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4월 4일에 평안북도선천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조재병(趙才炳)은 목재상을 경영하고 광산업에 종사하였으며 한국 전쟁 때 월남하여 1968년 별세하였다. 모친 진주 하씨 부인은 다정하고도 보수적인 성품이었으며 1959년 북한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청소년기부터 학업은 물론이고 예술과 체육에도 재능이 있었다.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5학년 때 일본을 포함한 전국 규모의 미술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빙상 대표 선수를 하기도 했다. 평양고등보통학교(후에 평양 제2중학교와 서광중학으로 개칭)을 다닐 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이기도 하였다. 조부로부터 배운 서예와 미술반 활동을 통해 유화에도 재능을 보였다. 고등보통학교 말기에는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1947년김일성종합대학교 광산공학과에 1회로 입학하였으나, 김일성 암살을 모의한 사건에 연루되어 퇴학 처분되었고 체포 투옥되었다가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였다. 1948년에 종교 음악을 전공하던 박태준 교수의 추천을 받아 시험을 치루어 연희대학교 물리기상학과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대학 3학년 때에 1950년에 외무부에서 모집한 유학 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도쿄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으나, 그 해(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7월 5일에 육군준위 임관 및 군대 노역병(勞役兵)으로 일하다가 1950년9월 28일 서울 수복 직후 해산되어 육군 연락 장교로 지원하여 같은 해 1950년10월 7일에는 육군소위로 진급, 전란에 본격 참전하였다. 이듬해 1951년2월에는 육군중위로 특진하였고 1년 후 1952년3월에는 육군대위로 진급하였다. 한국 전쟁 때 연락장교로 참전한 그는 전투 병과로 자원하여 금화지구 603고지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금성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으나 총상을 입었다. 이로 말미암아 후방으로 전출되어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근무하였다. 이때 육군사관학교 생도 1기생들에게 물리학을 가르쳤는데, 그 중에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이 이었다. 1953년 휴전 후 학업 복귀를 위해 제대를 신청하여 같은 해 1953년 8월 15일 육군 대위로 예편하였다. 곧바로 1954년 연희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여 물리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이 해에 단돈 120달러를 소지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투스큘럼 칼리지에서 정치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생활비 마련을 위해 거리의 화가로 유화 초상화를 벌어 학비를 충당했으며, 학기말에는 전과목 A학점을 받아 랭킨 총장의 총애를 받았다. 그 보답으로 졸업식장에서 총장의 초상화를 그려 증정했다. 학부를 마치고 1955년에 펜실바니아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정치학을 1개월 정도 공부하던 중, 스승 이원철 박사의 편지를 받고 천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미시간 대학교 대학원 천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56년 4월 미시건대학에서 개최된 미국천문학회에서 프랑크 우드(F. B. Wood) 박사에게 장학금과 생활비 제안을 받고 펜실베이니아 대학원으로 옮겨, 1959년 5월에 "다섯 개의 식변광성의 새 광도 요소(The New Light Elements of Five Eclipsing Variables)"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62년 5월에 "식쌍성 beta Persei, RZ Draconis, BX Pegasis의 광전 측광(Photoelectric Photometry of the Eclipsing Variables, beta Persei, RZ Draconis and BX Pegasi)"이라는 제목의 학위 논문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미국해군천문대에서 천문학자로 연구하였다(1962-1965). 이곳에서 그는, 1873년에 건립된 구경 66cm 굴절망원경을 사용하여 식쌍성 연구로 논문 몇 편을 미국천문학회지에 게재하였다.
미국 메릴랜드주 그린벨트(Greenbelt)에 소재한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고다드 우주센터(Goddard Space Center)의 천체물리연구부 책임자였던 에드워드 쿠페리안(Edward Kuperian) 박사의 권유를 받아 동 연구소에서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연구원(Research Scientist)으로 일했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미국 메릴랜드주 컬리지 파크(College Park)에 소재한 메릴랜드 대학교(University of Maryland)에서 교수로 일했다.
196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의 해외 유치 과학자 제1호로 귀국하여, 이듬해인 1969년 7월 21일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의 발사와 귀환까지 과정을 한국방송공사가 중계방송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통역과 해설을 맡았는데,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자국을 딛는 순간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장면이 방송되었고 이것을 코미디언들이 소재로 삼으면서 인기를 얻어 ‘아폴로 박사’란 애칭을 얻었다.(경향신문, 1996.9.5일자. "15년만에 돌아온 아폴로 박사") 1969년부터 1979년까지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천문기상학과에서 교수로 일했다. 1967년 8월 28일 대한민국 과학기술처가 국립천문대 설치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조경철 박사는 민간 위원으로 이 일에 참여하여 천문대설치 계획안을 마련하였다. 그 후 1974년 4월 1일 국립천문대가 발족하였고, 1978년 9월 29일에는 소백산 천문관측소가 준공되었다. 조경철 박사는 천문대 건설 자문으로 1974년까지 관여했다.
