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치노가타 お市の方 | |
---|---|
본명 | 이치히메, 히데코 |
출생 | 1547년? |
사망 | 1583년 6월 14일 |
성별 | 여성 |
국적 | 일본 |
배우자 | 아자이 나가마사, 시바타 가쓰이에 |
오이치노가타(일본어: お
에이로쿠 10년(1567년) 혼인 동맹의 일환으로 오빠인 노부나가의 명에 따라 오미 국 아자이 가문의 당주인 아자이 나가마사와 결혼하였다. 비록 정략 결혼이었으나 부부의 사이는 매우 화목하여 둘 사이에서 아들 만보쿠마루(萬福丸)[2]와 딸 차차(茶々), 하쓰(初), 고우(江)를 두었으며, 특히 이 세 딸은 각각 도요토미 히데요시, 교고쿠 다카쓰구,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혼인하여 '아자이 3자매'로 유명해졌다.
겐키 원년 노부나가 측에서 약속을 어기고 아자이 가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에치젠의 아사쿠라 가문을 공격하면서 동맹이 파기되고 아자이 가문과 오다 가문은 적 관계로 돌변하였다. 그러나 이후 지속적으로 오다 측에 밀리던 아자이 가문은 덴쇼 원년(1573년) 본성 고다니 성(小谷城)을 잃었고, 당주인 나가마사와 나가마사의 부친 히사마사(久政)의 자결, 그리고 나가마사의 장남 만보쿠마루의 살해로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남편과의 사이가 매우 좋았던 오이치는 나가마사를 따라 자결코자 하였으나 나가마사의 만류와 노부나가의 설득으로 세 딸들과 함께 오다 가문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약 9년간 오다 가문의 성인 기요스성에 머물렀던 네 모녀의 처우는 상당히 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또 다른 형제인 오다 노부카네(織田信包)는 투항하면 새 영지를 주겠다는 노부나가의 파격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속한 진영에 대한 의리를 지켜 자결을 택한 나가마사의 행동에 큰 감명을 받고, '아자이 가문의 핏줄이 끊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적극적으로 세 조카딸을 보호해 주었다.
노부나가의 사후 덴쇼 10년(1582년) 가문의 가신인 시바타 가쓰이에와 재혼하였다. 무공이 뛰어나고 오다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던 가쓰이에는 노부나가가 죽고 오다 가문이 분열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주변으로 세력이 형성되자 이에 반기를 들었으나,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결국 자신의 성인 기타노쇼 성에서 자결하였다. 히데요시는 오이치에게 항복하고 성을 빠져나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오이치는 이를 거부하고 남편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