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이시도르 아리스프 Jean Isidore Harispe | |
출생지 | 프랑스 생-에티엔-드-베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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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지 | 프랑스 라갈 |
복무 | 프랑스 왕국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제정 7월 왕정 |
복무기간 | 1792년~1850년 |
최종계급 | 프랑스 원수 |
주요 참전 | 프랑스 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 |
기타 이력 | 에투알 개선문에 이름이 새겨져 있음 |
서훈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 아리스프 백작 1세 생 루이 훈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 프랑스 원수 프랑스 귀족 |
장 이시도르 아리스프, 아리스프 백작 1세(Jean Isidore Harispe, 1st Comte Harispe, 1768년 12월 7일 - 1855년 5월 26일)는 프랑스 혁명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활약한 프랑스 장군이다. 아리스프는 1851년 프랑스 원수에 임명되었다.
아리스프는 부유한 바스크 지방의 지주의 아들로서 생테티엔드베고리(Saint-Étienne-de-Baïgorry)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아들이 성직자가 되길 바랬으나, 아리스프는 1792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지원병으로써 프랑스 공화국군에 참가했다. 1793년 그는 생장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의 중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리스프는 스페인을 상대로 한 피레네 전쟁(War of the Pyrenees)에서 유명해 졌다. 1795년 스페인과 프랑스가 강화를 맺은 후 보르도에서 수비대를 이끌며, 오트-가론(Haute-Garonne)에서 반란군과 싸웠다. 1799년 마크도날의 지휘하에 그리송의 전투에 참가한 후, 몽세(Moncey)와 브륀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옮겼다. 1802년 5월 앙굴렘(Angoulême) 수비대로써 조직된 제16 바스크 쉬세르(chasseurs) 반-여단(demi-brigade)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될 때 아리스프는 오주로 원수(Marshal Augereau)의 지휘하에 있던 대양 연안군(Army of the Ocean Coast)에 근무하면서 1805년 및 1806년 전역에서 데스자탱(Desjardin) 사단에서 싸웠다. 1807년 1월 예나에서 아리스프는 부상을 입었고, 그때까지의 공적으로 준장에 임명되었다. 술트 원수의 군단으로 옮긴 후, 아리스프는 베르디에 사단 중 여단을 맡게 되었다. 하일스베르크(Heilsberg)와 프리틀란트 전투 및 Gludstadt에서 활약해 유명해 졌으나, 여기서 다시 부상을 입게 되었다.
1807년 12월 아리스프는 몽세 원수의 지휘하 대양 연안군 정찰군단의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 군단과 함께 1808년 스페인 전역에 참여했다. 1808년 11월 란 원수 지휘하에서 투델라 전투(Battle of Tudela) 및 사라고사 포위전(siege of Saragossa)에 참가했다. 란이 프랑스로 귀국하고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을 때 쉬셰의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쉬셰가 10,000명의 군대로 스페인의 군대를 격파한 마리아 전투(Battle of María)에서 아리스프는 1~3개의 상처를 입었다. 아리스프는 사단장(general de division)으로 승진했다. 이후 그는 발렌시아 점령과정에서 특히 타라고나와 레리다의 공방전에서 뛰어난 활약으로 명성을 높인 후, 아리스프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Grand Officer)를 수여받아 백작이 되었다.
아리스프는 1813년까지 아라곤에서 근무한 후, 1814년 술트의 증원군으로써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이후 비토리아에서 웰링턴 공작의 프랑스 남부 침공을 방어한 후, 프랑스로 퇴각 도중 스페인에 이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이 태어난 성을 스스로 불태웠다. 이후 오르테 전투(Battle of Orthez)에서 아리스프는 군대의 퇴각을 지원했다. 1814년 3월 20일 타르브에서 포르투갈 사단과 전투를 벌였고, 나폴레옹이 퇴위한 후에도 전투를 계속해 툴루즈 전투(Battle of Toulouse)에서도 활약했다. Calvinet의 고지를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받아, 이곳의 보루를 사력을 다해 방어하던 도중 포탄을 맞아 다리를 절단하였다.
부르봉 왕정복고 후 아리스프는 생 루이 기사단(knight of Saint Louis) 및 제15사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돌아온 백일천하때는 다시 나폴레옹 휘하에 참가해 스페인 국경의 방어를 맡았다. 이후 제2차 퇴위때 스페인의 프랑스 남부 침공을 저지하는데 노력했다. 아리스프는 제2차 왕정복고 정권에게 그 이유로 7월 혁명때까지 샤토에 은퇴했었다. 혁명 동안 아리스프는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7월 왕정에서 그는 오트와 바스-피레네(Basses-Pyrénées, 1830-1833)지사, 피레네 서부방면군단장(Pyrénées occidentales, 1833-1840), 제20군단장(1840-1850)에 복귀했다.
아리스프는 바스피레네의 대의원(1831-1835)이 되었고, 레지옹 도뇌르의 그랑크루아(Grand-Croix)에 임명되었다. 보나파르트 대통령에 의해 그는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고, 1835년 프랑스 귀족(Peer of France)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 제2제정이 수립되었을 때 상원의원이 되었다. 아리스프는 1855년 라갈(Lacarre)에서 사망했다.
그의 이름은 에투알 개선문의 서쪽에 조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