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혼(許渾, 788년-860년대)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자 관인이다. 자는 용회(用晦),윤주(潤州) 단양현(丹陽縣)[1] 사람이다.[2] 측천무후 시절 재상이었던 허어사(許圉師)의 6세 손으로 만당(晚唐)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선종(禪宗)을 독실하게 믿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원(貞元) 4년(788년) 태어났으며[3] 원화(元和) 원년(806년) 대량 양씨(大梁梁氏) 가문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대화(大和) 6년(832년) 진사에 급제, 개성(開成) 원년(836년) 노균(卢钧)의 막부에 들었다.[4] 개성 3년 봄에 당서현위(当涂县尉)로 임명되었고 ;회창(会昌) 원년(841년) 태평현령(太平县令)에 임명되었다가[5] 겨울에 감찰어사(监察御史)로 승진하였는데, 회창 4년에 윤주사마(潤州司馬)로 부임하였다. 선종(宣宗)이 즉위하고 수도로 돌아왔다. 대중(大中) 3년에 다시 감찰어사가 되었는데 병이 있어서 조정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동쪽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고 한다.[6] 후에 목주(睦州)로 나가게 되었다.[7] 대중 5년에 동도(东都) 낙양(洛陽)으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8] 하남윤(河南尹) 유연(刘瑑)과 서로 왕래가 있었다. 대중 7년에 원외랑(员外郎)으로써 수도를 떠나 영주자사(郢州刺史)로 나가게 되었고,[9] 세간에서는 허영주(許郢州)라 불렀다.
함통(咸通) 원년(860년) 6월 회계(会稽)로 가서 절동(浙东)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진압하였다.[10] 만년에 물러나 은거하면서 단양 정묘교(丁卯橋)에서 살았다.[11] 당시 세간에서는 그를 허정묘(許丁卯)라 불렀다고 한다.[12] 사망한 해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대중 9년에서 함통 2년 사이에서 사망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13]
허혼의 시는 대부분 율시(律诗)와 절구(绝句)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고취》(唐诗鼓吹)에는 그의 7언율시 31수가 실려 있는데 대부분 산림을 노닐면서 벗과 전별할 때 써준 것으로 물(水)이라는 글자를 사용한 것이 매우 많아서, 사람들은 '허혼의 시 1천 수는 모두 물에 젖어 있다(許渾千首濕)'라고 칭하였다고 한다.[14] 구법(句法)은 완급이 세밀하고 정제되어 있으며 성율(声律)의 원숙함을 허혼의 시에 빗대기도 하였다.[15] 당시 저명한 시인이었던 두목(杜牧)、위장(韋庄) 및 송대(宋代)의 육유(陸游)가 모두 그의 시를 숭배하고 추앙하였다. 다만 그의 시를 두고 임기응변하는 재주가 모자라다거나 기교는 넘치는데 맛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16]
문집으로 《정묘집》(丁卯集) 2권이 남아 있다.[17] 《전당시》(全唐诗) 권11에 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5백여 수에 달한다. 그 시의 평가는 역사상으로도 사뭇 격차가 있으나 역대에 그의 시에 대한 토론과 평가는 매우 높았으며, 찬양하는 사람만큼이나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는 당대 시인 가운데서도 또한 그리 자주 볼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전당시》에는 허혼이 신라로 돌아가는 벗에게 전별로 써 주었다는 한시 1수가 실려 있다.
과거 시험을 끝마치고 신라로 돌아가는 벗을 전송하며(送友人罷擧歸新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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滄波天塹外 | 푸른 파도 가로막힌 바다 저 바깥 |
何島是新羅 | 어느 섬이 신라 나라 거기일런가. |
舶主辭番遠 | 배 주인은 번국 떠나 멀리도 오고 |
碁僧入漢多 | 바둑 두는 중은 중국 많이도 온다. |
海風吹白鶴 | 바닷바람 하얀 학 날개에 불고 |
沙日曬紅螺 | 모래밭 햇볕에서 소라를 말리네 |
此去知投筆 | 이제 가면 붓 던질 것을 알겠거니와 |
須求利劍磨 | 모름지기 날카롭게 칼을 갈아라. |
허혼의 시 가운데 《함양성동루》(咸阳城东楼)의 '산비 오려 하니 바람이 가득차네(山雨欲來風滿樓)'라는 구절은 중국의 경제학자 쑹훙빙(宋鴻兵)은 2014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 《화폐전쟁》 시리즈의 다섯 번째 권에 해당하는 '탐욕경제'의 부제로도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