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먼빌 글렌 전투 Battle of Jumonville Gle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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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일부 | |||||||
워싱턴의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강과 그 주변 지도, 1753 또는 17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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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밍고 족 | 프랑스 | ||||||
지휘관 | |||||||
조지 워싱턴 | 빌리에 드 주몽빌 | ||||||
병력 | |||||||
400명 식민지 민병대 12명 밍고족 전사 | 35명 정규군 | ||||||
피해 규모 | |||||||
1명, 사망 2~3명 부상 | 대부분 사망 또는 포로 |
주먼빌 글렌 전투(영어: Battle of Jumonville Glen) 또는 주먼빌 사건(영어: Jumonville affair)은 1754년 5월 28일 영국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첫 전투이다. 현재 펜실베이니아주 파예트 카운티 유니온 타운 근처에서 조지 워싱턴 이끄는 버지니아 식민지군과 동맹군인 밍고 족 인디언들이 조셉 쿨롱 드 빌리에 드 주몽빌이 이끄는 누벨 프랑스의 민병대를 매복하여 공격했다.
원래 영국이 오하이오 강을 기점 지역(현재의 피츠버그)에 요새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이 땅의 영유를 주장하고 나섰고, 이에 버지니아 식민지군이 프랑스군의 야영지를 둘러싸고 공격한 것으로 프랑스군에 몇 명의 전사자가 나와 대부분이 포로가 되었다. 주몽빌도 살해되었지만, 이것은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전투는 7년 전쟁의 포문을 연 사건이었고, 워싱턴은 전투 후 네세시티 요새 전투에서 다시 누벨 프랑스군과 맞붙게 되었다. 이 때 워싱턴은 항복을 하였고 항복 문서에 서명했지만, 프랑스어 문서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주몽빌은 암살되었다’고 하는 취지에 동의하는 것으로 워싱턴이 주몽빌 암살을 기도했다는 비난을 사게 되었다.
1740년대에서 1750년대 초에 걸쳐 많은 영국과 캐나다의 교역 업체가 오하이오 강 상류 유역을 포함한 오하이오 영토(현재의 펜실베이니아 서부)에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1] 누벨 프랑스 당국은 영국 업체와 영국에서 온 이주민을 이 지역에서 몰아내려는 시도를 했고, 1753년, 오하이오에 일련의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2]
누벨 프랑스의 이러한 행동은 영국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인디언에게도 경계심을 가지게 했다. 프랑스와 인디언과 좋은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상인들은 인디언들에게 프랑스계 캐나다인보다 자신들과 거래를 하도록 종용했다. 프랑스의 요새 건설은 모두에게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3] 특히, 밍고 족의 ‘하프 킹’(half king) 족장 타나카리슨은 단호하게 반대를 했으며, 결과적으로 반프랑스주의자가 되었다. 보고에 따르면, 특히 프랑스의 요새 건축 부대의 지휘관, 폴 마린 드 라 말그는 타나카리슨에게 화가 나서 이렇게 고함 쳤다. “너에게 말한다, 나는 강 하류로 간다. 만약 강이 막혀 있으면, 나의 부대를 보내, 터뜨리고 나에게 반대하는 놈들을 짓밟아 준다. 네가 말한 바보 같은 모든 어리석은 것들은 경멸받아 마땅하다.”[4] 그러고나서, 그는 일단 타나카리슨이 선의의 증표로 준 왐펌을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4] 그후 얼마되지 않아 마린은 죽었다. 건설 부대의 새로운 사령탑으로는 자끄 르가저 드 생피에르가 임명되었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