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위키백과의 편집 지침에 맞춰 다듬어야 합니다. (2021년 8월 5일) |
유키 히데야스/마쓰다이라 히데야스 結城 秀康/松平 秀康 | |
유키 히데야스상(슌코쿠도 주산, 시손소장) 사진은 그것을 도쿄대학 사료편찬소가 모사한 것 | |
도모에 | |
제1대 에치젠 기타노쇼번주 1601년 ~ 1607년 | |
신상정보 |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
출생 | 덴쇼 2년 음력 2월 8일(1574년 3월 1일) |
사망 | 게이초 12년 음력 4월 8일(1607년 6월 2일) |
개명 | 기이마루(義伊丸), 오기마루(於義丸) → 하시바 히데야스(羽柴秀康) →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 히데토모(秀朝) → 히데야스(秀康) → 마쓰다이라 히데야스(松平秀康) |
별명 | 에치젠쿄(越前卿), 에치젠 고몬(越前黄門), 에치젠 사이쇼(越前宰相), 유키 쇼쇼(結城少将) |
막부 | 에도 막부 |
번 | 시모사 유키번주 → 에치젠 기타노쇼번주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데요리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관위 | 종5위하 지주 미카와노카미 종4위하 사코노에곤쇼쇼 종3위 곤추나곤 정3위 증 정2위 |
씨족 | 도쿠가와씨 → 하시바씨 → 유키씨 →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
부모 |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어머니: 오만노가타(於万の方, 나가미 요시히데永見吉英의 딸) 양부: 도요토미 히데요시, 유키 하루토모(結城晴朝) |
형제자매 | 형: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동생: 도쿠가와 히데타다, 마쓰다이라 다다요시, 다케다 노부요시,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도쿠가와 요시나오, 도쿠가와 요리노부, 도쿠가와 요리후사 |
배우자 | 정실: 쓰루코(鶴子, 유키 하루토모의 양녀, 에도 시게미치의 딸) |
자녀 |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다다마사, 기사히메(喜佐姫, 모리 히데나리의 정실), 나오마사, 나오모토, 나오요시 |
유키 히데야스/마쓰다이라 히데야스(일본어: 結城 秀康 ゆうき ひでやす[*], 松平 秀康 まつだいら ひでやす[*], 덴쇼 2년 음력 2월 8일(1574년 3월 1일) ~ 게이초 12년 음력 4월 8일(1607년 6월 2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의 다이묘이다. 에치젠 후쿠이번의 초대 번주를 지냈다.
덴쇼 2년(1574년) 2월 8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으로 도토미국 하마마쓰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에야스의 거성인 하마마쓰성이 아닌 성하 敷知郡의 우부미촌(宇布見村)에서 태어났다. 생모는 미카와 출신으로 池鯉鮒明神을 모신 지류 신사(知立神社)의 샤닌(社人)이었던 나가미 요시히데(永見吉英)의 딸이자 이에야스의 측실인 오만노가타(於万の方, 조쇼인長勝院)이다.
오만은 원래 이에야스의 정실 쓰키야마도노의 시녀로, 오만이 히데야스를 임신하자 쓰키야마도노의 분노를 두려워한 이에야스가 중신 혼다 시게쓰구에게 보내 아이를 낳게 하였다.[1] 히데야스는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의 후손으로 당시 우부미 마을에 거주하며 이마가와 씨(今川氏) 시절부터 현지의 대관(代官)이나 하마나 호수(浜名湖) 주변의 선박과 군량미 업무를 맡았던 영주 나카무라 마사요시(中村正吉)의 저택에서 태어났는데, 이 때 부친 이에야스가 나카무라 마사요시의 집에 직접 심은 소나무 「히데야스의 배내옷 무덤」(秀康の胞衣塚)이 현존하는 마사요시의 저택(건축물은 에도 초기에 세워짐) 경내에 남아 있다.[2] 이러한 인연으로 에도 막부 이후 역대 후쿠이번(福井藩) 번주들은 산킨코다이(参勤交代) 때마다 나카무라 가문에서 대접받는 관례가 이어지고 있다.
