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후주
陳 後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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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제5대 황제 | |
재위 | 582년 2월 20일 ~ 589년 2월 12일 |
즉위식 | 태건(太建) 14년 1월 13일 (582년 2월 20일) |
전임 | 효선제(孝宣帝) |
진나라의 황태자 | |
재위 | 569년 2월 5일 ~ 582년 2월 20일 |
즉위식 | 태건(太建) 년 1월 4일 (569년 2월 5일) |
전임 | 임해왕(臨海王) 진지택(陳至澤) |
안성왕세자(安成王世子) | |
재위 | 562년 ~ 569년 2월 5일 |
이름 | |
휘 | 진숙보(陳叔寶) |
시호 | 장성양공(長城煬公) |
연호 | 지덕(至德) 583년 ~ 587년 정명(禎明) 587년 ~ 589년 |
신상정보 | |
출생일 | 양 승성(承聖) 2년 11월 20일 (553년 12월 10일) |
사망일 | 수 인수(仁壽) 4년 11월 20일 (604년 12월 16일) (51세) |
부친 | 효선황제(孝宣皇帝) 진욱(陳頊) |
모친 | 황후(皇后) 류경언(柳敬言) |
배우자 | 황후(皇后) 심무화(沈婺華) |
진 후주 진숙보(陳 後主 陳叔寶, 553년 12월 10일(음력 11월 20일) ~ 604년 12월 16일(음력 11월 20일))는 중국 남북조 시대 남진의 제5대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시호는 양(煬), 작위는 장성공(長城公)이다. 혼군, 암군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진나라 멸망에 일조하였다.
553년 11월, 강릉에서 효선제 진욱(孝宣帝 陳頊)과 유경언(柳敬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위에 의해 강릉이 함락될 때 그의 부친 진욱과 일가친척들은 선비족 군인들에 의해 장안으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고 진숙보는 양성에 모친과 숨어 있었다.
562년, 진욱이 귀국하자 건강으로 돌아가 안성왕 세자가 되었고 568년에는 태자중서자를 거쳐 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정월에는 태자가 되었다. 582년 정월, 진욱이 병석에 눕자 진욱은 태자 진숙보, 시흥왕 진숙릉(始興王 陳叔陵, 진욱의 차남), 장사왕 진숙견(진숙현, 長沙王 陳叔賢, 진욱의 사남) 형제가 함께 입궁하여 병수발을 들었다. 결국 진욱이 사망했고 모두가 통곡을 하며 울부짖었다.
진숙보도 엎드려 곡을 할 때 진숙릉(陳叔陵)은 갑자기 딴 마음을 품고 어디서 약칼을 꺼내 형 진숙보의 목을 내리쳤다. 진숙보는 목에 깊은 상처를 입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며 모친 유황후가 놀라 구하려다 칼로 얻어 맞았다. 진숙보, 진숙릉, 진숙견 형제 모두 모친은 다른 이복형제다. 진숙견(진숙현, 陳叔賢)이 진숙릉의 팔을 꺾어 칼을 빼앗았지만 진숙릉은 힘이 장사라서 진숙견을 쓰러뜨린 다음 감옥으로 가서 죄수를 풀어 무기를 주고 군사로 삼았다. 진숙보는 그런 상황에서도 얼른 우위장군(右衛將軍) 소마가(蕭摩訶, 532년 ~ 604년)에게 군사를 주어 진숙릉과 맞서게 했는데 애초에 죄수로 급조한 군대와 정병은 싸움이 안 됐다. 결국 진숙릉은 수나라 방면으로 도주했으나, 결국 사로잡혀 멸족되었다.
이렇게 진숙보가 황제가 되었으나, 목에 생긴 상처 때문에 정사를 처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일은 진숙견이 결정했는데 진숙견의 권한이 너무 크고 교만하고 방자해서 진숙보가 그를 싫어했다. 도관상서 공범, 중서사인 시문경은 모두 진숙견을 증오해서 진숙보에게 밤낮으로 그의 흠집을 찾아내 상소를 올렸다. 결국 진숙보는 진숙견을 강주자사로 임명하고 사공으로 옮겼다가 결국 면직시켰다.
즉위 후 강대한 수나라가 틈을 노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치를 부리고 방탕했으며 수나라 공격 한 번 해보지도 않았고 날이 갈수록 정치가 부패해졌다. 진숙보는 대규모로 궁실을 지었는데, 584년 겨울, 높이 수십 장, 수십 칸으로 이루어진 임춘각, 결기각, 망선각을 세웠다. 이 세 누각 사이에는 복도를 설치하여 서로 왕래할 수 있게 했는데 문, 창문, 난간은 모두 단향목으로 만들고 황금, 구슬, 진주, 비취로 장식했으며 밖에는 주렴을 달았다.
