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
李範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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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의 통리기무아문 주사 | |
임기 | 1882년 1월 23일 ~ 1882년 4월 30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조선국의 규장각 예하 강독관 | |
임기 | 1884년 2월 29일 ~ 1884년 3월 29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조선국의 홍문관 예하 수찬 | |
임기 | 1884년 3월 29일 ~ 1885년 3월 29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섭정 | 완흥군 이희(前) 영의정 김병국(前) 영의정 심순택(前) |
조선국의 승정원 예하 승지 | |
임기 | 1885년 3월 29일 ~ 1888년 12월 8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조선국의 승정원 예하 승지 겸 경연관 | |
임기 | 1888년 11월 25일 ~ 1888년 12월 8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조선국의 형조참판 | |
임기 | 1888년 12월 8일 ~ 1888년 12월 19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조선국의 이조참판 | |
임기 | 1888년 12월 19일 ~ 1890년 4월 23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조선국의 호조참판 | |
임기 | 1890년 4월 23일 ~ 1892년 1월 13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조선국의 공조참판 | |
임기 | 1892년 2월 29일 ~ 1895년 4월 30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섭정 | 총리대신 김홍집(前) 영선군 이준(前) 왕세자 이척(前) |
조선국의 농상공부대신 | |
임기 | 1895년 8월 8일 ~ 1896년 2월 29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섭정 | 총리대신 박정양(前) 흥선대원군 이하응(前) 총리대신 김홍집(前) |
조선국의 농상공부대신 겸 법부대신 서리 | |
임기 | 1895년 9월 3일 ~ 1896년 2월 29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섭정 | 총리대신 박정양(前) 흥선대원군 이하응(前) 총리대신 김홍집(前) |
조선국의 법부대신 | |
임기 | 1896년 2월 29일 ~ 1897년 8월 8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섭정 | 왕태자 이척(前) |
조선국의 법부대신 겸 규장각 규장원경 | |
임기 | 1896년 3월 29일 ~ 1897년 1월 8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섭정 | 왕태자 이척(前) |
조선국의 법부대신 겸 경무사 | |
임기 | 1897년 1월 18일 ~ 1897년 6월 18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52년 9월 3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911년 1월 26일 | (58세)
사망지 | 러시아 제국 상트 페테르부르크 주 상트 페테르부르크 |
국적 | 대한제국 |
학력 | 1879년 식년문과 병과 급제 |
경력 | 미국 주재 조선국 공사 미국 주재 대한제국 공사 프랑스 주재 대한제국 공사 오스트리아 주재 대한제국 공사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공사 |
정당 | 수구파 잔존 후예 세력 |
본관 | 전주(全州) |
부모 | 이경하(부), 단양 이씨 첩실(모) |
형제자매 | 이범욱(배다른 적형) 이범오(배다른 적형) 이범중(배다른 서제) 이범택(배다른 서제) |
자녀 | 이기종(장남), 이위종(차남) |
친인척 | 이인달(조부) 이범윤(6촌 재종제) 구경하(사돈) |
종교 | 유교(성리학) |
웹사이트 | 이범진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범진(李範晋, 1852년 9월 3일대한제국 시대 정치인이며 순국지사 출신이다.
~ 1911년 1월 26일 )은 조선국 공조참판 등을 지낸자(字)는 성삼(聖三),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17대손이며, 본관은 전주(全州)다.
이범진은 형조판서, 판의금부사, 어영대장 등을 지낸 조선 말기 무관(武官)이었던 이경하(李景夏)의 서자(庶子)였다. 이범진은 조선말기와 대한제국 때 이조참판, 형조참판, 공조참판 등을 역임했고, 아관파천 직후 법부대신 직책에 올랐다. 제2차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던 이위종(李瑋鍾)은 이범진의 차남이며, 대한제국 군주제 부활 기원 성향 복벽주의 독립운동가 이범윤(李範允)은 이범진의 육촌 동생이다.
고종 때인 1873년 생원시 입격 후 1879년 식년문과에 병과 급제하여 고종과 민왕후의 총애를 받아 법부대신 서리 직책에 올랐지만, 일본 정부의 주도로 발생한 1895년 8월 을미사변으로 친일파가 득세하여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 해 10월에 춘생문 사건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다 실패하고 중국으로 피신했다가 1896년 귀국했다. 그후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킨 아관파천에 성공하여 친러 내각의 법부대신에 임명되었다. 법부대신 이범진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배후를 캐는데 주력하다가 일본 정부가 가장 기피하는 인물이 되었다.
일본의 압박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고종의 배려로 1896년 말 주미 공사로 떠나 3년 동안 미국 전권 공사로 근무했다. 1899년 중반에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3국 겸임 공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1900년 초에야 파리에 부임했다. 이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의 견제와 간섭을 피하고자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범진은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상주하는 초대 주러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특히 일제의 감시를 피해 고종 황제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 사이의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가교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다음 외국에 주재하는 대한제국의 공사관을 폐쇄하고 모든 외교관 철수를 명령했으나 이범진은 이에 불응하고 계속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재했다. 1906년 일제의 강압으로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 주거지를 옮겨 1910년까지 여권발급 등 공사업무와 비공식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국권 회복에 주력했다.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특사단을 파견하고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영어, 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한 그의 아들 이위종을 이상설, 이준을 돕도록 헤이그에 동행시켰다.또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대한제국 특사단의 신변 보호를 청원하여 특사단이 헤이그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1908년에는 아들인 이위종에게 10,000 루블을 지참시켜 연해주에 파견하여 연해주 지역 항일 의병단체의 무장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특히 해조신문등 고려인들의 신문 발간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위종이 지참한 자금은 항일 의병들을 무장시키는데 사용되었고 이위종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동의회의 조직 구성과 활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1만 루블: 현재 가치로 10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됨)
후대에 와서 이범진을 당시 러시아와의 정치적인 친분 때문에 친러파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는 결코 러시아를 위해 일한 적이 없다.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힘이 필요했으며, 러시아 역시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대한제국과의 긴밀한 외교관계가 필요했다. 그러나 러시아도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자원과 철도부설 등에서 자국의 이익을 취하려 했으며, 실제로 압록강 주변의 산립채벌권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범진은 러시아의 대 한반도 수탈정책에 저항하다가 단기간이지만 전권 공사직에서 파직되기도 했다. 이범진은 조국의 독립과 이익을 우선 한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으로 러시아를 추종하는 친러 사대주의자가 아니며 조선 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여 합종연횡하는 친일, 친청 세력과는 전혀 다른 외교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범진은 1911년 1월 26일 조국의 패망에 절망하여 목을 매어 자결했다. 자결할 때 고통을 피하고자 머리에 권총 3발을 쏘았으나 모두 빗나가 벽과 천정에 박혔다. 당시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 소모프는 이범진의 자살은 “적들에게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복수”라고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 했다. 그의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있는 우스펜스키 묘지(현재의 북방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소련 시절의 대대적인 묘지 재구획 공사로 그의 유해가 멸실되어 지금까지 찾을 수 없다. 이러한 내용을 알게 된 김대중 대통령은 그가 묻혔을 곳으로 추정하는 곳에 순국비를 세우게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이범진은 순국 시에 고종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또한 니콜라이 러시아 황제 그리고 서울에 있는 장남 이기종에게도 비슷한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태황제폐하께
우리 대한제국은 패망했습니다. 폐하께서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신은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어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국권을 회복할 방책이 없다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은 격분의 정을 이겨낼 수 없기에 오늘 목숨을 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