또한 히데야스는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3] 아명은 오기마루(於義丸)이다.[4]
어린 오기마루는 이에야스의 미움을 받아 만3세 때까지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고, 이복형 노부야스(信康)가 오기마루를 가엾게 여겨 아들로 인정하도록 이에야스를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히데야스를 냉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에야스의 정실로 노부야스의 생모이기도 한 쓰키야마도노(築山殿)를 두려워해서였다고도 하고,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에도 초기인 간에이(寛永) 11년(1634년)에 편찬된 『나카무라가 어유서서』(中村家御由緒書)에는 「혼다 사쿠사에몬(本多作左衛門)이 이에야스에게 자세한 상황을 말씀드린 바, 이에야스는 무언가를 생각해두던 것이 있어 따르기 어렵다 하시니」라고만 적혀 있고, 이를 연구한 일본의 향토사학자 오구스 가즈마사(小楠和正)는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와의 전투와 직면해 있었던 이에야스로써는 히데야스를 하마마쓰성(浜松城)으로 데려올 기회도 대면할 기회도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덴쇼(天正) 7년(1579년) 다케다 가쓰요리와의 내통 의혹으로 인해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형 노부야스가 할복 자결한다(최근에는 노부야스가 이에야스와 대립하고 있었기에 할복하게 된 것이라는 설도 제기되었다). 때문에 일단 이에야스의 차남이던 히데야스가 집안의 가독을 이을 뻔 했으나,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뒤에 이에야스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화친 조건으로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에게 보내져서 그의 양자(겸 인질)가 되었고, 이에야스의 후계자로는 이복동생인 나가마쓰(長松, 훗날의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되었다. 애초에 생모의 신분이 히데타다 쪽이 더 높았고, 노부야스가 자결한 뒤에 태어난 만큼 히데타다가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사카로 보내지는 히데야스의 수행은 부역(傅役) 오구리 다이로쿠(小栗大六, 오구리 시게쿠니小栗重国)와 소성(小姓) 이시카와 가쓰치요(石川勝千代, 이시카와 야스카즈石川康勝) ・ 혼다 센치요(本多仙千代, 혼다 나리시게本多成重)가 맡았으며, 이에야스로부터 겐지 전래의 검 「도지기리」(童子切)와 채배(采配)를 전별로 받았다고 한다. 덴쇼 12년(1584년) 12월 12일 하시바 히데요시의 양자로써 「하시바 미카와노카미 히데야스」(羽柴三河守秀康)라 칭하였다.
덴쇼 15년(1587년) 규슈 정벌에 부젠 이와시로성 공격의 선봉으로써 첫 출진한 후 휴가국 평정전에도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히데요시의 칭찬을 들었다. 덴쇼 16년(1588년) 도요토미 성(豊臣姓)을 하사받았으며,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평정(小田原平定)에 이어 덴쇼 20년/분로쿠 원년(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덴쇼 17년(1589년) 히데요시의 친아들 쓰루마쓰가 태어나고 히데야스는 생후 4개월밖에 되지 않은 쓰루마쓰를 도요토미의 후계자라 지명하였으며, 다른 양자들과 마찬가지로 히데야스도 유키 하루토모(結城晴朝)의 양자 겸 조카사위로 내보내졌다. 유키 씨는 시모쓰케국의 슈고(守護)를 지낸 적도 있는 명문 다이묘 가문이었는데, 히데야스의 친아버지인 이에야스가 덴쇼 18년(1590년) 친아버지 이에야스가 원래의 영지에서 간토 일원의 옛 호조 씨의 영지로 전봉되어 240만 석을 얻었고, 히데야스는 간토 평정의 공로자였던 이에야스의 공으로 영지가 늘어나면서 북부 간토의 다이묘였던 유키씨(結城氏)의 서양자(婿養子)가 된 것으로 보인다. 히데야스가 유키 하루토모의 양자 겸 조카사위가 되는 데에는 구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의 주선도 있었으며, 이후 히데야스는 유키 가문의 가독에 유키 집안 소유의 영지 11만 1천 석도 이어받았다. 또한 다시금 하시바 성(羽柴姓)을 받았고, 관위를 합쳐 하시바 유키 소장(羽柴結城少将)이라 불렸다.
