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조합총연맹(韓國勞動組合總聯盟, The Federation of Korean Trade Unions, FKTU)은 대한민국의 노동조합이다. 1946년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으로 발족하면서 피상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1960년 11월 한국노총으로 개칭했다. 1949년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에 창립회원으로 참가했다. 본부소재지는 서울특별시영등포구 여의도동 35번지이다.
노동자 대투쟁 직전인 1987년 6월 30일 당시에 2,449개 노조와 90만 6천여 명을 가졌던 한국노총은 12월 말에 각각 3,532개와 117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추세는 1988년에도 지속되어 당해 6월 30일엔 단위노조 5만 62개에 조합원 수 151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2022년 현재 조합원 수는 1,121,819명이다.
1946년 3월 1일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 결성되었다.(위원장 홍윤옥) 당시 민족진영의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약칭 ‘독청’)의 ‘노동부’가 분리되어 만든 우익정치결사체였다. 연맹은 5월 1일 해방 후 첫 메이데이를 맞고, 이후 본격적인 조직 결성작업이 시작된다. 1949년 4월 29일 광산노동연맹이 결성되고, 11월 23일에는 ICFTU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가맹회원이 되었다.
1953년 3월 8일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조합법, 노동위원회법이 공포 및 실시되었고, 노조법이 제정된 후 이승만이 대한노총 총재에서 사퇴하였다. 5월 13일에는 근로기준법이 공포되었다. 1958년 10월 13일 집단지도제에서 위원장제로 규약을 개정하였는데, 합법성의 여부를 두고 관련 분쟁은 지속되었다. 1959년 3월 1일 제1회 노동절 기념행사를 열고, 메이데이를 3월 10일로 바꾸어 개최하였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동서 냉전이 격화되어 미국에서 메이데이 행사가 9월 첫 번째 월요일로 변경되자 한국에서도 대한노총 창립기념일인 3월 10일로 변경키로 한 것이다. 동년 8월부터 대한노총이 분열되기 시작하여 10월에는 제2노총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되었다.(의장 김말룡) 1960년 2월 18일, 서울노동회관이 개관하였다. 1960년, 4.19 혁명이 발발하여, 위원장 김기옥이 축출되고 5월에는 대한노총간부가 전원 사퇴하였다. 11월 25일에는 전국노동단체 통합대회가 열렸는데, 이 때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이 통합되어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을 결성하였다.
그러다가 1961년 5월 박정희 등에 의한 군사쿠테타가 발발하여, 5월 19일 노동쟁의가 일체 금지되었고, 이외에도 언론출판 사전검열, 국외여행금지, 유언비어 유포금지 등이 선포되었다. 이에 혁명위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었고, 곧 모든 정당 및 노조, 사회단체에 5월 23일부로 해체령이 내려진다.
1961년 8월에는 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과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 중 개정법률이 공포되어 한정적이나마 노조활동이 재개되었다. 한국노동단체 재건조직위원회가 발족하고, 재건조직요강에서 산업별 조직체제를 갖출 것을 선언한다. 곧 전국섬유노동조합, 전국광산노동조합, 전국체신노동조합, 전국철도노동조합, 전국운수노동조합, 전국해상노동조합, 전국금융노동조합, 전국전매노동조합, 전국전력노동조합, 전국화학노동조합,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노동조합총연맹(약칭 노총), 전국부두노동조합, 전국연합노동조합 등이 조직되고 중앙노동위원회가 발족한다. 1962년 2월 7일에는 각 도마다의 협의회를 결성하였다. 1963년 2월, 노총은 ‘정부관리기업 직원보수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 폐기 및 쟁의권 부활을 위한 투쟁을 벌이고, 쟁의 금지조치 철회를 요구한다. 4월 17일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이 최고회의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자 노총은 ‘위헌노동법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해 투쟁에 돌입한다. 7월 6일에는 전국출판노동조합이 결성되고, 11월 15일 전국자동차노동조합이 운수노동조합에서 분리되었다. 1968년 6월 28일에는 자본시장육성법 제정에 대한 반대투쟁을 벌이고 투쟁위를 구성하여 총파업을 포함한 단계적인 투쟁전략을 수립한다. 1969년 9월 11일 섬유노조 면방분회 파업을 벌이고 방직협회는 직장을 폐쇄한다. 동년 12월에 정부가 ‘외국인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쟁의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국무회의에 상정하자 ‘노동기본권수호투쟁위원회’를 설치, 총궐기대회를 개최한다. 1970년 1월 3일 외투기업 임시특례법 통과에 항의하고 정치참여를 선언한다. 동월 7일 한국경영자총연합회가 설립되었고, 12월 12일 전국관광노동조합이 철도노조에서 분리 결성되어, 한국노총 회원노조가 17개로 증가하였다. 1971년 1월 6일 한국노총 노동상담소가 설치되었다.
1971년 4월 27일 박정희가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에 노총은 ‘비상시국하의 우리 노동자의 자세를 밝힌다’ 성명을 발표한다. 그러나 심각성을 인지하고 국가보위특별조치법에 대한 반대 유인물을 작성하던 중 동아일보에 정보가 유출되어 1면에 보도되자, 중앙정보부에 조선원 사무차장이 연행되어 고문과 협박 끝에 사직한다. 12월 27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12월 31일 국가동원령이 공포된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10월 유신 특별선언을 발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노동관계법을 개정하여 쟁의권을 원천 봉쇄한다. 10월 2일에 노총은 정권의 압력에 의해 유신지지 성명을 발표한다. 1974년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4호를 선포하고, 곧 울산 현대조선소에서 도급제 철폐, 차별대우 철폐, 임금인상, 노조결성 보장 등을 요구하며 분규 중이던 663명을 연행하고 21명을 구속한다.