정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술과 놀이에 빠졌다. 항상 공범, 산기상시 왕차 등 문사 십여 명과 뒤뜰에서 술놀이를 했는데, 마실 때에는 비빈과 문사들에게 함께 시를 지어 주고 받고 했다. 이렇게 군신이 밤을 세워가며 술 마시고 노래하며 놀았다. 우위장군 사마신은 기밀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세를 부렸는데 거역하는 자는 헐뜯고 따르는 자는 승진시켰다. 장귀비(장려화) 머리카락이 윤기가 있었고 그 길이가 7척이었는데, 기색이 좋고 광채를 뿜는 미인이었으며 영리하고 일처리를 잘했다. 이에 진숙보의 사랑을 받았으며 백관이 일을 아뢰면 진숙보는 장귀비를 무릎에 앉히고 함께 상의하여 결정했다. 그리하여 환관과 측근들이 서로 결탁하고 종친들도 거들었다. 이들은 거침없이 불법행위를 하고 매관매직을 하며 뇌물을 받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마구 쥐어짰다. 상벌을 내리는 명령은 후궁에서 결정되었으며 공범과 공귀빈은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의남매를 맺었다. 결국 장귀비, 공귀빈 두 비빈의 권력이 조정 내외를 좌지우지하여 진숙보도 그들의 말을 따랐다. 대신 중에서 간언을 하면 죄를 씌워 처벌했다.
비서감 부재는 "폐하께서 과도하게 주색에 빠져서...(중략)...소인이 곁에 있게 되고 환관이 권력을 남용하여 충신을 원수처럼 미워하고...(중략)...후궁들은 능라금수를 다투고 마굿간에는 콩여물이 남아돌지만 백성들은 살 곳을 찾아 헤매고 시체들이 들을 덮고 있으며...(중략)...신은 동남의 왕기가 여기에서 끝을 보게될까 우려됩니다."라는 장문의 표문을 올렸다. 그러나 진숙보는 그를 옥에 가두고 죽였으며 오흥 사람 장화도 "영토는 날이 갈수록 줄어 들고 수나라의 침공이 두렵습니다."라는 표문을 올렸다가 바로 살해당했다.
진숙보는 공범의 말을 들어 마음대로 장수를 바꾸고 문관으로 하여금 무관을 대체하게 했다. 결국 588년 10월, 수나라 양견은 진숙보의 부패와 무능을 보고 양광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51만 8천명의 대군을 이끌게 하여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장강을 지키던 장수가 이걸 보고 여러 차례 장계를 올렸으나, 시문경이 묵살하고 상소하지도 않았다. 진숙보는 이걸 알면서도 태연히 "왕기가 여기 있다. 북제의 군대가 세 번, 북주의 군대가 두 번 쳐들어왔으나, 패배하고 돌아갔다. 천명이 여기 있는데 저 놈들이 뭘 하겠는가?"라며 큰소리만 쳤다. 또 공범도 맞장구를 치며 여전히 대비도 않고 술을 마시면서 시를 짓고 풍악을 울렸다.
이듬해 정월, 수나라 오주총관 선비족 하약필이 교묘하게 장강을 건너 경구를 점령하고 종산으로 진격했다. 건강에는 10만 명의 군대가 있었으나, 겁쟁이 진숙보는 그제서야 겁을 먹고 밤낮으로 울기만 했다. 여러 차례 장군들이 싸우자고 건의했으나, 시문경은 이를 모두 허락하지 않고 결국 수나라 군사가 건강으로 입성하는 상황까지 왔다.
얼마 후 수나라 군사들이 우물을 살펴보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자 돌을 던지려고 했는데 당황한 진숙보는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결국 수나라 군사들이 진숙보를 새끼줄로 끌어 올렸으며 진숙보는 하약필을 보자 무서워 식은땀을 흘리고 벌벌 떨면서 연거푸 절을 했다. 이렇게 어이없게도 진나라는 멸망했다.
4월, 진숙보는 진나라 황족들과 함께 장안으로 끌려갔는데 이 때도 항상 술에 취했으며 깨어 있는 날이 드물었다. 진숙보와 함께 나라를 말아먹었던 장귀비, 공귀빈, 공범, 시문경 등은 간신으로 지목되어 장안에서 처형되었다.