양부였던 히데요시가 죽고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이 될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에 참전하였다.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에 호응하는 형태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거병하고, 이에야스는 오야마 평정(小山評定)을 열어 다른 무장들과 함께 서쪽으로 갈 것을 결정한다. 이때 이에야스에게 있어 본대는 이에야스 자신이 이끌고 도카이도(東海道)에서, 그리고 별동대를 히데타다가 이끌고 주산도(中山道, 도산도東山道)로 진군하기로 하였으며, 히데야스는 우쓰노미야(宇都宮)에 머무르며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막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데야스는 이에야스로부터 시모사 유키성(下総結城) 10만 1천 석에서 에치젠(越前) 기타노조(北庄) 68만 석으로 영지가 가증되어 이봉된다. 유키 집안을 대대로 섬긴 가신들 가운데는 에치젠으로 이봉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때문에 이러한 에치젠 이봉은 최종적으로는 재지 유력자들의 재지 이탈을 강제하는 기능도 있었기에 그 결과 히데야스는 자신의 권력에 있어서 구세력이라 할 수 있는 유키 씨의 입김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게이초 9년(1604년)에는 히데야스 자신의 본래 성씨인 마쓰다이라씨(松平氏)로의 복귀하는 것도 허락받았다는 사료도 존재한다.
게이초 10년(1605년) 곤주나곤(権中納言)이 되었다. 게이초 11년(1606년) 9월 21일에 교토 후시미성(伏見城)의 유수거(留守居)를 명받았으나, 병을 얻어 직무 수행이 어려웠기에 게이초 12년(1607년) 3월 1일에 에치젠으로 돌아와야 했고, 그대로 윤4월 8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34세였다.
히데야스의 사인은 『당대기』(当代記)에 「日来唐瘡相煩、其上虚成」라고 되어 있어 매독이 아니었나 추정되고 있다. 또한 매독이 직접적인 사인이 아니라 매독에 의한 쇠약증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는 지적도 있다. 한편 마나세 겐사쿠(曲直瀬玄朔)의 『의학천정기』(医学天正記)에는 「越前宰相殿、瀉利・発熱・咽渇・五令ニ加滑」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난치병도 복합적으로 히데야스의 죽음에 작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유키 가문의 보리사(菩提寺)로 조동종(曹洞宗) 사찰인 효현사(孝顕寺)에서 화장되어 계명은 효현사전전삼품황문취모월산대거사(孝顕寺殿前三品黄門吹毛月珊大居士)라 추호하였으나, 도쿠가와 집안이나 마쓰다이라 집안이 귀의해 있던 정토종(浄土宗)의 장례 절차를 따르지 않은 것을 이에야스가 한탄했기에 교토 지온인(知恩院)의 만예(満誉) 대사를 불러 새로 운정사(運正寺)를 짓고 그곳에 옮겨 모시고 계명도 정광원전전삼암도위운정대거사(浄光院殿前森巖道慰運正大居士)라 하였다.
에치젠 68만 석은 적남 다다나오(忠直)가 이었다.
전임 유키 하루토모 |
제18대 시모사 유키씨 당주 1590년 ~ 1604년 |
후임 마쓰다이라 나오모토 |
유키성 성주 (유키 가문) 1590년 ~ 1601년 |
후임 막부령(미즈노 가쓰나가) |
제1대 후쿠이번 번주 (유키 가문) 1601년 ~ 1607년 |
후임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