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헤밍웨이 Jack Hemingwa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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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촬영한 잭과 해들리, 헤밍웨이의 모습 | |
본명 | 잭 해들리 니카노어 헤밍웨이 |
출생 | 1923년 10월 10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
사망 | 2000년 12월 1일 미국 아이다호주 케첨 묘지 | (77세)
성별 | 남성 |
국적 | 캐나다·미국 |
시민권 | 미국 |
학력 | |
직업 | 어부, 보전운동가, 작가 |
부모 | |
배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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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
가족 | |
병역 | 미 육군 중위(군사경찰대·OSS 소속, 1941~1945) |
존 해들리 니카노어 헤밍웨이(John Hadley Nicanor Hemingway, 1923년 10월 10일~2000년 12월 1일)는 캐나다와 미국의 플라이 낚시꾼, 보전운동가, 작가였다. 잭은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장손이었다.
잭은 1923년 10월 10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에서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그의 첫 번째 부인 해들리 리처드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헤밍웨이와 폴린 파이퍼와의 결혼으로 이복동생인 패트릭과 글로리아를 두었다.
일생 동안 잭은 아버지의 강한 신체를 닮았다고 여겨진 반면[1] 성격은 어머니의 차분한 기질을 더 닮았다고 평가받았다.[2] 잭의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인 ‘해들리’와 아버지가 평소 존경했던 스페인의 투우사 니카노르 비얄타 이 세레스(Nicanor Villalta y Serrés, es)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3] 거트루드 스타인과 앨리스 B. 토클라스는 그의 대부모였다.[4] 어머니 해들리는 잭의 ‘토실토실한 테디베어와 같은 특성’을 보고 어릴 적 잭에게 범비(Bumby)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5] 잭은 파리와 오스트리아 알프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평생 동안 프랑스어를 사용하였다.[4][6]
헤밍웨이는 몬태나 대학교와 다트머스 대학교에 재학하였으나 졸업은 하지 못하고,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미 육군에 입대하였다.[6] 1944년 프랑스로 해외 파병된 잭은 흑인 특수부대를 지휘하는 군사 경찰로 근무하였으며, 이후에는 새로 결성된 정보 기관인 전략사무국(OSS)으로 자리를 옮겼다.[2] 잭은 프랑스어가 가능한 육군 중위로서 레지스탕스와 함께 활동하였다.[6] 대담한 성격을 가진 잭은 플라이 로드와 릴, 플라이를 챙긴 채 당시 점령된 프랑스로 낙하산으로 내려갔고,[2] 첫 임무 후 낚시를 하다가 독일 순찰대에 거의 붙잡힐 뻔한 적도 있었다.[7] 이후 알제에서 휴가를 보내던 잭은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인 마사 겔혼을 만나게 된다. 잭은 겔혼을 ‘가장 좋아하던 다른 어머니’라고 불렀는데, 당시 겔혼은 프랑스군의 전쟁 특파원으로 이탈리아로 향하던 중이었다.[2]
1944년 10월 말 잭은 프랑스에서 부상을 입고 보주산맥 전선 뒤에서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고[1][8] 1945년 4월까지 모스부르크에 위치한 스탈락 VII-A 수용소에 포로로 수감되었다.[9]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체중은 70 lb (32 kg)가 줄어 210 lb (95 kg)에서 140 lb (64 kg)로 감소하였다.[2] 석방 이후 잭은 파리로 향하여 1945년 5월 8일 샹젤리제 거리에서 군중들과 함께 유럽 전승 기념일을 축하하였다.[2] 프랑스 정부에서는 잭에게 전시 공로로 크로아 드 게(Croix de guerre, 십자무공훈장)를 받았다.[10]
종전 이후 잭은 제대 직전까지 독일 서베를린과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현 포트 리버티)에 잠시 주둔하였다.[10] 제대 후 민간인으로 돌아온 잭은 증권 중개인으로 일한 후 낚시 용품 판매원으로 근무하였다.[6] 1967년 은퇴한 잭은 아버지의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인 아이다호주 케첨으로 돌아와 살았다. 케첨에서 잭은 언어를 가르치고 플라이 낚시에 대한 열정을 추구했으며 동시에 두 권의 자서전을 집필하였다.[1]
잭은 1949년 6월 25일 파리에서 바이라 루이즈 "퍽" 위틀지(Byra Louise "Puck" Whittlesey)와 결혼하였다. 이들의 결혼식에는 줄리아 차일드와 앨리스 B. 토클라스가 하객으로 참석하였다.[4] 부부는 세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첫째 존 헤밍웨이(1950~)[a], 둘째 마고 헤밍웨이(1954~1996), 셋째 매리얼 해들리 헤밍웨이(1961~)[9]가 있다.
위틀지는 1988년 암으로 사망하였으며,[4] 1989년 잭은 앤절라 홀비(Angela Holvey)와 재혼하였다. 둘은 2000년 잭이 사망하기 전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하였다.[6]
1990년대 마고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 자신을 성추행하였다는 의혹을 제기하였고, 잭은 이 사실을 부인하였다.[12] 마고는 1996년 42세 나이에 진정제의 일종인 페노바르비탈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였고, 이는 이후 자살로 인정되었다.[13] 매리얼은 2013년 TV 다큐멘터리 영화 《러닝 프롬 크레이지》에서 알코올 중독과 정신 질환, 자살로 인한 가족 일가의 고충에 대해 이야기하였다.[14] 또한 매리얼은 잭이 어린 시절 두 언니들을 성적으로 학대하였다고 주장하며 마고의 성추행 주장을 뒷받침하였다.[15][16]
평생 동안 잭은 열렬한 플라이 낚시꾼이었다.[4] 잭은 북미나 노르웨이 등지에 위치한 연어들이 사는 세계 최고의 강에서 낚시를 자주 즐겼다.[7]
잭은 오랜 기간 아이다호주 케첨에 살았다.[10] 잭은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아이다호 어류 사냥 위원회(Idaho Fish and Game Commission)의 위원직을 맡았다. 잭은 포획 후 방생 낚시법을 채택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데 성공하였고, 아이다호의 송어 자원이 크게 증가하는 결실을 얻기도 하였다.[6]
잭은 아버지의 네 번째 부인인 메리 웰시 헤밍웨이가 남편 사망 3년 후에 출간한 1920년대 파리에서의 삶을 담은 회고록 《움직이는 축제》(1964)의 출판을 앞두고 최종 편집에 참여하였다.[4]
잭은 총 두 권의 자서전을 출간하였으며, 그 중 한 권은 사후인 2002년에 발간되었다.
잭 헤밍웨이는 2000년 12월 1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뉴욕에서 심장 수술 후 발생한 합병증이 원인이었다.[6] 잭은 이전에 44세 무렵 심장마비를 겪은 경험이 있었다.[17] 2001년 아이다호주 정부는 잭을 기리기 위해 매년 ‘잭 헤밍웨이 보존의 날’을 지정하였다.[18] 잭은 케첨에 위치한 묘지에 아내 바이라와 딸 마고, 아버지 어니스트, 새어머니 메리, 이복동생 글로리아 옆에 함께 매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