1975년 2월 7일 한국노총회관 기공식을 가지고 1977년 9월 9일 노총 장학회 법인이 세워진다. 1979년 8월 9일, YH무역 여성노동자 신민당사 농성을 경찰이 강제해산 과정에서 김경숙이 사망하고 노조지부장 최순영 등이 구속되었다. 8월 28일에 노총은 노동관계법 개정, 임금채권 확보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 노사협의회법 제정, 근로자 협동조합법, 종합고용대책 수립 등을 건의하였다. 곧 박정희가 사망하고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노총은 국가보위법 철폐를 청원하고 정부의 임금억제조치에 대한 대책 마련을 건의한다.
1980년 다시 전두환 등에 의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7월 19일 노동조합 정화조치로 노총 및 산별노조, 연합단체의 활동이 전면 유보되었다. 곧 노총 위원장, 산별노조위원장 등 11명이 사퇴한다. 곧 노총은 중앙정화추진위원회의를 열고 노조간부 191명에게 정화대상자 및 자진사퇴자를 확정 통고한다. 12월 3일 노동관계법이 전면 개정된다. 1986년에는 최저임금제 입법을 청원하여, 12월 31일 최저임금법이 제정된다.
1987년 노총이 4.13 노총, 4.13 호헌지지에 성명하자 금융노련 산하 13개 노조가 노총의 4.13 호헌지지 반대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곧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포함한 6.29선언이 발표된 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고 노총은 구속노동자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검찰총장 면담을 가진다. 또한 노총은 노동법 개정 촉구 궐기대회를 열었고, 곧 정부는 개정 노동법을 공포하게 되었다.
11.15: 비정규노동법 개악저지, 공무원 노동3권 쟁취, 한일FTA저지 등을 위한 총력투쟁. 25일간 여의도 문화마당 천막농성투쟁.
2005
3.14: 독립 60주년 맞이, ILO에서 일본군 위안부 지원활동
4.22: 비정규 권리보장 입법을 위한 양대노총 위원장(이용득, 이수호) 공동단식. 12일간 진행, 5월 3일 교섭 최종 결렬
5.1: 한국노총 복지센터 비리사건 발생(전현직 임원 일부 연루)관련 대국민 사과, 조직혁신위원회 구성.
6.1: 임시대의원대회. 외부감사제 도입, 선거제도 개혁, 여성할당제 도입 등 조직 혁신 규약 및 규정 제·개정안 통과
6.7: 여의도센터 업무시작
6.14 김태환 충주지부장이 사측이 파업 무력화를 위해 고용한 대체 용역레미콘 차량에 치어 사망. 이후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3권 쟁취 투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
7.2: 중앙노동위원회 및 지방노동위원회 노동자위원 총사퇴. 김대환 노동부장관 퇴진 서명지 청와대 전달
7.7: 김대환 노동부장관 퇴진, 김태환 열사 정신 계승 및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3권 쟁취를 위한 총파업. 7.9, 김태환 열사 장례식
8.26: 한국노총이 김태환 열사 사망에 대해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한 김대환 장관이 퇴진하지 않는 한 2005년 10월 10일부터 부산에서 개최 예정이던 제14차 ILO아태지역 총회에 불참하겠다는 의사를 ILO 사무총장에 전달. 이에 따라 총회는 2006년 8월 29일로 연기됨.
11.10 ~ 30: 비정규직 보호입법 제정을 위한 양대노총 위원장, 경총회장, 상의 부회장 8차에 걸친 협상. 11월 3일 비정규직 보호입법 협상 최종 결렬. 한국노총 최종안 입법요구.
2006
3.1: 한국노총 창립 60주년 기념 상징물 개정 및 새로운 운동이념, 기조, 전략 채택, ‘평등복지사회 실현을 위한 참여와 사회연대적 노동조합주의’. 마크, 로고 및 노총가 등 상징물 개정 사업.
9.11: 노사관계로드맵 노사정합의.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 및 노조전임자 급여지원 금지규정 시행 3년 유예, 직권중재제도 폐지, 필수공익사업장 필수유지 업무제도 도입 및 대체근로 허용, 제3자 지원신고제도 폐지 등. 이를 계기로 양대노총 대립 격화, 민주노총 및 전해투 조합원의 이용득 위원장 폭행 및 부위원장실 폭력 점거사건 발생.
10.31: ICFTU와 WCL가 통합하여 ITUC 창립, 한국노총도 가입.
11.3: 기간제 근로자 보호법제정안, 파견근로자보호법 개정안, 노동위원회법 개정안 등 비정규직 3개법안 국회 통과. 노사발전재단 2007년 2월 출범 노사정 합의
1990년까지는 기존 집권층을 지지하였다. 1997년 김대중과 정책 연대를 하여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 소속의 비례대표를 배출하였다. 2004년에는 녹색사민당을 창당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008년에 한나라당과 연대하기도 하였으나,[1]2011년에 민주통합당에 참여하여 공약을 정하는데 협력하였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