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사적 | |
종목 | 사적 제308호 (1984년 9월 1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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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482,884m2 |
시대 | 신라 |
주소 |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734번지 |
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청해진(淸海鎭)은 후기신라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張保皐)의 청에 따라 지금의 전라남도(全羅南道) 완도군(莞島郡) 장도에 설치하였던 진(鎭)이다. 초기에는 해적을 방비하기 위한 군사거점으로서 설치되었으며 이후 해상무역의 주요 거점으로서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누렸다.
장보고는 원래 신라의 해안 지역 출신으로 일찍이 친구 정년과 함께 당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을 지냈으며, 신라로 돌아와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 주민을 잡아다 노비(奴婢)로 팔고 있는 실상을 보고하면서 해적을 소탕하기 위한 군사거점으로서 청해진을 설치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왕에게 청했다. 왕은 이를 수락하여 흥덕왕 3년(828년) 4월 장보고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장보고가 세운 청해진이 신라 바닷길의 요충지로 다른 이름은 조음도(助音島)이며, 《삼국사기》가 편찬될 당시에 이미 지금의 이름과 같은 완도(莞島)라 불리던 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완도는 조선 시대(朝鮮時代)에는 전라도(全羅道) 해남현(海南縣)과 강진현(康津縣)에 나누어 속했다.
청해진을 거점으로 장보고는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안에 출몰하던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중국 · 일본 간의 해상무역에도 개입해 부를 쌓았다. 이로써 청해진은 해상무역의 거점 항구로서 성장하여 바닷길의 요충이 되었으며, 재력에 겸해 무력까지 갖추고 신라 정계의 왕위 다툼에도 개입해 무력으로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을 옹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次妃)로 들이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보고는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에게 살해되었고, 문성왕 13년(851년) 청해진은 폐지되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벽골군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권제32 잡지(雜志)제1 제사조에는 신라에서 중사(中祀)로서 제사지내던 곳의 하나로서 청해진이 언급되어 있다.
한국의 해양사를 연구한 동국대학교 윤명철 교수는 고대 신라와 당을 오가는 항로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루트를 지적하였는데,
등이 있다.[1] 이들 항로에서 중국측 선착지인 산둥반도의 등주 · 밀주, 양자강 하구의 쑤저우나 양저우, 항저우와 밍저우 등지에는 당에 체류하는 신라인들이 모여사는 신라방(일종의 「신라인 자치주」)이 존재했으며, 당시의 항해 기술의 한계 때문에서라도 가능한 육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연근해 항로를 이용해야 했던 실정상 당 - 신라뿐 아니라 당 - 일본의 항로 또한 한반도 남부 해안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2] 이 과정에서 서해에서 남해로 돌아가는 지점에 청해진이 있었다.
청해진이 위치한 완도 일대는 남북 연근해항로가 통과하는 곳으로 한반도에서는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지점이자, 중국 강남 지역에서 한반도로 북상하는 항로가 만나는 곳이기도 했다. 한반도 서남해의 리아스식 해안과 밀접한 섬임에도 불구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은 데다 일단 섬 내부로 들어오면 파도도 일지 않고, 부두에 가까운 곳에 산이 이어져 있어 방어거점으로서도 유리했으며, 강진, 해남 등의 배후도시가 존재했다.
완도 청해진 유적(莞島 淸海鎭 遺蹟)은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734 장도(將島)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군진(軍鎭) 유적이다. 1984년 9월 1일 사적 제308호에 지정된 '완도 청해진 유적(莞島 淸海鎭 遺蹟)'은 완도에서 목교(木橋)로 이어진 장도라는 섬이다. 완도에서 장도까지의 거리는 약 180m쯤 되고 하루 2차례씩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갈 수도 있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무장 장보고 장군은 이곳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삼해(三海)의 해상권을 장악한 해상교역로의 본거지로서 중요한 역사적 유적이다.
완도 청해진 유적지는 발견전까지 인근 지역 주민들이 밭으로 사용하는 등 오랜 세월 땅 밑에 묻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1959년 태풍 사라 이후에 드러난 목책(원목열)으로 인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991년에서 1996년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철저한 발굴조사를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