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정현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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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정현황후 | |
황후 | |
재위 | 1852 - 1861 |
전임 | 효덕현황후 살극달씨(孝德顯皇后) |
후임 | (추존)효흠현황후 엽혁나랍씨(孝欽顯皇后) |
황태후 | |
재위 | 1861 - 1881 |
전임 | 효정성황후 박이제길특씨(孝靜成皇后) |
후임 | 효흠현황후 엽혁나랍씨(孝欽顯皇后) |
이름 | |
별호 | 동태후(東太后) 자안태후(慈安太后) |
시호 | 효정자안유경화경성정의천조성현황후 (孝貞慈安裕慶和敬誠靖儀天祚聖顯皇后) |
존호 | 자안태후(慈安太后)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37년 8월 20일 |
사망일 | 1881년 4월 8일 | (43세)
배우자 | 청 제국 제9대 황제 함풍제 |
자녀 | 슬하 자녀 없음 |
효정현황후(孝貞顯皇后, 만주어: ᡥᡳᠶᠣᠣᡧᡠᠩᡤ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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ᡥᡡᠸᠠᠩᡥᡝᠣ Hiyoošungga Jekdun Iletu Hūwangheo) 1837년 8월 20일 - 1881년 4월 8일)는 뇨후루 할아 출신으로 출신으로 만주 양황기인(鑲黃旗人, 만주어: ᡴᡠᠪᡠᡥ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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ᠨᡳᠶᠠᠯᠮᠠ Kubuhe Suwayan Gūsai Niyalma)이다. 함풍제의 두 번째 황후이며 섭정 황태후이다. 흔히 동태후(東太后)나 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로 알려져 있다. 존호는 자안단유강경소화장경황태후(慈安端裕康慶昭和莊敬皇太后)이고, 시호는 효정자안유경화경성정의천조성현황후(孝貞慈安裕慶和敬誠靖儀天祚聖顯皇后)이다. 그녀의 처소가 자금성의 동쪽에 있었다 하여 서쪽에 거주한 서태후와 대비되어 동태후로 불렸다.[1]
1852년(함풍 2년) 16세의 나이에 정빈으로 책봉되었고, 정귀비를 거쳐 황후가 되었다.[1] 자식이 없었던 동태후는 서태후의 아들인 동치제를 어려서부터 키웠다. 조금만 잘못해도 야단을 치는 서태후와는 달리 동태후는 감싸 주었기 때문에 동치제는 생모인 서태후보다 자애로운 동태후를 친어머니처럼 여기고 따랐다.[1] 어머니를 싫어했던 동치제가 일부러 동태후와 모자지간처럼 지냈다는 의견도 있다.[2] 1861년 동치제가 즉위하자 동태후는 서태후와 함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동태후는 문맹이었으며[3] 나랏일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지 못했고, 정계에 나설 만한 성격이 아니어서 정치에 관한 것은 서태후에게 일임하고 조용히 지냈다. 이후 동치제는 동태후가 간택한 아로특씨를 황후로 삼고 서태후가 고른 여인은 후궁으로 삼았다.[1] 이 사건을 계기로 서태후와 동치제의 사이는 크게 벌어졌다. 동태후는 광서제가 즉위한 뒤 7년만인 1881년 4월 8일 갑자기 사망했다. 일설에는 서태후가 동태후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태후가 동태후에게 떡을 건네주었는데 그 떡에 독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크다.
전임 효정성황후 |
청나라의 황후 1852년 ~ 1861년 |
후임 효흠현황후 |
전임 효정성황후 |
청나라의 황태후 1861년 ~ 1881년 |
후임 효흠현황후 |
전임 공충친왕 (이복 시제) |
청 목종 동치제의 섭정 1863년 3월 3일 ~ 1870년 3월 3일 |
후임 서태후 (부군 선황 함풍제의 제1측실) |
전임 無 (의붓아들뻘 광서제가 3세로 황제 즉위) |
청 덕종 광서제의 섭정 1874년 12월 17일 ~ 1881년 4월 8일 |
후임 서태후 (부군 선황 함풍제의 제1측실) |