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깅은 교장의 권한이 사실상 교실에 국한됐던 기숙학교의 질서유지를 위한 구조에서 비롯됐다. 1828년부터 1841년까지 럭비의 교장인 토마스 아널드는 패깅을 학교 당국이 고학년에게 부여한 권력으로 그들이 어린 소년들보다 더 많이 행사하도록 하는 행위로 정의했다.[1] 패깅은 16세기 세인트 폴, 이튼 칼리지, 윈체스터 칼리지에서 완전히 확립된 시스템이었다.[1]
패깅은 양쪽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잘 정립한 것이었다. 때로는 패그 마스터라고 불리기도 하는 선배는 그의 하인들의 보호자였고 그들의 행복과 선행을 책임지고 있었다.[1] 괴롭힘이나 부당함과 같은 교실 밖의 문제가 있을 경우, 후배 소년의 책임은 형식적인 주인이나 가정장이 아니라 그에게 있었고, 가장 중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건은 패그 마스터, 자신의 책임으로 처리했다.[1]
하인들이 맡은 임무, 걸리는 시간, 그리고 그들의 처우는 매우 다양했다. 각 학교에는 고유의 전통이 있었다. 1900년경까지 하인들의 임무는 부츠 검게 칠하고, 옷을 닦고, 아침식사를 요리하는 것과 같은 보잘것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라는 제한은 없었다.[1] 후에, 가짜는 심부름을 하거나 가짜마스터들의 서재에 차를 가져다 주는 것과 같은 가벼운 일에 제한되었다.[1] 많은 학교에서, 패그 마스터들은 학기 말에 자신의 하인들에게 그들이 노력한 것에 대한 대가로, '패그 팁'이라는 일정 금액을 주어야 했다. 1911년 브리태니커는 이튼 칼리지에서의 역할의 진화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1] 학칙에 따르면, 패깅은 가혹한 규율과 교내 체벌을 수반할 수 있다. 패깅은 때때로 성적 학대와 관련이 있었다.[2]
20세기 후반에 기숙교육과 아동발달에 대한 태도가 바뀌면서, 패깅은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배들은 자신들이 하인으로서 선배를 대했고, 곧 자신이 이 제도의 혜택을 누릴 것이라 생각해 이러한 변화를 꺼려했지만, 1960년대와 1980년대 초 사이에 패깅의 의무들이 간소화되었고, 그 후 대부분의 주요 공립학교에서 이 제도는 폐지되었다.[3] 영국에서는 이 관행이 쓸모없게 되었다고 여겨진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