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효자동의 ‘청운’이란 이름은 청운초등학교 뒤쪽의 청풍계(淸風溪)라는 계곡이 있는 마을의 ‘청’자와 백운동(白雲洞)이라는 마을의 ‘운’자를 따서 지었다. 청풍계와 백운동은 인왕산의 맑은 바람, 맑은 물과 함께 흰 구름으로 덮여 있는 자연환경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초에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 지역이었다. 1914년 경성부 북부 백운동·청풍동·박정동(朴井洞)·신교(新橋)의 각 일부를 합쳐 ‘청운동’(淸雲洞)이라고 하였고, 1936년 일제가 청운정으로 바꾸었다. 1943년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종래의 행정구역을 우리말로 개칭하여 다시 청운동이 되었다. ‘효자’란 이름은 선조 때 학자 조원(趙瑗)의 아들 희신과 희철 형제라는 효자가 났다고 하여 쌍효잣골 또는 한자명으로 효곡(孝谷)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을 따서 효자동이라 하였다.[1]
정선 생가 터: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의 집터로, 인왕제색도의 풍경이 여기서 그려졌다. 52세까지 거주하였다.[11] 청운동 89-11번지에 위치하였으며, 경복고등학교 안에 표지석이 있다.
백운장(白雲莊) 터: 조선 말기의 문신 김가진의 집터에 1915년 일본인 키타무라 세이타로(北村淸太郞)가 지은 요정으로, 개업 당시 명칭은 청향원(淸香園)이었으나 1929년에 이름을 바꾸었다.[12] 1962년 9월,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에서 이 일대를 구입하여 지금은 포교원이 들어섰다.[13]
운강대(雲江臺) 터: 조선 중기의 문신 조원(趙瑗)의 집터이다. 청운동 89-11번지에 위치하였으며, 경복고등학교 안에 각자가 남아있다.
청송당(聽松堂) 터: 조선 초기의 문신 성수침의 집터이다. 청운동 89번지에 위치하였으며, 경기상업고등학교 안에 각자가 남아있다.[14]
백세청풍(百世淸風)·대명일월(大明日月) 각자: 송시열이 썼다고 전해지며, 청운동 52-58번지에 위치한다. ‘대명일월’ 각자는 현재 소실되었다.
육청헌(六靑軒) 터: 조선 후기의 문신 김수항의 집으로, 1683년에 지었다.[25][26] 옥인동 47-73번지 일대에 위치하였다.[27]
청휘각(淸暉閣) 터: 육청헌 마당에 있던 누각으로, 1686년에 지었다.[28] 청휘각을 짓고 30년 가량이 지나자 기울어져 조선 후기의 문신 김창업이 새로 지었고, 이후 김수근·김병국·김병교·김학진이 차례로 물려받았다가 민규호에게 넘어갔다.[29]
가재우물(稼齋-) 터: 청휘각 뒤에 있던 우물로, 조선 후기의 문신 가재 김창업이 그 물을 마셨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29] 옥인동 47-376번지에 소재하나, 콘크리트에 뒤덮인 상태이다.[30]
송석원(松石園) 터: 조선 후기의 시인천수경이 옥인동 47번지 일대에 지은 집으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가 결성되어 일대의 여러 여항시인들이 참여하였다.[31]
벽수산장(碧樹山莊) 터: 윤덕영이 1910년 12월에 송석원 터를 사들여 1937년 준공한 대저택이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까지만 해도 ‘송석원’이라 불렸으나, 나중에 벽수산장으로 이름이 변하였다. 1966년 4월 5일 전소되었고, 1973년 6월 철거되었다. 지금도 옥인동 47-27, 47-33번지에 대문 기둥 가운데 3개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