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 崔濟愚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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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최복술(崔福述) → 최제선(崔濟宣) → 최제우(崔濟愚) |
출생 | 1824년 12월 18일 조선 경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 |
사망 | 1864년 4월 15일 조선 경상도 대구 | (39세)
사인 | 사형 집행 |
거주지 | 조선 경상도 경주 |
국적 | 조선 |
민족 | 한민족(경주 최씨) |
별칭 | 자(字)는 성묵(性默) 호(號)는 수운(水雲) |
활동 기간 | 1860년 5월 25일[1]~1864년 1월 18일[2] |
교파 | 동학 |
수행 성직 | 동학[3] |
칭호 | 동학 초대 교조 |
칭호 기간 | 1860년 5월 25일[4]~1864년 1월 18일[5] |
전임자 | (초대) |
후임자 | 최시형 |
배우자 | 밀양 박씨 부인 |
자녀 | 2남 4녀(그들 6남매 가운데 장남 최세정, 차남 최세청, 차녀 최완) |
부모 | 최옥(부), 곡산 한씨 부인(모) |
친척 | 최종하(친조부) 신안 주씨 부인(장모) 최경우(친증조부) 최시형(원척 족질) |
웹사이트 최제우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천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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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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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 최시형 · 손병희 · 박인호 전봉준 |
경전 |
동경대전 · 용담유사 해월신사 법설 의암성사 법설 |
교리 |
시천주 · 사인여천 · 인내천 · 후천개벽 |
역사 |
동학 · 동학 농민 혁명 |
관련 단체 |
천도교 중앙총부 천도교 연원회 천도교유지재단 천도교청우당 |
문화유산 |
천도교 중앙대교당 · 천도교 임실교당 |
최제우(崔濟愚, 본명: 최복술, 본명 한자: 崔福述, 1824년 12월 18일[6]~1864년 4월 15일[7])는 조선 시대 말기의 동학의 창시자이자 초대 교조가 되고, 호(號)는 수운재(水雲齋)·수운(水雲)이다. 경상도 월성 생이고, 본은 경주(慶州).
1824년 12월 18일, 조선 경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5대조 최국진(崔國鎭)이 음보로 통덕랑 품계 이후 벼슬이 없어 몰락한 양반 가문의 자손으로 출생하였다. 부친인 근암 최옥(崔鋈)과 재가(再嫁)한 어머니 한씨(韓氏) 사이에서 서자(庶子)나 다름없는 신분(재가녀의 자)이었으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울 수 있었다. 최진립의 큰형 최진흥이 최제우의 7대조가 되며, 경주 최부자집과는 친가 방척 친족관계에 있었다.
31세(1854)까지 10년 이상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유불선(儒佛仙) 삼교, 서학(西學), 무속(巫俗),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비기도참사상 등 다양한 사상을 접하는 동시에, 서세동점과 삼정문란(三政紊亂)이라는 이중의 위기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참담한 생활을 직접 체험했다.
32세(1855년 12월 28일1860년(철종 11년) 천주 강림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시(창명)하게 된다.
)에 청년 수운은 우연히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비서(秘書)를 얻어 일종의 신비 체험을 한 끝에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근처에 있는 천성산 자연 동굴에 들어가 49일 기도 생활을 했다. 생계를 꾸려가기도 힘든 지경에 처한 가족을 처가에 맡긴 채 구도 생활을 계속하던 수운은 36세(1859)가 되던 해에 오랜 유랑 생활과 처가살이를 청산하고 고향 용담으로 돌아와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고향에 정착한 지 1년 뒤인 1860년 음력 4월 5일에 수운은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천사문답(天師問答)’이라고 불리는 하늘님과의 문답 끝에,이 무렵 중국에서는 태평천국의 난과 영·프 연합군의 베이징 침입 사건이 있었다(→제2차 아편 전쟁). 이 여파로 조선에 대한 열강의 세력 침투가 시작되어 민족적인 위기의식이 조성되어 있었다. 특히 서학(천주교)의 전래는 사상과 풍속이 다른 조선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최제우는 서학에 대항하는 유교·불교·선교 등의 교리를 종합한 민족 고유의 신앙인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은 후에 천도교로 발전하였다. 동학의 근본사상은 ‘인내천’(人乃天)이다. 즉, 이것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면서, 성실과 신의로써 새롭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이었으며 어지러웠던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사상이었다. 또 모든 사람은 평등함을 주장하였는데, 갈수록 신도가 늘어나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수운은 동학을 펴기 시작한 지 만 3년도 되지 않은 1863년(철종 14년) 12월에 체포되었고, 이듬해 3월 10일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는 죄(左道亂正之律)’로 대구 경상감영 안의 관덕정(觀德亭) 뜰 앞에서 처형당함으로써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1907년 순종 때 그의 죄가 풀렸다.
수운의 사망 이후 그의 후계 동학 교주는 최시형이 이어받게 되었으며 2대 동학 교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