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2월 29일에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사아치오울라르"(Saatçioğulları)로 알려져 있었다.[4] 카밀 톨론은 무히틴과 베히예의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5]
카밀 톨론은 1937년에 뮈에이예트 불루트(Müeyyet Bulut)와 결혼했다. 그 후에 그들의 자녀인 아바툰(Abatun)과 바르큰(Barkın)이 태어났다.[6] 1943년에 뮈에이예트 불루트와 이혼하고 무자페르 빌릭튀(Muzaffer Biliktü)와 결혼했다. 1년 뒤에 아들인 다라(Dara)가 태어났고 6년 뒤에 딸인 자나(Cana)가 태어났다.[7]
카밀 톨론은 아버지의 사업을 이유로 여러 지방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5] 1931년에는 앙카라 소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5] 카밀 톨론은 공학을 전공하려고 했지만 당시 터키에는 공과대학이 없었고 나중에 뮤직박스를 발명하게 된다.[5] 카밀 톨론의 주인이 발명품을 사려고 했지만 주인이 속했던 회사는 가격이 비싸서 사지 않았다.[5] 카밀 톨론은 나중에 뮤직박스를 에페스 가문에 팔아주게 된다. 1931년에는 앙카라 법학대학에 재학했다. 터키의 총리를 역임한 아드난 멘데레스(Adnan Menderes)는 그의 같은 반 친구였다.[5]
카밀 톨론은 1935년에 법학대학을 졸업하고 PTT 검사관에 임명되었으나 1937년에 아나톨리아로 첫 시찰 여행을 떠났던 이력 때문에 사임했다.[5] 카밀 톨론은 부르사 시장을 역임했던 파흐리 바트자(Fahri Batıca)와 함께 가게를 열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터키 최초의 세탁기를 생산하게 된다.[8][9][10][11]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는 자신과 같은 학교 동문이었던 카밀 톨론에게 전기 모터를 생산할 것을 제안했는데 카밀 톨론은 터키 최초의 전기 모터를 생산하게 된다.[12][13] 카밀 톨론은 이 기간 동안에 구리선 기계를 개발했다.[14][15] 카밀 톨론은 나중에 정의당과 BCCI의 설립자가 되었다.[16][17] 1978년 7월 23일에 스위스에서 사망했다.[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