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동의 동명은 지금 이화동 2번지에 있던 ‘이화장’에서 유래되었다. 이화동의 옛 마을로는 동숭동과 이화동에 걸쳐있던 쌍계동이 있다. 기묘한 암석 울창한 수림에 두 줄기의 맑은 시냇물까지 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삼청(三淸)·인왕(仁王)·쌍계(雙鷄)·백운(白雲)·청학(淸鶴)이라 하여 도성안의 5대 명소 가운데 세 번째로 꼽혔다.[1]
동숭동은 1914년4월 1일경성부의 동명제정 때 숭교방 동쪽에 있는 동이라 하여 동숭동이 동명이 유래되었다. 낙산 정상 부분부터 기슭 전체를 차지하는 동숭동은 일찍부터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았고, 성문 가까이 있는 도성 안 마을인데다가, 성균관과 창경궁·배오개시장이 머지않은 곳에 있어 마을의 형성 여건이 좋았다. 따라서 현재까지 여러 개의 자연부락 이름이 남아 전한다.[2]
연건동의 동명은 연화방과 건덕방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이래 오랫동안 주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오고 있는 연건동에는 자연부락명이 여럿 남아 있다. ‘과동’ 혹은 ‘과목동’이라 부르던 곳은 22통 일대인데 과실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고, ‘남미탑동’은 ‘남이탑골’이라고도 불렀는데 남이탑이 있어서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126번지 일대이다. 조선 세조 때의 명장이며 태종의 외손자인 남이 장군의 집터인데 장군이 유자광의 모함을 입어 억울하게 죽은 후 원한 때문에 터가 세다 하여 이곳에 아무도 살지 않게 되자 폐가가 되어 쑥과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순조 때까지 그저 채소나 지어먹는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하루는 이 집터의 옆에 사는 사람의 꿈에 남이장군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자, 그 사람은 장군을 위하여 원혼을 모시고 사당을 짓고 탑을 세웠다. 1818년 순조 18년에 공식적으로 남이장군의 해원복권이 된 이후의 이야기로 남이장군이 태어날 무렵 3년 동안이나 낙산에 풀이 나지 않았던 곳이 장군의 집터이며, 터의 한가운데 있던 큰 바위를 중심으로 해서 사당을 짓고 남이장군을 모셨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