong |
행정 | |
국가 | 대한민국 |
지역 | 서울특별시 금천구 |
행정 구역 | 22통, 190반 |
법정동 | 시흥동 |
관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대로18길 40 |
지리 | |
면적 | 1.07 km2 |
인문 | |
인구 | 10,756명(2022년 2월) |
세대 | 4,950세대 |
인구 밀도 | 10,100명/km2 |
지역 부호 | |
웹사이트 | 금천구 시흥3동 주민센터 |
시흥제4동 始興第4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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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제4동주민센터 | |
로마자 표기 | Siheung 4(sa)-dong |
행정 | |
국가 | 대한민국 |
지역 | 서울특별시 금천구 |
행정 구역 | 34통, 253반 |
법정동 | 시흥동 |
관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로36길 14 |
지리 | |
면적 | 0.87 km2 |
인문 | |
인구 | 20,233명(2022년 2월) |
세대 | 9,475세대 |
인구 밀도 | 23,000명/km2 |
지역 부호 | |
웹사이트 | 금천구 시흥4동 주민센터 |
시흥제5동 始興第5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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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제5동주민센터 | |
로마자 표기 | Siheung 5(o)-dong |
행정 | |
국가 | 대한민국 |
지역 | 서울특별시 금천구 |
행정 구역 | 41통, 313반 |
법정동 | 시흥동 |
관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금하로21길 20 |
지리 | |
면적 | 1.39 km2 |
인문 | |
인구 | 19,101명(2022년 2월) |
세대 | 9,724세대 |
인구 밀도 | 13,700명/km2 |
지역 부호 | |
웹사이트 | 금천구 시흥5동 주민센터 |
시흥동(始興洞)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금천구에 위치한 법정동이다. 이름 때문에 경기도 시흥시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991년 고려 성종이 고을의 별호를 시흥(始興)으로 했다 한다. 이때부터 비로소 시흥이란 명칭이 공식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시흥이란 말은 “일어나다”, “뻗어나다”, “으뜸이 되다”라는 뜻이다. 고구려때의 지명인 ‘잉벌노’(仍伐奴)의 ‘잉벌’은 ‘늠’으로, ‘느르→늘→늣→늠’의 음전이로 ‘연장’(延長)을 뜻한다. ‘노’(奴)는 ‘내’의 음차로 ‘흙’ 또는 ‘평지’를 뜻한다. 그래서 시흥과 잉벌노는 그 의미가 서로 통함을 알 수 있다. 이 고을은 공식 행정명칭이기 이전부터 시흥이라 불리게 되었고 금주현에 이어 1413년 조선 태종 13년에 ‘금천’(衿川)으로 개명된 후에도 별명으로 시흥이라 불렸다.[1]
1795년 조선 정조 19년에 ‘시흥현’으로 개명되면서 종 6품 현감이 종 5품 현령으로 승격되었다. 정조는 수원에서 있는 현륭원에 전배하기 위해 1790년부터 1800년까지 11년동안 12차례 능행을 했다. 정조는 동화문을 통하여 남대문, 한강대교, 장승백이, 신대방3거리, 신대방1동(시흥대로)을 경유하여 금천구 관내에 들어섰다. 구로공단 전철역앞 도림천과 시흥대로 교차점에 마장천다리(당시는 도림천을 마장천이라 했음)가 있었는데 정조임금은 이곳을 지나 문성골(현재의 문성초등학교가 있는 지역의 옛 고을명)을 거쳐 수천 참발소 앞길(시흥고개)을 통과하여 부장천 다리를 지나서 시흥현 관아에 머물렀다. 그 후 박산(박미)을 거쳐 염불교(안양유원지 입구)를 거쳐 수원으로 향했다. 그래서 정조 때에는 이 관아가 행궁(行宮)으로서 매우 중시되는 격을 올리면서 행정구역 명칭도 시흥으로 바꾸었다.[1]
경기도 양주에 있다가 서울 왕십리로 이장한 흥선대원군의 서장자 완은군 이재선의 묘가 1909년(융희 3) 12월 7일 흥친왕 이재면과 이준용에 의해 시흥군 동면 시흥리 2통 3호, 지금의 시흥동으로 이장되었고[4], 이재선의 부인인 군부인 신씨 역시 현재의 시흥동인 시흥리 2통 3호 근처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완은군 이재선의 묘의 위치는 실전되었다.
짱구는 못말려의 로컬라이징 한국 배경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