진숙보의 황후 심무화(沈婺華)는 망채정헌후 심군리(望蔡貞憲侯 沈君理)와 회계목공주(会稽穆公主)의 딸로 진나라 초대 황제 무제 진패선(武帝 陳霸先)의 외손녀이다. 하지만 자식도 없고 색을 밝히는 남편에게 총애를 받지 못했다. 진숙보의 후궁 손희(孫姬)가 난산으로 아들을 낳고 사망하자 손희의 아들 진윤(陳胤)은 심황후(심무화)의 양자가 되어 오흥왕(吳興王)에 봉해지고 황태자(皇太子)에 책봉된다. 그러나 진숙보가 시녀(侍女) 장려화(張麗華)를 총애하게 되면서 진숙보는 장려화를 귀비(貴妃)에 책봉하고 심황후(沈皇后)의 양자 황태자 진윤(皇太子 陳胤)을 폐위시키고 장귀비(장려화)의 아들 진심(陳深)을 새 황태자(皇太子)에 책봉한다. 더 나아가 진숙보는 심황후(沈皇后)를 폐위시키고 장귀비(張貴妃)를 새 황후로 세우려고 했으나 그전에 이미 진나라가 수나라에 멸망하게 된다. 심황후(沈皇后)는 진나라가 수나라에 멸망하자 노비가 되었고, 장귀비(張貴妃)는 장안으로 끌려가 참수된다. 진숙보는 자신의 아버지 효선제 진욱(孝宣帝 陳頊)이 폐위시킨 진나라 3대 황제 폐제 진백종(廢帝 陳伯宗)의 외동아들 임해왕 진지택(臨海王 陳至澤)과 함께 장안으로 끌려간다.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별칭 | 재위년도 | 생몰년도 | 국구(장인/장모) | 능묘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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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皇后) | 심무화(沈婺華) | [1] | 582년 ~ 589년 | ? ~ 628년 | 망채정헌후(望蔡貞憲侯) 심군리(沈君理) 회계목공주(会稽穆公主) 진씨(陳氏) |
봉호 | 별칭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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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비(貴妃) | 장려화(張麗華) | 558년 ~ 589년 | ||
귀빈(貴嬪) | 공씨(龔氏) | |||
귀빈(貴嬪) | 공씨(孔氏) | ? ~ 589년 | ||
귀인(貴人) | 공씨(孔氏) | |||
숙원(淑媛) | 여씨(呂氏) | |||
숙원(淑媛) | 장씨(張氏) | |||
숙원(淑媛) | 설씨(薛氏) | |||
숙의(淑儀) | 서씨(徐氏) | |||
숙화(淑華) | 장씨(張氏) | |||
소의(昭儀) | 고씨(高氏) | |||
소의(昭儀) | 사씨(謝氏) | |||
소의(昭儀) | 원씨(袁氏) | |||
수용(修容) | 강씨(江氏) | |||
첩여(婕妤) | 하씨(何氏) | |||
미인(美人) | 왕씨(王氏) | |||
희(姬) | 손씨(孫氏) |
- | 봉호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별칭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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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오흥왕(吳興王) | 진윤(陳胤) | 573년 ~ 618년 | 손희 | [2] | ||
2 | 남평왕(南平王) | 진의(陳嶷) | 소의 고씨 | ||||
3 | 영가왕(永嘉王) | 진언(陳彦) | 숙원 여씨 | ||||
4 | 황태자(皇太子) | 진연(陳淵) | 575년 ~ ? | 귀비 장려화 | [3] | ||
5 | 남해왕(南海王) | 진건(陳虔) | 귀빈 공씨 | ||||
6 | 신의왕(信義王) | 진지(陳祗) | 숙화 장씨 | ||||
7 | 소릉왕(邵陵王) | 진긍(陳兢) | 숙원 여씨 | ||||
8 | 회계왕(會稽王) | 진장(陳莊) | 귀비 장려화 | ||||
9 | 동양왕(東陽王) | 진전(陳恮) | 숙의 서씨 | ||||
10 | 오군왕(吳郡王) | 진번(陳蕃) | 귀인 공씨 | ||||
11 | 전당왕(錢唐王) | 진념(陳恬) | 귀빈 공씨 | ||||
12 | 진총(陳總) | ||||||
13 | 진관(陳觀) | ||||||
14 | 진명(陳明) | ||||||
15 | 진망(陳網) | ||||||
16 | 진통(陳統) | ||||||
17 | 진충(陳冲) | ||||||
18 | 진흡(陳洽) | ||||||
19 | 진도(陳縚) | ||||||
20 | 진작(陳綽) | ||||||
21 | 진위(陳威) | ||||||
22 | 진변(陳辯) |
- | 봉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부마 | 별칭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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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광덕공주(廣德公主) | 소의 고씨 | 수 양제(隋 煬帝) 양광(楊廣) |
[4] | |||
2 | 임성공주(臨成公主) | 소의 사씨 | 진효왕(秦孝王) 양준(楊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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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공주(公主) | 진주(陳婤) | 수 양제(隋 煬帝) 양광(楊廣) |
[4] |
후주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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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西曆) |
583년 | 584년 | 585년 | 586년 | 587년 | 588년 | 589년 |
간지 (干支) |
계묘(癸卯) | 갑진(甲辰) | 을사(乙巳) | 병오(丙午) | 정미(丁未) | 무신(戊申) | 기유(己酉) |
연호 (年號) |
지덕(至德) 원년 |
2년 | 3년 | 4년 | 정명(禎明) 원년 |
2년 | 3년 |
전 임 효선제 진욱 |
제5대 진나라 황제 582년~589년 |
후 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