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자

이방자
여왕
재위 1901년~1920년
이왕세자빈
재위 1920년~1926년
전임 황태자비 윤씨(순정효황후)
이왕비(현덕정목온정자행비)[1]
재위 1926년~1947년
전임 순정효황후
이름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신상정보
출생일 1901년 11월 4일(1901-11-04)
출생지 일본 제국 도쿄
사망일 1989년 4월 30일(1989-04-30)(87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창덕궁낙선재
부친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모친 모리마사 왕비 이쓰코
배우자 의민태자
자녀 이진(첫째아들)
회은태손(둘째아들)
종교 불교천주교(세례명:마리아)[2]

이방자(李方子, 1901년 11월 4일~1989년 4월 30일)는 일본 제국구황족이다.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의 제1여왕(장녀)이며 대한제국의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의 비[3]가 되었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私諡)는 현덕정목온정자행비(顯德貞穆溫靖慈行妃)이다. 세례명은 마리아이며 혼전 이름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일본어: 梨本宮方子女王)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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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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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뉴욕트리뷴에 실린 이방자 (1919년)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영친왕 부부 (1923년)

1901년 11월 4일, 메이지 천황의 조카이자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왕비 이쓰코의 장녀로서 도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닌코 천황의 조카이자, 메이지 천황의 사촌이었다. 또한 배다른 삼촌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은 메이지 천황의 딸 야스노미야 도시코 내친왕과 결혼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 제국 제43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사촌인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화족 이치조 도키코(이치조 사네테루 공작 영애) 등과 함께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의 강력한 배우자 후보로 떠올랐으나, 미미한 정치적 기반과 불임의 가능성을 이유로 1916년,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이은과 약혼하였다. 1920년, 일본 황실의 교육기관인 가쿠슈인 여자고등과를 거쳐 같은 해 4월 28일, 도쿄 롯폰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21년, 장남 진(晉)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 첫돌도 채 지나지 않은 진은 한반도 방문 중 경성에서 갑자기 사망한다.

1931년, 둘째 를 낳고 다시 단란한 생활을 하였으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화족제도 폐지로 왕족의 지위도 동시에 폐지됨에 따라 신분이 강등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이은의 복권을 두려워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로 귀국마저 좌절되었다. 일본에서는 그의 남편이 한국인이므로 재일 한국인으로 간주되었으나,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부부가 한국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아 사실상 무국적자로서 고된 삶을 살았다. 영친왕 부부는 결국 할 수 없이 일본 국적을 취득하였으나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새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청으로 1963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였다.

사회봉사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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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는 대한민국에서 지내며 평소 남편과 구상해 온 사회봉사를 시작해 1963년,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으며 1966년, 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해 자행회(慈行會)를, 1967년, 언어장애인소아마비장애인들의 사회 적응을 위해 명휘원(明暉園)을 각각 설립하는 한편, 해외 모금 활동과 칠보(七寶)를 통해 복지 사업 자금을 모았다.

1970년, 남편이 죽자 1971년, 지적장애어린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수원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였다. 1973년, 숙원 사업이었던 영친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으며 1982년에는 광명시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으로 재직하는 등, 국가의 생활비 보조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생활 여건 속에서도 사회봉사에 정열을 쏟아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다. 일본에서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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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는 직장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일본에 있는 아들 구(玖)와 함께 지내기도 하다가 1989년 4월 30일,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운명하였다. 장례는 1989년 5월 8일, 각계 인사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 홍유릉 영원(英園)에 의민태자와 합장되었다. 생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고 그 밖에도 서울특별시문화상, 적십자박애장 금장, 5·16민족상, 소파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2006년 11월, 일본 후지TV에서 의민태자 부부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무지개를 이은 왕비(虹を架ける王妃)가 방영되었다. 2007년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탤런트 김희애를 주연으로 의민태자비의 일대기를 그릴 드라마가 기획 중이었으나 독도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갈등이 빚어져 무산[4] 됐으며, 그 이전에도 이휘향이 의민태자비 역할로 출연한 미니시리즈 드라마 왕조의 세월한국방송에서 방영된 바 있다.

칭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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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를 부르는 명칭은 영친왕비, 영왕비, 이방자 여사 등이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은의 영왕 칭호는 결혼 전에 폐지되었기 때문에 황태자비 또한 태자비(또는 이왕세자비)로서 혼인한 것이며, 친왕(왕자)과 황태자(왕세자)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영친왕비가 아닌 의민황태자비로 부르는 것이 옳다. 사실(史實)을 모르는 사람들이 영친왕비를 이방자 여사라고 흔히 부르는데 이방자라는 이름 자체가 일본식으로 나시모토노미야[5] 마사코(梨本宮[5] 方子)에서 신부의 성(姓)인 나시모토(梨本)를 떼고 신랑의 성(姓)인 이(李)를 붙여 이방자(李方子)로 칭하기도 한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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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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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온 세월》
  • 《The World is One》
  • 《세월이여 왕조여》

명예 박사 학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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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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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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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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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식 시호가 아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추서한 사시(私諡)이다.
  2. “장애인 복지시설의 요람 40돌”. 평화신문. 2007년 10월 21일.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9월 13일에 확인함. 
  3. 의민황태자비(懿愍皇太子垠[英親王妃, 1901~1989]
  4. 박정민 (2011년 2월 21일). '백전노장' 정하연 작가 "재밌는 드라마 있지만 좋은 드라마는…"(인터뷰)”. TV리포트. 2015년 10월 25일에 확인함. 
  5. 미야(宮)는 경칭(敬稱)
  6. 원래는 모리마사 왕의 조카이자 의민태자비의 사촌으로, 삼촌 모리마사 왕의 양자가 되었다.
  7. 가시마 번 마지막 번주 나베시마 나오요시의 양자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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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효황후
제1대 일제 강점기 이왕세자
1916년~19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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