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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 |||||||||||||||||
출생일 | 1973년 7월 29일 | (51세)||||||||||||||||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진군[1] | ||||||||||||||||
키 | 168cm | ||||||||||||||||
포지션 | 은퇴 (과거 유틸리티 플레이어) | ||||||||||||||||
청소년 구단 기록 | |||||||||||||||||
1990–1991 | 강일여자고등학교 | ||||||||||||||||
대학팀 기록 | |||||||||||||||||
연도 | 팀 | 출전 | (득점) | ||||||||||||||
1992 | 숙명여자대학교[2][1] | ||||||||||||||||
1993–??? | 경희대학교 | ||||||||||||||||
구단 기록* | |||||||||||||||||
연도 | 구단 | 출전 | (득점) | ||||||||||||||
???–2003 | 인천 현대제철 | ||||||||||||||||
2004 | 서울시청 | ||||||||||||||||
국가대표팀 기록 | |||||||||||||||||
1990–2004 | 대한민국 | 75 | (10) | ||||||||||||||
메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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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
이명화(李明花,[1] 1973년 7월 29일~)는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의 은퇴한 여자 축구 선수로, 대한민국 여자 축구계의 1세대 선수로서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인물이다.[3]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오빠들의 옷을 물려 입으면서도 "나는 남자야"라며 남자들과 어울리며 자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을 즐겼다.[1]
본래 운동을 좋아해 육상을 하려 했지만 작은 체격 때문에 거절당하고 펜싱 감독의 권유로 경북체중과 경북체고를 거치며 플뢰레 펜싱 선수로 활동하면서 경북체고 2학년 때는 전국대회 3위를 기록했다.[2][4][1]
그러던 중 김주성의 갈기 머리에 반해서 축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혼자서 매일 축구 교본을 보면서 축구 연습을 하던 중 1990년, 강일여자고등학교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여자 축구부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펜싱부 감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몰래 테스트를 받은 후 강일여자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2]
축구부에 입단한지 얼마 안 되어 대표팀 테스트를 통과해 최연소로 대표팀에 합류하면서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게 되었다.[2] 당시 대표팀에는 전문적으로 축구를 배운 선수들이 몇 없었기에 핸드볼 등의 다른 종목의 선수들끼리 모여 3개월 정도의 훈련만을 통해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고, 단순 공이 있는 곳으로 무작정 달려가는 플레이로 인해 초등학생들한테도 지기도 했다.[2]
이 전에도 김화집 감독이 지휘하던 여자 대표팀이 있었지만, 공식 국제대회에 나가게 된 것은 그 해 아시안게임이 처음이였으며 사실상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및 대한민국의 여자 축구의 시작점이였다.[2]
이명화는 7번을 달고 오른쪽 윙어로 활약했다.[2] 당시 대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게 0-7, 일본에게 1-8, 중화 타이베이(대만)에게 0-7, 중국에게 0-8 패배를 당하며 공격수임에도 하프라인 위쪽으로는 거의 올라가지 못한 채 어떻게든 실점을 줄이려고만 했다고 한다.[2]이명화는 당시를 회상하며 여자도 저렇게 축구를 잘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2]
마지막 홍콩과의 경기에서는 선수들 수준이 대한민국과 비슷했기에 공식 경기에서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의 첫 승리를 기록하였고 1-0으로 이긴 이 경기에서 이명화는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2] 경기 이후 대부분의 대한민국 여자 대표팀 선수들이 축구를 그만두었지만 나이가 어렸던 이명화는 축구를 계속하게 되었다.[2]
남북통일축구에서는 여자 대표팀은 실력 차이가 컸기 때문에 선수를 섞어 진행하였고 이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축구 감독이 이명화에게 재능이 있다며 북으로 오라는 농담을 건네기도 하였다.[2]
이후에도 최약체던 대한민국 여자 축구 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팀이 여러번의 대패를 하는 와중에도 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2]
인천제철 입단 이후에는 팀의 대표 선수로 활약하면서 우상이던 김주성의 저돌적인 플레이와 그를 따라한 머리 스타일 때문에 '여자 김주성'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2]
2000년대에는 20대 후반이 되면서 힘과 스피드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포지션을 스트라이커에서 미드필더로 바꾸게 되었다.[2] 포지션을 바꾸었음에도 여전히 대표팀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2003년 AFC 여자 아시안컵에서 준결승에 올라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최초로 FIFA 여자 월드컵에 참가하게 되었다.[2] 또한 이 시기쯤에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은 대만을 이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본과도 어느정도 대등한 경기가 가능해졌다.[2] 하지만 아시아 무대가 아닌 세계 무대인 월드컵에서는 3경기 모두 패배를 기록하면서 대회를 마무리했다.[2] 비록 대회 성적 자체는 아쉽게 마무리 되었지만 많은 관중들 앞에서의 경기를 뛰는 것 자체가 놀랍고 새로워 대회를 즐길 수 있었으며, 대회에서 처음으로 벤치로 밀려나 그 동안 다른 후배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였다고 했다.[2]
2004년 서울시청 여자 축구단에 입단하면서 포지션을 수비수로 바꾸며 자신의 우상인 김주성처럼 모든 포지션을 뛰게 되었다.[2] 하지만 수비수에서의 플레이는 익숙치 않았고 결국 2005년 플레잉코치 재직 중 전국체전이 끝나 숙소에 있던 중에 전화로 일방적인 은퇴 통보를 받게 되었다.[2] 강일여자고등학교 축구부에 감독으로 가라는 면담 없는 일방적 통보와 함께 1990년 초반부터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의 대표 선수로 뛰면서 대한민국 여자 축구계에서 큰 공헌을 했던 이명화는 그렇게 정식적인 은퇴식 없이 선수 생활을 마무리 해야 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