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노지의 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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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노지 화공 그림 (메이지 시대, 요사이 노부카즈 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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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지휘관 | |||||||
아케치 미쓰히데 |
오다 노부나가 | ||||||
병력 | |||||||
13,000명 | 100여명 | ||||||
피해 규모 | |||||||
불명 |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타다 등의 전사 |
혼노지의 변(일본어: 本能寺の変)은 1582년 음력 6월 2일(6월 21일) 혼노지에서 발생한 센고쿠 사(戰國史)의 분수령이 된 사건을 말한다.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일어난 이 사건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상이 열렸다.
아케치 미쓰히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주코쿠로 진군 중 돌연 회군, 혼노지를 기습해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하게 된 것이 사건의 개략적인 내용이다.
1582년 5, 6월의 그 당시 일본의 정세는 오다 노부나가가 마침내 그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다케다씨를 병합하면서 오다 가는 전에 없던 강력한 세력을 형성할 것이라 보고 있었다. 그 당시 유력 가문은 크게 모리, 호조, 우에스기로 세 가문이 있었다. 그러나 우에스기 가와 호조 가는 변방에 크게 떨어져 있어 이제 중앙으로의 진출이 어려워져 대세에 벗어난 만큼 이제 오다 가문에게 실질적인 적은 100만 석의 모리 가 정도 밖에 없었다.
그 당시 모리 가문을 공격하는 일을 총지휘하는 사람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였다. 노부나가는 여분의 병력을 모리 가문을 공격하는 일에 동원하였고 동원되는 군세 중 하나가 바로 아케치 미쓰히데였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아들여 단바에서 자신의 군세를 소집하여 서쪽으로 진군, 노부나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듯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미쓰히데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가 교토에서 열병식을 계획한다고 말했고 이에 병사들은 의심하지 않고 따라갔다. 그러나 혼노지에 다가서는 순간 미쓰히데가 외쳤다.
“ |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 本能寺に あり!)"[1] | ” |
이 말과 동시에 아케치 군이 혼노지에 난입해 들어갔다. 그 당시 노부나가는 혼노지에 숙소를 잡고 있었다. 그 당시 노부나가를 수행하고 있던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고 1만에 이르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군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노부나가는 분전 끝에 시동 모리 란마루와 함께 자결한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는 말은 현재에도 일본에서 많이 쓰이는 말이다.[2]
다치바나 교코(立花京子)가 《노부나가와 십자가》라는 책에서 제창한 설로 조선과 명 등 아시아의 침략을 노리던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가 일본의 정권 교체를 꾀하기 위해 일으켰다는 설이다. 이설은 "오다 노부나가 정부가 예수회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고 되어 있다. 예수회는 노부나가의 후원자 였는데 노부나가가 예수회와 스페인, 포르투갈 식민 확장 정책 의도에서 일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또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자 예수회는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날 것을 우려해 기리시탄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를 앞세워 노부나가를 죽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뢰도가 떨어지는 ' 아케치 軍記' 등을 검증 없이 다 수 인용 하는 등의 문제가 있어 이 설은 다른 학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