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 바이간 石田梅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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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오키나가(興長) |
로마자 표기 | Ishida Baigan |
출생 | 1685년 10월 12일 |
사망 | 1744년 10월 29일 |
성별 | 남성 |
국적 | 일본 |
직업 | 사상가, 윤리학자 |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 1685년 10월 12일 ~ 1744년 10월 29일)은 에도 시대의 사상가, 윤리학자이다. 석문심학을 연 사람으로 이름은 오키나가(興長), 통칭 간페이(勘平).
단바국 구와다군(지금의 교토부 가메오카시)에서 백성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695년 11세 때 교토의 포목상에서 도제 생활(丁稚)을 시작했지만 너무 대우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4-5년 일했을 무렵 고향에 돌아왔다.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다가 1707년 23세때 다시 포목점 쿠로야나기가에 들어가 도제로 일했다.
1727년에 만난 재가 불자 오구리 료운(小栗了雲)으로부터 배워 사상가의 길을 시작해 45세엔 소개도, 성별도 묻지 않는 무료 강좌를 집에서 개설했다[1] 나중에 석문심학(石門心学)으로 알려지는 사상을 강의했다. 내용은 "학문과 마음의 진정성을 안다"「学問とは心を尽くし性を知る」는 생각을 기초로 마음과 자연이 일체되는 질서와 이치를 깨닫는 학문이다. 이시다는 스스로 유학자라 불렀고 그의 학문을 성(리)학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심학으로 부르고 있다. 60세로 죽었다.
주요 저서로 도비문답『都鄙問答』 검약제가론『倹約斉家論』이 있고 사후 제자들이 엮은 이시다 선생 어록石田先生語録이 있다.
가메오카시에 이시다 바이간을 기념하는 바이간 강습소(梅岩塾)가 있고 사카이구의 菅原神社에 이시다의 좌상이 있다. 가메오카역에도 새로 만들어진 좌상이 있다. 가메오카시의 초등학교(亀岡市立東別院小学校)에는 흉상이 있다.
2011년 이시다를 형상화한 마스코트 캐릭터 심학군「しんがくん」이 만들어졌다.[2]
이시다 사상의 근저에는 성리학의 흐름에 놓인 천명론이 있다. 이시다에게 영향을 준 鈴木正三의 직분설(職分説)이 사농공상의 직업관속에서 상업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했던 것에 비해 이시다는 상인으로 오래 일했기 때문에 상업의 본질을 잘 알았다. 상업의 본질은 교환/중개업이고 그 중요성은 다른 직업들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商業の本質は交換の仲介業であり、その重要性は他の職分に何ら劣るものではない」고 설명하여 상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전성기엔 제자가 400명까지 되었다. 알려진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메이지 시대 이후 심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인물 중에선 노마 세이지(野間清治)가 대표적이다.[3] 검약과 부의 축적을 천명으로 삼아 실천한다는 생각은 로버트 벨라가 일본판 칼뱅주의 상업관으로 포장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산업혁명을 이끈 주요 윤리관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환경문제에 관심이 커지고 기업들의 환경범죄가 늘어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서구권에서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시다 바이간은 이중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은 달콤한 독을 마시는 것과 같아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간다「二重の利を取り、甘き毒を喰ひ、自死するやうなこと多かるべし」라거나 진짜 상인은 타인을 먼저 세우고 자신도 똑바로 서는 것을 생각한다「実の商人は、先も立、我も立つことを思うなり」처럼 쉬운 말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표현해냈다. 이런 이시다 사상은 오우미 상인近江商人들의 삼면이 좋다「三方よし」사상과 함께 일찍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고민한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이 사상은 기업의 영리활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지속가능한 사업발전의 관점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며 기부나 원조처럼 본업 이외의 사회공헌을 강조한 서구의 사회적 책임론과는 조금 다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이시다 바이간에 심취했다는 속설이 있지만 관련자들은 마쓰시타가 이시다 바이간을 언급한 적이 없거나[4] 아예 몰랐을 것이라고 보고있다.[5] 기업인 중에서는 스미토모의 오구라 마사츠네(小倉正恒)가 석문심학회 회장을 맡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