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치 기이치(일본어: 愛知 揆一, あいち きいち, 1907년 10월 10일 ~ 1973년 11월 23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아이치는 1907년 도쿄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도호쿠 제국대학의 교수로, 1923년에 식중독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으며, 전후에 관방장 (官房長), 은행국장으로 일하였다.
1950년, 자유당 소속으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대장성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이케다 하야토에게 높게 평가되어 1953년, 이케다·로버트슨 회담에서 정부 대표를 맡았다. 1954년, 제5차 요시다 내각의 통상산업 대신 겸 경제 심의청 장관, 제1차 기시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 제2차 기시 내각에서 법무대신 및 자치성 (自治省) 대신을 지내고, 제3차 이케다 개조 내각에서 문부대신 및 과학기술청 대신을 지냈다.
그 후, 사토파 (派) 에 속해, 다나카 가쿠에이, 호리 시게루, 마쓰노 라이조 (松野頼三), 하시모토 도미사부로와 함께 사토파 5봉행 (佐藤派五奉行) 이라고 불렸고, 사토 내각 성립 후에 내각관방장관과 외무대신을 역임하였다. 외상 시절에는 오키나와 반환에 관한 미·일 교섭을 담당해 오키나와 반환 협정 체결에 공헌하였다.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에서 물러날 때에는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하였고, 1972년, 제2차 다나카 내각에서 대장대신이 되었다. 1973년 스미소니언 협정이 붕괴를 보이는 중, 엔의 변동 환율제에의 이행이 결정돼 외환 거래가 크게 전환되는 상황을 일으켰고, 일본 열도 개조론 (日本列島改造論)[1]에 의해 경기과열에 따른 심한 물건 부족과 인플레이션, 제4차 중동 전쟁에 의해 일어난 제1차 유류 파동의 표면화, 산유국에서의 석유 공급 삭감으로 인플레이션과 물건 부족의 정도가 심해지자, 재정부 장관 아이치는 적극적으로 각 국을 방문하여 경제 외교를 추진하였다.
1973년, 아이치는 급성 폐렴으로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당시 총리였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내각 개조를 단행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제1차 개조 내각), 후임 재정부 장관에 균형재정론자인 후쿠다 다케오를 앉혀 일본 경제 동향에 영향을 주었다.
사위 아이치 가즈오 (愛知和男)는 중의원 의원으로, 환경청 장관, 방위청 장관을 지냈으며, 손자 아이치 지로 (愛知治郎)는 참의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