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어 | Lux Mentis Scientia (라틴어) 지식, 마음의 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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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사립 리버럴 아츠 칼리지 |
설립 | 1813년 |
총장 | 데이비드 A. 그린 |
학부생 수 | 2,100 |
국가 | 미국 |
위치 | 메인주 워터빌 |
교색 | 콜비 파랑, 프리실라 회색 |
웹사이트 | http://www.colby.edu |
콜비 칼리지의 위치 |
콜비 칼리지(영어: Colby College)는 미국 메인주 워터빌에 위치한 학부 중심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이다. 매년 60개국 이상에서 약 2천여 명의 학생이 콜비 칼리지를 다니고 있다.[1] 1813년 메인 문예 신학원(Maine Literary and Theological Institution)으로 세워졌으며, 학교가 위치한 도시인 워터빌에서 이름을 따 워터빌 칼리지(Waterville College)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침례교 자선가 가드너 콜비의 기부로 콜비 대학교(Colby University)로 이름을 바꾸었고, 리버럴 아츠 칼리지의 교육 제도를 도입하며 오늘날의 이름을 갖게 됐다.
2017년 《U.S. 뉴스 & 월드 리포트》의 미국 리버럴 아츠 칼리지 순위에서 12위를 기록했고, 《포브스》의 미국 고등 교육 기관 평가에서 61위를 기록했다.[2]
1813년 2월 27일 매사추세츠주는 침례교도들의 주장으로 메인 문예 신학원의 설립 요청을 받아들였다.[3] 메인 문예 신학원은 곧 메인주 워터빌로 옮기고 시민들이 기증한 179에이커의 땅에 자리를 잡았다. 1820년에 메인주가 매사추세츠주에서부터 떨어저 나간 뒤 메인주 의회는 메인 문예 신학원이 매사추세츠주로부터 받은 인가를 인정했으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입학 과정에서 학생들의 종교를 묻지 않았고, 이사회 임원들을 선정할 때 종교적인 시험을 보지 못하게 했으며, 이사회가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1821년 2월 5일 메인 문예 신학원은 워터빌 칼리지(Waterville College)로 이름을 바꾸었고, 4년 뒤에는 신학대학이 폐지됐다.[4]
1833년에 루퍼스 뱁코크 목사가 제2대 총장이 됐고, 학생들은 미국 최초로 대학에서 반노예제 협회를 결성했다.[5] 미국 남북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많은 남학생들이 전쟁에 나섰고 27명의 학생들이 전쟁으로 죽었다. 전쟁이 끝난 뒤 워터빌 칼리지에는 몇 명의 학생들만 남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됐고, 워터빌 칼리지는 폐교 위기에 처했다.[3] 1865년 8월 9일 침례교 자선가 가드너 콜비가 워터빌 칼리지의 졸업식 만찬에 참석했고, 5만 달러를 워터빌 칼리지에 기부하기로 했다. 2년 뒤 워터빌 칼리지는 그를 기념하고자 콜비 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6] 이사회는 미국 남북 전쟁에서 죽은 콜비 대학교 출신 남성들을 기리고자 도서관과 예배당을 짓기로 결정했고, 1869년 졸업식에 기념관을 봉헌했다.[3] 콜비 대학교는 주변의 베이츠 칼리지, 보든 칼리지와는 지리적 문제, 사회경제적 및 정치적 차이 등으로 인해 떨어져 지냈다.[7] 1871년 가을에 콜비 대학교는 뉴잉글랜드에서 최초로 여학생을 받은 남자대학이었으나[8] 1890년 다시 성별에 따라 분리했다.[9] 1899년 1월 25일 총장 너새니얼 버틀러 주니어는 학교 이름을 콜비 칼리지로 바꾸었다.[6]
1920년 콜비 대학교는 매사추세츠주로부터 인가를 받은 때가 아닌 메인주로부터 인가를 받은 때인 1820년을 기준으로 100주년을 기념했다.
콜비 칼리지에는 54개의 전공 과정이 있고, 프로젝트기반 학습을 중시한다.[10]
콜비 칼리지의 학생 가운데 ⅔ 이상은 졸업하기 전에 교류 제도를 통해 다른 대학에서 공부한다. 또한 컬럼비아 대학교, 다트머스 대학과 공학 복수학위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11][12]
2017년 《U.S. 뉴스 & 월드 리포트》는 콜비 칼리지의 입학 절차를 '가장 선별적'이라고 평가했으며 리버럴 아츠 칼리지 가운데 12위로 뽑았다.[13] 《포브스》의 미국 대학 순위에서는 61위를 기록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