1969년에, 현재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의 전신인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KORSTIC)의 초대 사무총장에 임명되어 1972년까지 국내외 과학과 기술에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는데 힘썼다(동아일보 1969.10.28).
1970년 3월 18일, 당대의 유명 여배우인 전계현과 결혼하였다. 이 결혼식의 주례는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맡았다.
1971-1974년, 한국천문학회 제5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2-1975년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1973년 과학기술총연합회 새마을기술봉사단의 현지기술지도단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는 새마을 현장을 방문하여 새마을 사업 추진에서 나타난 기술적인 애로점을 찾아내어 현장에서 지도하고 해결해 주는 일을 한 것이었다.
1978년 5월 14일 모교인 터스큘럼 대학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 11월 서울 강남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1979-1982년 한국올림픽위원회 상무이사를 역임하였다.
1979년 3월 경희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동아일보 1979.03.26). 1980년 5월에 경희대학교 교무부총장에 임명되었다(경향신문 1980.5.9자, 동아일보 1980.05.09).
1981년 3월 서울 종로 중구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2년 육군사관학교 교수 동우회 회장을 맡았다.
1984년 5월 21일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국우주과학회 창립총회에서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동아일보 1984.05.21).
1985년 1월에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미국 항공우주국, 카네기 재단 등에서 그해 새로 설립된 경희대학교 우주과학과에 필요한 관측 기기 사용 협의 및 자료 수집하고 2월 14일 오후에 귀국하였다(매일경제 1985.01.16 자, 매일경제 1985.02.18일자). 이 해에 신설된 경희대학교 우주과학과 학과장이 되었다.
1988-1990년 Wang Computer Korea 상임고문을 역임하였다.
1990-1992년에 한국우주과학회 제4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93-2007년에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93년에 한국우주환경과학연구소라는 사설 연구소를 설립하여 2009년까지 소장으로 재임하였다.
1994년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The Korean Amateur Astronomical Society) 제3대 회장에 선출되어, 1996년까지 재임하였다.
1995년 8월에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매일경제 1995.08.11) 당무위원을 역임했고, 1996년 3월부터 과학기술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1996.03.06).
1999년 11월 20-27일, 북한을 방문해 남동생 등 가족들을 만났다 (한겨레, 1999.11.20).
1999-2000년, 새정치국민회의 선거대책위원, 새정치국민회의 중앙위원을 역임하였고 2000년 새천년민주당 중앙위원 겸 고문을 잠시 역임하였으며 탈당 및 사퇴 이후 2001년 1월부터 7월까지 자유민주연합 특임행정촉탁위원을 잠시 역임하였다.
2010년3월 2일 심장이 좋지 않던 그는 고열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3월 6일 급성 심근경색까지 겹치면서 상태가 나빠져 향년 81세로 끝내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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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학자였지만 사회적 활동 범주가 넓은데다 단지 동경에 불과했던 우주에 대해 국민에게 희망을 줬다는 점에서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이 추서되었고, 장례는 5일장사회장(葬)으로 치렀다. 화천조경철천문대에 여의도 집무실을 옮겨와 유품과 저서, 미술작품을 전시중에 있다.
그는 38년간에 걸쳐 173권의 저서와 번역서를 출간했으므로 연평균 4.6권의 책을 생산했다. 그의 집필 전성기는 그의 나이 50대와 60대인 1980~1990년대로서 20년 동안 연평균 6.2권의 책을 발간하였다.
그 가운데 그는 자서전에서 "특히 애착이 가고 노력을 많이 했던 책"으로 17권을 꼽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프린시피아 I, II, III는 Isaac Newton의 Principia를 번역한 것으로, 그는 자서전인 "과학자 조경철 별과 살아온 인생(2007, 서해문집)에서 프린시피아 번역은 "무한한 성취감을 내게 느끼게 해준, 내 노력의 결정판"이라고 언급하였다.
또한, 그는 대중매체에 약 3,000건의 기고문을 투고하였다. 이러한 대중매체 기고 활동의 전성기는 1970년대이다. 특히 그는 자전적 에세이를 대중매체에 기고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자서전에서 "전쟁을 두 차례 겪고, 빈손으로 출발하였지만 결코 꿈과 목표를 잃지 않고 살았던 나의 일대기가 청소년들에게 다소나마 자극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가 활발한 저술활동을 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학계에도 수 십 배 공헌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또 나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그는 공적인 일이 없는 날에는 아침 8시부터 취침 시간인 밤 12시까지 거의 매일 원고를 써야만 했다고 술회하였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폴로 박사’라는 별명이 유명해질 정도로 지상파 방송사의 TV 프로그램을 여러 차례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특히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1992년문화방송의 예능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밤에》의 인기 코너인 《몰래카메라》에 출연하기도 했다. 조경철은 《몰래카메라》에 출연한 것을 인연으로 당시 《몰래카메라》를 진행했던 개그맨 이경규가 결혼할 때 주례를 맡기도 하였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