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벽희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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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중국 복건성 |
입적 | 850년 |
칭호 | 임제종 10대 조사 |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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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희운(黄檗希運, ? ~ 850년)은 중국 남선종 계열인 임제종의 제10대 조사이다. 스승인 위앙종과 임제종의 9대 조사 백장회해에게 법을 이어받아, 제자인 임제종 11대 조사 임제의현에게 전해주었다.
시호 단제(斷際)이고, 황벽선사(黃檗禪師) 또는 단제선사(斷際禪師)로 알려져 있다.
이마에 작은 혹이 있었고, 음성이 우렁찼으며, 7척이나 되는 거구였다고 한다.[1]
중국 당나라 푸젠성[福建省] 출생으로, 농사꾼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10살 때, 어머니를 따라 황벽산의 사찰에 가서, 큰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이후, 집에 돌아와서 계속 생각에 잠겨 있다가 10일 후에 10살의 나이로 홍주(洪州) 황벽산(황보산)에 들어가 승려가 된다.[2]
어릴 때부터 지기(志氣)가 왕성하여 출가한 후, 위앙종과 임제종의 9대 조사인 백장회해의 제자가 되었다.
842년에 상국(재상, 정승)인 배휴(裵休 裵相國, 797-870)가 강서성(江西省) 종릉(鍾陵)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하여, 황벽희운을 용흥사(龍興寺)에 모셨다. 848년에 안휘성(安徽省) 완릉(宛陵)에 부임해서는 황벽희운을 완릉(宛陵)의 개원사(開元寺)로 모셨다.
이후 황벽은 황벽산에서 출가하고 최후까지 마쳤으며, 지명에 따라 황벽희운이라고 부른다.
황벽희운이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백장회해를 만났다. 황벽희운은 백장회해에게 진리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물었다. 백장회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황벽희운은 침묵으로 뒷사람들을 끊어지게 하지 말라고 했다.[3]
백장회해는 황벽희운에게 나는 애초에 네가 그렇게 할 것 같았다며 백장회해는 방장실로 들어갔다. 곧, 황벽희운도 방장실로 따라 들어갔다. 이를 법을 이어받았음을 뜻하는 것이다.[4]
황벽희운이 대웅산에서 절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백장회해가 황벽희운에게 어디에 갔다오냐고 물었다. 황벽희운은 대웅산 밑에서 버섯을 따서 왔다고 했다. 황벽희운은 갑자기 '어흥'이라고 하며 호랑이가 물어 뜨는 시늉을 했다.[5]
백장회해가 도끼를 들어 황벽희운을 찍는 시늉을 하자, 황벽희운은 도끼를 피해 백장회해를 덮쳤다. 백장회해가 법문에서 대웅산에 호랑이가 있는데, 내가 오늘 한 번 물렸으니 조심하라고 말했다.[6]
상국(재상=정승) 배휴가 개원사에 와서는 옛 승려들의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는 원주(주지)에게 형상은 그럴듯한데, 옛 승려들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원주(주지)는 아무말도 못하였고, 마침 절에 머물고 있는 황벽희운을 불러왔다.[7]
황벽희운을 본 배휴는 또 다시 형상은 그럴듯한데, 옛 승려들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황벽희운이 배휴를 큰 소리로 부르자, 배휴는 놀라서 엉겁결에 대답했다. 황벽희운은 배휴는 어디에 있냐고 되물었다. 이에 배휴가 깨달았다.[8]
중국 당나라 황제 선종은 과거에 염관사에서 수행한 적이 있었다. 이때 선종은 황벽희운과 문답을 하다가, 3번 손찌검을 받았다.[9]
이후 황제가 된 선종은 황벽희운을 욕보이기 위해 ‘인행사문’이라는 욕보이는 호를 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상국 배휴가 선종에게 말하기를, 황벽희운이 3번 손찌검을 해준 덕분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제윤회가 끊어졌다고 말했다.[10]
선종은 이에 마음을 돌려 삼제윤회를 끊어줬다는 뜻으로 ‘단제(斷際)’법호를 내려주었다.[11]
법어(法語)는 배휴(斐休)가 집대성하여 《황벽산단제선사 전심법요(傳心法要)》와 『완릉록(婉陸錄)』이 있으며, 선의 어록의 대표로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12]
이마에 작은 혹이 있었고, 음성이 우렁찼으며 7척이나 되는 거구였다고 한다.
농사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고향 근처의 황벽산에 있던 절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이때 그는 어떤 큰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발심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 희운은 앉으나 서나, 밤이나 낮이나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가 마침내 열흘째 되는 날 집을 나와 절을 찾아가 비로소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백장회해를 만났다. 희운은 백장회해에게 절을 하고 이렇게 물었다.“예로부터 전해오는 진리를 어떻게 가르치십니까?”이 물음에 백장회해는 아무 대답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자 희운이 다시한마디 했다.“스님, 그렇게 침묵만을 지키다가 뒷사람들을 끊어지게 해서는안됩니다” 희운의 이말에는 번득이는 지혜의 섬광이 있었다. 그런데 백장회해의 대답이 걸작이었다.“나는 애초에 바로 네가 그렇게 할 사람으로 보았다”이렇게 말하고 백장회해는 그대로 방장실로 들어갔다. 희운도 뒤따라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갔다는 것은 곧 백장회해의 법을 이어받았음을 의미한다.
어느날 바깥에서 돌아오는희운을 보고 백장선사가 물었다.“어디를 갔다오느냐?““대웅산 밑에 가서 버섯을 따옵니다”“범을 만나지 않았느냐?”이때 희운은 ‘어흥’하며 범이 물어뜯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백장선사가도끼를 들어 찍는 동작을 취했고 희운은 이를 피하며 재빠르게 백장선사를덮쳤다. 그날 백장선사가 상당법문에서 이렇게 설법했다.“대웅산 아래 큰 범이 있으니 대중들은 조심하라.내가 오늘 한번 물렸다”
희운은 여러곳을 편력하다가 개원사에 머물게 되었다. 하루는 재상 배휴(裵休)가 이절에 왔다가 벽에 걸려있는 화상을 보고 안내하는 스님에게물었다.“저것이 무엇이요?”“어느 고승의 상입니다.”스님의 말을 듣고 배휴는 거만한 말로 다시 물었다.“형상은 그럴 듯 하다마는... 고승은 어디있소?”스님이 대답을 못하고 희운선사를 불러왔다.
배휴가 재차 선사에게 물었다.“형상은 볼만하다마는... 고승은 어디있소?”이때 희운선사가 큰소리로 불렀다.“배휴!”배휴가 깜짝놀라 엉겁결에 “예”하고 대답했다.“배휴는 어디에 있소?”이말에 배휴는 깨달음을 얻어 선사에게 예를 올리고 귀의했다.
훗날 배휴는 선종황제가 희운선사를 욕보이려 할 때 이를 막아준 인연을 갖게 된다. 희운선사가 염관사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선종황제가 젊었을 적함께 수행한 적이 있다. 예불 뒤에 공부에 대한 문답을 하다가 선사의 의견과 맞지 않았기에 선사에게 세 번이나 손찌검을 받았었다.
후일 황제의 위에 올라 선종이 된 그는 선사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던지거친 행동을 한 스님이라하여 ‘인행사문’이란 욕보이는 호를 주려하자 배휴가 간언하길 “선사가 그때에 세 번이나 손찌검을 했던 것은 폐하의 삼제윤회(三際輪廻)를 끊어준 것입니다”했다.
이에 선종황제가 마음을 돌려 선사에게 ‘단제(斷際)’라는 법호를 내려주었다.
전임 백장회해 |
제10대 중국 선종의 조사 788년 ~ 814년 |
후임 임제의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